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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34[完] (0) 2017/01/03 PM 05:18

5장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 ~마츠시로(松代) 10만석의 기반을 굳힌 한조(藩祖)~

 

◇ 한정 기구(藩政機構)의 정비

~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는 주요한 영지에 「키모이리(肝煎)」라는 역직을 두어 광역행정을 맡겼다. 먼저 케이쵸(慶長) 9년(1604) 6월에 카와하라 츠나이에(河原綱家)를 본령(本領)인 사나다(真田), 요코오(横尾: 우에다 시 사나다 쵸)의 키모이리로 임명하여 「시키카타 법도(職方法度)」 「덴지유비비키(田地指引)」를 수행하도록 명령했다. 「시키카타(職方)」라는 것은, 검단권(検断権: 경찰권)을 가르킨다. 「덴지유비비키」라는 것은 어쩌면 농사지도를 의미할 것이다. 물론, 직접 호미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지도 총괄 같은 게 아니었을까?

 이어서, 우에다(上田)령 지배에 집중하기 위해 누마타(沼田)령 지배에 있어서의 가신의 역직을 정비하려 했다. 케이쵸 19년(1614), 노부유키는 이데우라 마사스케(出浦昌相)를 「아가츠마 시키카타(吾妻職方)」로, 오오쿠마 칸에몬노죠(大熊勘右衛門尉)를 「누마타 시키카타(沼田職方)」로 임명해 아가츠마(吾妻), 토네(利根) 양군의 검단권을 맡겼다.

 문서행정 기구는 마사유키(昌幸)의 그것을 답습, 타케다(武田) 이후의 봉서식 주인장(奉書式朱印状)을 사용했는데, 야자와 요리유키(矢沢頼幸)를 필두로 하는 가로(家老)들의 연서장(連署状)도 자주 발견되게 되었다. 이 연서장은 카오(花押)가 아닌 소형 흑인(黒印)을 찍었다는 특징이 있다. 덧붙여, 노부유키 대에는 매형인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 유키토모(之知) 부자가 한정(藩政)에 참여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노부유키는 차츰 한정 기구(藩政機構)를 정비해 갔다.

 그런데, 노부유키의 가로들 중에 이색적인 존재가 이데우라 마사스케다. 이데우라 씨는 원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를 모셨던 하니시나 군(埴科郡)의 소규모 쿠니슈(国衆)로, 타케다 가문에서는 마사유키의 요리키(与力)로 배치되어 있었다. 타케다 가문이 멸망한 뒤에는 독립해서 움직이고 있어, 마사유키에게로 복속한 것은 텐쇼(天正) 11년(1583)이었다.

 『本藩名士小伝(혼한메이시쇼덴)』에 따르면, 마사유키는 타케다 가문으로부터 「슷파(透破: 닌쟈)」를 맡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타케다, 사나다 두 가문의 첩보를 한손에 인수받았던 존재로서 전해졌던 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뒤에서 숨어서 활동한 존재였는가 하면,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아가츠마 시키카타」로 임명된 당당한 가로였다.

 그런데다, 노부유키가 낸 명령 중에는, 이데우라 마사스케의 흑인장이 찍히고나서야 처음으로 실행에 옮겨진 게 있었다. 노부유키 주인장의 내용을 체크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가 마사스케였던 것이다.

 그만한 신뢰를 노부유키로부터 받은 가로는 그 이외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슷파」의 두령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역사라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다.  

 

 

 

◇ 마츠시로(松代) 전봉(転封)

~ 케이쵸(慶長) 15년(1610), 장인인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가 세상을 떠났다.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는 키슈 한(紀州藩)의 한슈(藩主)인 아사노 유키나가(浅野幸長)로부터 조문 서장을 받았다. 유키나가는 마사유키(昌幸), 노부시게(信繁)를 쿠도야마(九度山)에서 맡았던 인물이었다.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 때에 노부유키는 병 때문에 에도(江戸)에 머물러, 자식인 노부요시(信吉: 당시 열아홉), 노부마사(信政: 당시 열여덟)가 대신 출진한다. 야자와 요리유키(矢沢頼幸) 이하 가로(家老)들은 보좌를 맡았다. 노부유키는 죽은 장인의 뒤를 이은 혼다 타다토모(本多忠朝)의 지도를 부탁한다며 요리유키에게 서장을 보냈다. 

