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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31 (1) 2016/12/29 PM 04:53

4장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센고쿠 사상 최고의 전설이 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兵)」~

 

◇ 토요토미(豊臣) 가문의 멸망

~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가신들도 대부분이 전사했다. 『武徳編年集成(부토쿠헨넨슈세이)』에는, 노부시게와 함께 오오츠카 세이안(大塚清庵), 사나다 카게유(真田勘解由), 타카나시 슈젠(高梨主膳)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앞에서 말한 니시오 진자에몬(西尾仁左衛門)의 가보(家譜)를 통해서 확인하면, 넷이서 쉬고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또, 오오츠카 세이안은 아오야기 세이안(青柳清庵), 타카나시 슈젠은 타카나시 나이키(高梨内記) 혹은 우네메(采女)의 오기(誤記)였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이 전사한 것은 사나다 가문이 막말(幕末)에 작성한 『本藩名士小伝(혼반메이시쇼덴)』에 의해 확인 가능하다. 다만, 우네메는 다이스케(大助)의 가로(사실상의 모리야쿠였을 것이다)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다이스케를 따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부시게의 측실(側室)의 오빠인 홋타 사쿠뵤에 오키시게(堀田作兵衛興重)도 전사했다.

 『부토쿠헨넨슈세이』가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에서 노부시게를 따랐다는 사나다 요자에몬(真田与左衛門)은, 사나다 노부츠나(真田信綱)의 남겨진 자식인 사나다 요에몬(真田与右衛門)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함락 후에 살아남아 에치젠 마츠다이라(越前松平) 가문에 사관했다는 뜻이 된다. 노부시게가 사촌형제를 동반하고 있었다면 이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 우에다(上田)의 겟소지(月窓寺)에서 전하는 유서서(由緒書)에 따르면, 노부시게는 아오야기 세이안, 하야시 쇼자에몬(林庄左衛門) 이외에 또 한 사람에게 유품을 맡겨 우에다로 돌려보냈다 한다. 이 사찰은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의 동생인 토키타 타카나가(常田隆永)의 보다이지(菩提寺)였는데, 제 1차 우에다 전투(第一次上田合戦)로 소실되어버렸다. 노부시게는 이 사찰을 재건하여 그곳에 유품을 묻으라 명했다고 한다. 여기에 따르면, 아오야기 세이안은 죽음을 피했다는 뜻이 된다.

 한편, 오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는 노부시게가 만들어낸 우세를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어보려고 필사적이었다. 전술했던대로,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출진은 미뤄졌지만, 하루후사는 히데요리의 우마지루시(馬印)를 가지고 출진했다 한다(『イエズス会日本年報』). 확실히, 우마지루시가 등장하면 모두 히데요리 스스로가 출진한 것이라 생각했음에 틀림 없다. 사기를 높히는 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하루후사는 역시나 히데요리 스스로가 진짜로 출진하지 않으면 결정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그에 대한 협의를 하기 위해, 오오사카(大坂)로 귀성하려 했다. 문제는, 하루후사가 홀로 돌아갔으면 되었을 것을, 이끌고 온 군세 그 자체를 반전시켜버린 것이다. 이것이 오오사카 측에게는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자신들을 버리고 패주하는 것으로 비쳐졌던 듯 하다. 거기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것도 패배의 상징처럼 비쳐졌다. 하루후사의 행동은, 사기를 높히기는 커녕, 오오사카 측의 전의를 잃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는 이것이 승패를 역전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는 것은, 의외로 오오사카 측은 여름 전투에서도 우세였다고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薩藩旧記雑録後編(사츠반큐키자츠로쿠코헨)』도 마찬가지라, 「오오사카 일당의 공적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뛰어난) 부분이 있었다. 이번 승리는, 오오고쇼님(이에야스)이 운이 좋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국허(国許)에 보고하고 있다.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는 히데요리의 부인인 센히메(千姫: 히데타다의 딸)를 보내주고 히데요리와 요도도노(淀殿)의 구명을 탄원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서 히데요리는 자결,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게 된다. 사나다 다이스케도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향년 열셋 혹은 열여섯으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호랑이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케이쵸(慶長) 7년(1602)으로 열네살이었을 것이다. 실명도 노부마사(信昌) 혹은 유키마사(幸昌)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확정할 수는 없다. 

 앞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있어서 토요토미 가문 멸망은 기정노선이 아니었던 게 아니었을까...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결국 히데요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불과 여덟살짜리 서자 쿠니마츠(国松)도 붙잡아서 참수, 오오사카 측에 참전한 자에 대해서는 집요한 잔당 사냥을 행했다. 이러한 방침 전환의 배경에는,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전투에서 예상외로 고전했던 게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사태는, 두번 다시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오오사카 측의 선전이 오히려 토요토미 가문에게 불리하게 작용해버렸다 생각한다면 어떨까?

