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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10 (0) 2017/02/19 AM 01:09

제 1 장 인닌(隠忍)의 일족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와 센고쿠(戦国)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

~ 타몬야마 성(多聞山城)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텐쇼(天正) 4년(1576)에 쌓은 아즈치 성(安土城: 시가 현 오우미하치만 시 아즈치 쵸)보다 앞서 축성된 근세 성곽의 기원이라 여겨진다 보는 설도 있다. 이시가키(石垣) 위의 나가야(長屋)를「타몬(多聞)」이라 부르는 성곽 용어의 어원이라 여겨지는 이 성은, 토다이지(東大寺)의 북서쪽, 호렌 쵸(法蓮町)의 와카쿠사 중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일대로,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가 아즈치 성을 축성하기 16년이나 전에(에이로쿠 3년 = 1560) 축성한 히라야마지로(平山城)이다. 

 축성으로부터 4년이 지난 에이로쿠(永禄) 7년(1564)에 남도(南都)를 방문한 포르투갈의 선교사는 서유럽에서 볼 수 없는 절호의 미관(美観)이다... 라는 뜻의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을 정도이기 때문에, 타몬야마 성을 처음으로 목격한 야마토(大和)의 여러 씨족들은 그 위관(偉観)에 간담이 서늘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코후쿠지(興福寺)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져 온 그들은, 이 큰 사찰의 건축 규모를 압도하는 듯 한 장대함에, 축성주인 히사히데의 권세는 물론이고, 그가 가진 재력에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당시 서른두살이었던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도,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부친인 이에요시처럼 처세에 모든것을 바쳤던 그는, 솔선하여 히사히데에게 귀속하는 길을 선택해 충성을 다했다. 히사히데도 야마토의 사정에 정통해 있던 지자무라이(地侍) 야규 씨의 존재를 기화(奇貨)로 삼아 그들을 극진히 대우해주었다.

 하지만, 타몬야마 성은 입경(入京)한 뒤로부터 5년 후인 텐쇼 원년(1573), 확집(確執)에 의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쫓아낸 해에 오다 노부나가가 접수하게 되어 텐쇼 5년(1578)에 파각(破却)을 명령받고 있다. 그것은 야마토에서의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단계적인 추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동안의 야규 세키슈사이는, 마츠나가 씨 휘하에 있으면서 신흥 거대 세력인 오다 씨와의 관계가 밀접해지기를 바랐음에 틀림 없다. 일찍이, 야마토로 들어온 권력자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 거기다 미요시 씨를 대신한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모두 재빠르게 귀속했을 때와 같은 길을 선택하려 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야규 가문의 당주인 세키슈사이에게 요구한 역할은, 어디까지나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자신의 관계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한 주선... 혹은, 야마토로 가는 안내역 말고는 없었던 듯 하다.

 노부나가가「柳生新左衛門尉殿」... 즉, 세키슈사이 앞으로 보낸 서장이 두 통 남겨져 있다. 모두 연호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중 한 통을 의역해 보면,


【아시카가 요시아키(당시에는 足利義秋라 썼다) 공이 입경하게 되었으니, 얼마 안 가, 그대도 이를 받들어 모셔서 충절을 다하기를 바라오. 그에 따라 요시아키 공과 타몬야마 성의 무리들이 더욱 더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게 중요하오. 「히사히데 부자(히사히데와 아들인 히사미치 부자를 가르킨다)」를 원조한다는 취지의 서약을 맺을터이니, 반드시 협력해 주어야 하오. 때로 「와이(和伊: 요시아키의 막신이자 노부나가의 가신인 와다 이가노카미 코레마사를 가르킨다)」가 이번 일에 대해 설명할 것이오. 이와 더불어, 「사쿠마 우에몬노죠(佐久間右衛門尉: 노부나가의 중신인 사쿠마 노부모리)」를 통해 이 서장을 전하게 될 것이오.