 그때, 노부유키가 평상시 키우고 있던 가신들 만으로는 군세가 부족했다. 그래서 신규로 아시가루(足軽)를 고용했다. 익년 4월, 지행 보상에 시간이 걸린다는 보고를 받은 노부유키는, 가로인 미야시타 토에몬노죠(宮下藤右衛門尉)에게 한 사람당 6관문씩 주라며 지시를 내렸다. 장소는 토에몬노죠가 다이칸(代官)으로서 담당하고 있던 쿠라이리지(蔵入地: 료쇼)로부터 내어주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불만을 말할 수 없는 조속한 처치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노부유키가 「비정규 고용」인 아시가루를 이 이전에 해고하고 있어, 오오사카 전투에 임하면서 서둘러 모은 모습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익년의 여름 전투도 역시나 두 아들이 대신해서 출진했다. 당시, 노부유키는 중풍을 앓고있어, 걸을 수 조차 없었다고 한다. 사나다군은 혼다 타다토모를 따라 카와치 입구(河内口)에 포진했기 때문에, 숙부인 노부시게와 창을 겨루는 일은 없었다. 덧붙여, 이 전투에서 혼다 타다토모는 전사했기에 역시나 오오사카 전투는 격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오사카 전투에서 온 힘을 다한 미야시타 토에몬노죠였지만, 전후에 사나다 노부시게와의 내통 혐의가 있어 주살당했다 한다. 혐의는 금은, 야지리(矢尻: 화살촉), 텟포의 탄약을 은밀히 노부시게에게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경위는 확실하지 않아, 바바 몬도(馬場主水)라는 사나다의 옛 가신이었던 시노비(忍)가, 노부유키 자신이 노부시게와 내통했다고 바쿠후(幕府)에 고소한 게 발단이었다 한다. 이 보고를 받은 바쿠후가 수사를 해보니, 내통자는 노부유키가 아니라 미야시타 토에몬노죠 뿐이라 결착, 노부유키의 명령으로 토에몬노죠는 숙청당했다고 여겨진다. 이 사건은 양질의 사료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노부시게가 토에몬노죠에게 보냈다고 여겨지는 서장사(書状写) 서판에는 「幸村(유키무라)」로 되어 있어, 확실한 거짓 문서이다. 하지만, 이 이후에 미야시타 토에몬노죠가 사나다 가문 안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사실이다. 역시나, 어떠한 의옥 사건(疑獄事件)이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역시 토쿠가와(徳川) 측이 오오사카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데에서 기인한 문제일 것이다. 바쿠후는 오오사카(大坂)의 로닌(牢人)들을 집요하게 처벌했다. 그리고 노부시게의 활약과 노부유키의 병에 의한 불참전이 의혹을 낳았을 것이다.

 노부유키는 미야시타 토에몬노죠에게 엄벌을 내렸다.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는 겨울 전투 후에 서장을 주고 받았는데, 그 일로 문책을 받은 일이 없었기에, 전시에 연락이 오갔음을 보여준 게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사나다 노부유키 그 자체가 의심 받았다는 것이다. 가로인 키무라 츠나츠라(木村綱円)는 바쿠후에게 세키가하라(関ヶ原) 이후, 노부유키는 마사유키의 옛 가신을 한 사람도 사관시키지 않았다고 진상했다는데(『翁草』), 이는 사실과 반한다. 노부유키의 전후 처리는, 마사유키의 옛 가신에 대한 영지 안도부터 시작되었다. 노부유키로서는 바쿠후에게 노부시게와의 연결고리를 의심받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에다(上田) 부흥에 힘을 기울이기 위함인지, 노부유키는 본거지를 우에다로 옮겼다. 『信濃国小県郡年表(시나노노쿠니치이사가타군넨효)』는, 『沼田記(누마타키)』를 근거로 겐나(元和) 2년(1615)의 일이라 하는데, 확증은 없다. 그때, 누마타(沼田)령 3만석은 적자인 노부요시에게 물려주었다. 여기서 누마타 한(沼田藩)이 사실상 성립된다.