 오오사카 전투에서의 사나다 노부시게의 무명(武名)은 높이 평가되었다. 무엇보다 용명(勇名)한 게 『사츠반큐키자츠로쿠코헨』에 수록된 「真田日本一の兵、いにしへよりの物語にもこれなき由、惣別これのみ申すことに候(사나다는 일본 제일의 무사이며,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도 이와 필적할 이가 없다)」라는 서장의 문면이다. 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는 「さなた・後藤又兵衛(사나다와 고토 마타베에는 모두 고금무쌍의 무사이다)」라고 말했으며, 쿠게(公家)인 야마나시 토키오(山科言緒)는 「大坂落城、天王寺ニテ度々さなだ武ヘン、其後討死也(오오사카 성 함락, 텐노지에서 사나다가 무명을 떨친 뒤 죽다)」라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 노부시게(信繁)의 처자식들의 그후

~ 오오사카 성(大坂城) 함락이라는 혼란 속에서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처자식들은 일찍이 은거한 적 있었던 키이(紀伊)를 향해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셋째 딸인 오우메(阿梅)는 일행으로부터 떨어져버린 듯 하다. 센다이 한(仙台藩) 다테(伊達) 가문의 가로(家老)인 카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에게 사로잡히고 만다(『白川家留書』). 이른바 「란도리(乱取り)」라는 것이다. 《오오사카 여름 전투도 병풍》에는, 토쿠가와(徳川) 정규병이 여자들을 란도리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오우메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카타쿠라 가문의 정사인 『片倉代々記(카타쿠라다이다이키)』에 따르면, 시게나가는 오우메가 누구의 딸인지도 모르고 시녀로 고용했다. 그후, 노부시게의 딸임을 알고 후처로 맞이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노부시게의 옛 가신인 미츠이 부젠(三井奉膳: 三井豊前의 오기일 것이다)이 달려와 카타쿠라 가문에 임관했다. 이 경위는 사나다 가문이 만든 노부시게의 전기 『左衛門佐君伝記稿(사에몬노스케쿤덴키코)』가 인용한 『白川家留書(시라카와케토메가키)』와 일치한다. 동서에 따르면, 노부유키(信之)의 손자인 유키미치(幸道)가 다테 가문의 가신 중에 사나다 가문과 같은 로쿠몬센(六文銭)을 가문(家紋)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카타쿠라 씨의 당주(시게나가의 양자인 카게나가를 가르키는걸까)와 대면했다고 한다. 「小山田家図(오야마다케즈)」는,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의 양녀 대우로 시집을 갔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부시게의 딸임을 숨기기 위해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위장 공작을 의뢰했을 것이다. 

 노부시게의 처자식들의 그후에 대해서는 고문서, 가보류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 주로 『사에몬노스케쿤덴키코』와 사나다 로쿠몬카이(真田六文会)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기술해 둔다.

 정실인 치쿠린인덴(竹林院殿)은 5월 20일에 키이 이토 군(伊都郡)에 숨어있던 것을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에게 사로잡혔다. 이토 군이라 나와있기 때문에, 쿠도야마(九度山)를 목표로 했을 것이다. 자녀들과 호위 무사 세 사람을 대동했다고 한다. 어쩌면 오우메 이외의 자녀들 대부분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소지하고 있던 황금 57장과 라이 쿠니토시(来国俊)의 와키자시(脇指)는 몰수당해 나가아키라에게 건내어졌다. 이 와키자시는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로부터 노부시게가 하사받은 것이라 한다. 여기까지의 동향은 확실한 사료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후에 어떻게 대우받았는지인데, 특별히 처벌을 받지는 않았던 듯 하다. 일곱째 딸인 오카네(おかね)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개역(改易)당해 다인으로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이시카와 사다키요(石川貞清)와 결혼했다고 여겨진다. 이 오카네의 노력에 의해, 류안지(龍安寺) 오오슈인(大珠院: 오오사카 시 우쿄 구)에 노부시게와 치쿠린인덴, 다이스케(大助)의 묘가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미공개).

 넷째 딸인 아구리(あぐり)는 가모 타다사토(蒲生忠郷)의 가신이자 무츠(陸奥) 미하루 성(三春城: 후쿠시마 현 미하루 쵸)의 성주대리를 맡았던 가모 사토요시(蒲生郷善)에게 출가했다고 여겨진다. 덧붙여, 사토요시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중신인 가모 사토이에(蒲生郷家)의 형에 해당한다.

 다섯째 딸인 오덴(御田)의 모친은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의 딸인 류세이인덴(隆清院殿)이라 여겨진다. 데와(出羽) 카메다 한(亀田藩)의 한슈(藩主) 이와키 노부타카(岩城宣隆)에게 출가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와키 노부타카의 아내가 노부시게의 딸이라는 것은 『岩城家譜(이와키케후)』에서 확인된다. 일설에는 「御田」이라는 이름은 「사나다(真田)」에서 「田」만을 남겨 붙인 이름으로, 노부시게의 딸임을 숨기기 위한 이름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칸에이(寛永) 12년(1635) 6월 11일, 에도(江戸)에 있는 한테이(藩邸)에서 죽었다 한다. 향년 서른둘. 법명(法名)은 켄세이인덴묘코닛신다이시(顕性院殿妙光日信大姉). 묘케이지(妙慶寺: 유리혼죠 시)를 열어 부친인 노부시게를 공양했다.

 노부시게가 전사한 뒤인 겐나(元和) 원년 7월 14일, 아들인 유키노부(幸信)가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생모는 류세이인덴이며, 누이를 의지해 이와키 씨를 모셨다고 한다. 칸분(寛文) 7년(1667) 6월 23일에 향년 쉰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섯째 딸인 오쇼부(阿菖蒲)는 오우메와의 인연으로 카타쿠라 가문을 의지하였으며, 카타쿠라 가문의 가신이 되어 있던 타무라 사다히로(田村定広)에게 출가했다. 타무라 씨는 원래 무츠 미하루의 쿠니슈(国衆)로, 사다히로의 큰어머니는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정실인 메고히메(愛姫)이다. 

 차남인 타이하치(大八) 역시 카타쿠라 가문을 의지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타이하치에 대해서 사나다 씨 측의 기록은 5월 5일에 쿄(京)에서 인지우치(印字打: 돌 싸움)를 하다 맞은 곳이 잘못되어 요절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쿠도야마 칩거 당시의 일일 것이다. 한편, 센다이 한 측의 기록에서는, 타이하치는 카타쿠라 가문의 비호를 받았으며, 카타쿠라 모리노부(片倉守信)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한다. 5월 5일 사망설은 카타쿠라 가문이 그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유포한 거짓 정보라 한다.

 덧붙여, 장녀인 스헤(すへ)는 치이사가타 군(小県郡) 나가쿠보쥬쿠(長窪宿: 나가노 현 나가와 쵸)의 유력자(근세에 다이묘가 숙박하는 본진이 된다) 이시아이 쥬조 미치사다(石合十蔵道定)가 아내로 맞이한 게 문제가 되었다. 칸에이 16년(1639), 오오사카의 로닌(牢人)들을 숨겨준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 것이다. 미치사다는 바쿠후(幕府)에 불려가 문초를 받았는데, 스헤를 아내로 맞이한 게 오오사카 전투 이전이었음이 밝혀지게 되면서 불문에 붙여졌다. 그후 스헤는 칸에이 19년 10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노부시게의 처자식을 가까이 둔다는 것은 문제가 될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래도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은, 노부시게의 용명을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부시게의 용명은 널리 알려졌고, 오오사카 전투 직후부터 히데요리를 데리고 살아남았다고 하는 전승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죽은 뒤 약 반세기가 지나 간행된 군기물 『難波戦記(나니와센키)』에서는, 히데요리를 지지한 지장(智将)으로서 묘사되어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런데, 노부시게가 오야마다 시게마사, 무라마츠도노(村松殿) 부부와 오오사카 전투 사이에 서장을 교환했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 서장은 현재까지도 오야마다 가문에서 가보로 전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분큐(文久) 3년(1863)에 오야마다 씨는 이 노부시게 서장 두 통을 인쇄물로 만들어 오야마다 이치몬(一門)에 나눠주었다. 이 해는, 노부시게 사후 249년째에 해당... 즉, 250주기였다. 당시의 오야마다 가문 당주 유키카타(之堅)는, 노부시게의 서장을 소장하는 게 자기 가문의 아이덴티티를 발견했을 것이다. 

 또 하나, 코야 산(高野山) 렌게죠인(蓮華定院)에서 전하는 마사유키(昌幸), 노부시게 상(像)은, 사나다 가문의 가신들에게 널리 서사(書写)되었던 듯 하다. 비슷한 대우를 받은 인물은, 한조(藩祖)인 사나다 노부유키 밖에 없다. 사나다 가문 가신에게 있어서, 이 부자는 특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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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元大介    친구신청

오우메같은 경우엔 애초에 사나다 유키무라가 다테 진중으로 보내어
가타쿠라 시게나가와 짝을 지어 달라고 서신을 보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참고문헌이 있으면 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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