 겐나 8년(1622) 10월, 사나다 노부유키는 우에다 한(上田藩) 6만 5천석에서 마츠시로 한(松代藩) 10만석으로 가증 전봉(加増転封)되었다. 한령(藩領)은 시나노 하니시나(埴科), 사라시나(更級), 미즈우치(水内), 타카이 군(高井郡)이다. 누마타 한 3만석은 그대로 적자인 노부요시가 영유했다. 전봉이라고는 해도, 우에다 한과 마츠시로 한은 인접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츠시로 성(松代城)은 과거의 카이즈 성(海津城)이었기에, 사나다 씨와 인연이 깊은 땅이었다. 사나다 씨라 하면, 아무래도 바쿠후와의 인연(因縁)이 상정되기 쉽상이지만, 결코 나쁜 대우를 받은 게 아니었다. 

 다만, 우에다 한에서는 칸다카제(貫高制)가 채용되어 있었던 데에 반해, 마츠시로 한에서는 코쿠다카제(石高制)가 채용되어 있었던 게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칸에이(寛永) 원년(1624)에 노부유키는 1관문 = 3석이라는 환산으로 가신의 지행(知行)을 재편했다. 새롭게 우에다 한으로 입부(入部)한 센고쿠(仙石) 씨는 1관문 = 2석 4두 7변으로 환산했기 때문에, 비교적 가신에게 유리한 환산이었을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사나다 씨 그 자체가 3만 5천석의 가증을 받았던 데에 반해, 가신에 대한 가증은 없었다. 따라서, 노부유키는 예기치 않게 직할령 확대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커다란 반발이 생겼다. 중, 상급 가신 48명이 탈번(脱藩)하여 과반수가 우에다로 귀농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48인 로닌 사건(四十八騎浪人事件)」이라 불리우는 사건이다. 가장 지행이 높았던 이이지마 이치노죠(飯島市之丞)는, 3백석을 받고 있었다. 차석 가로인 오야마다 유키토모(小山田之知)의 지행지가 9백 69석이었기 때문에, 상급 가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또, 이치노죠의 부친은 마사유키의 코야 산(高野山) 유배를 봉공하여 익년에 귀국한 인물이다. 사나다 가문에 있어서는 충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사나다 씨의 본거지의 지자무라이(地侍) 출신이었기에,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촌락의 구성원이었다. 사나다 씨 아래에서 일을 하긴했지만, 선조 대대로 전해진 토지를 떠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을 없앨 수 없었을 것이다. 소규모 쿠니슈 출신에다, 가로가 지자무라이 출신이라는 사나다 씨의 특징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형태였다. 

 또, 노부유키 자신도 행하던 정책이긴 했지만, 각 다이묘들은 황폐해진 촌락을 부흥시키기 위해, 귀농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접해 있는 옛땅 우에다로 돌아가기가 쉬웠으리라 생각된다.

 마츠시로 전봉 때에, 노부유키는 차남인 노부마사에게 1만석, 셋째 아들인 노부시게(信重)에게 7천석을 주었다(『真武内伝』). 장소는 하니시나 군이다. 노부유키가 직접 영유한 것은, 8만 3천석에 그쳤다. 본래라면, 적자인 노부요시(누마타 한슈)가 가독(家督)을 이어야했겠지만, 칸에이 11년(1634)에 마흔살의 나이로 요절해버렸다. 법명(法名)은 텐케이인덴게츠슈죠산다이코지(天桂院殿月袖浄珊大居士)이다. 이 때문에, 차남인 노부마사가 뒤를 잇게 된다.

 누마타 한은 노부요시의 적자인 쿠마노스케(熊之助)가 뒤를 이었지만, 그 역시 요절해버리고 말아, 노부마사가 누마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결과, 누마타 한슈는 사나다 본가를 잇기위한 정무 견습 같은 입장이 된다.

 노부유키는 매우 장수했기 때문에, 중신들이 하나 둘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겐나 9년(1623) 8월 18일에는 이데우라 마사스케(出浦昌相)가, 칸에이 3년(1626) 3월 21일에는 야자와 요리유키가, 칸에이 4년 7월 15일에는 이케다 츠나시게(池田綱重)가, 칸에이 11년 7월 21일에는 카와하라 츠나이에(河原綱家)가, 칸에이 14년 8월 3일에는 매형인 오야마다 시게마사가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마사유키 이래의 중신들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나 갔다. 누이인 무라마츠도노(村松殿)도 칸에이 7년 6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예순여섯. 법명은 호쥬인덴잔소테이무다이시(宝寿院殿残窓庭夢大姉)였다. 

 노부유키는 반복해서 은퇴를 바랐지만, 4대 쇼군(将軍)인 토쿠가와 이에츠나(徳川家綱)가 어렸기에 노부유키는 「천하의 장식(天下ノカサリ)」으로서 있어달라 부탁받았다. 요컨데, 장로로서 바쿠후를 지탱해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토자마 다이묘(外様大名)이기 때문에, 막정(幕政)에 관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메이레키(明暦) 2년(1656), 노부유키가 아흔한살에 이르렀을 때야 겨우 바쿠후의 허가가 떨어졌다. 만지(万治) 원년(1658) 7월, 탁발하여 잇토사이(一当斎)라 칭했다. 그런데, 가독을 이은 노부마사도 예순한살의 고령이 되어 있어, 이 만지 원년 2월에 예순두살로 세상을 떠났다. 법명은 엔요인덴이료잇츄다이코지(円陽院殿威良一中大居士)이다.

 따라서, 노부유키가 다시 정치의 겉무대로 끌려나오게 된다. 유언에 의해, 가독은 노부마사의 막내 아들인 유키미치(幸道)가 잇게 되었지만, 아직 두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누마타 한슈인 사나다 노부나오(真田信直: 노부요시의 아들. 실명은 노부토시라 여겨지지만 이는 오인)가 불만을 품고서 가독 상속을 바란 것이다. 노부나오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부유키 직계 손자였으며, 연령적으로도, 또 누마타 한슈라는 입장에서도 자신이야말로 후계자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노부유키는, 스스로 유키미치를 후견하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에 의해, 이 난국을 이겨냈다. 아흔세살이나 된 큰어르신의 의향을, 바쿠후는 밀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 노부나오의 본가를 향한 저항심을 키우게 했다. 노부나오는 강제적인 검지(検地)를 행해 누마타 한의 코쿠다카(石高)를 3만석에서 14만 4천석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재정 재건 수단이었다고도 생각되지만, 확실한 학정(苛政)이었기에 최종적으로 개역(改易)당하고만다. 덧붙여, 누마타 한은 그후에 바쿠후가 치른 검지로 6만 5천석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노부나오는 배 이상 코쿠다카를 생산해 내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게 된다. 영민들의 반발도 당연했다.

 집안 소동을 미연에 방지, 마츠시로 한 사나다 가문의 존속을 반석으로 만들어 놓은 게, 노부유키가 한 마지막 공적이 된다. 만지 원년(1658) 8월부터 건강상태가 나빠져, 10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아흔셋. 법명은 다이호인덴테츠간잇토다이코지(大鋒院殿徹巌一当大居士)이다. 근신으로서 모시고 있던 스즈키 우콘(鈴木右近)이 뒤를 쫓아 순사(殉死)했다. 우콘은 나구루미 성(名胡桃城) 사건으로 자결한 스즈키 몬도(鈴木主水)의 아들로, 향년 여든다섯이었다. 이 때문에 각지에 있는 노부유키의 묘 옆에는 우콘의 묘가 나란히 모셔지고 있다.

 이후, 사나다 가문은 마츠시로 한 10만석으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존속하게 된다. 그 기반을 쌓아올린 이가 노부유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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