 - 12월 1일 노부나가(천하포무 인이 찍혀있다)

 야규 신자에몬노죠 님 숙영(御宿所)】


 이 서장은 필시 요시아키를 모시고 노부나가가 입경하기 전 해... 즉, 에이로쿠 10년(1567) 12월 1일 자로 보낸 것이리라. 노부나가가「천하포무(天下布武)」 인장(印章)을 사용하게 된 것은, 미노(美濃) 공략을 끝내고 사이토(斎藤) 씨의 죠카마치(城下町)인 이노쿠치(井ノ口)를 기후(岐阜)로 개명한 동년 8월 중순부터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서는 정합성(整合性)이 있다.

 이 무렵, 야마토에서는「타몬슈(多聞衆)」... 즉, 마츠나가 히사히데& 미요시 요시츠구(三好義継: 나가요시의 조카이자 가독 상속자)와,「야마토슈(大和衆)」... 즉,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 미요시 삼인방(三好三人衆)이 처절한 전투를 반복하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입경에 대비해 야마토의 정국(政局)을 안정시켜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같은 내용의 서장을「코후쿠지에 재진 중인 무리」앞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는 츠츠이들의 야마토슈를 가르킨다.

 싸움을 멈추게 하고 양자를 입경이라는 대의(大儀)에 따르게 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2년 전(에이로쿠 8년 = 1565)에 요시아키의 친형인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를 죽인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요시츠구에 대한 사면을,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로부터 받아내는 데에는, 여러가지로 수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데다, 노부나가는 히사히데와 히사미츠(久通) 부자가 입경에 봉사하도록, 마츠나가 씨 휘하인 야규 세키슈사이에게 주선을 하게 한 것이었다. 이 서장의 날인으로부터 9개월 뒤에 노부나가는 입경하게 된다. 

 세키슈사이 앞으로 보낸 두번째 서장은, 겐키(元亀) 원년(1570)의 것이라 여겨진다.

 이 해 여름, 노부나가는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와 손을 잡은 오우미(近江)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와 싸우고 있었다(6월 28일). 이른바「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다. 이러한 反오다 세력의 기운은 키나이(畿内)에 파급을 끼쳐, 미요시 삼인방이 거병하여 셋츠(摂津)의 노다 성(野田城), 후쿠시마 성(福島城: 오오사카 시 후쿠시마 구)에 진을 쳤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기후를 떠나, 8월 23일에 쿄토(京都) 혼노지(本能寺)의 진소(陣所)에 머물렀다가 쇼군인 요시아키의 군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군을 움직여 노다, 후쿠시마의 미요시 세력을 공격한다(8월 28일). 이러한 상황 아래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오오사키 시 츄오 구 오오사카 성)가 미요시 세력의 편이 되어 거병한다. 9월 12일의 일이다.

 세키슈사이 앞으로 보낸 노부나가의 카오(花押)가 찍힌 서장의 일자는 월 21일이라 나와있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상경하기 직전에 해당한다. 취지는, 미요시 공격 때에,「산미(山美: 야마오카 미마사카노카미 카게타카)」가 참진할 수 있게 공작할 것을 요구한 데에 있었으리라 사료 된다.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景隆)는 오우미 남부의 호족이었는데, 노부나가가 입경했을 때, 권유를 거부했기 때문에 공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야마토의 야규령으로 도망가 자신의 딸을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인질로 보내 항복한 듯 하다. 서장은, 그 인질에 대해 히사히데와 노부나가 사이에서 내담(内談)이 있었음을 말한 다음, 우선은「미요시 뇨보슈(三好女房衆: 반슈 미키 성의 성주인 벳쇼 씨가 히사히데에게 보낸 인질들인 듯 하다)」를 벳쇼 야스하루(別所安治)에게 돌려보낼 수 있게 주선하라... 며 세키슈사이에게 명령했던 게 아니었을까? 덧붙여, 거기에 대해서는「켓산(結山: 마츠나가의 가신인 유키 야마시로노카미 타다마사)」과 상담하라 일러두고 있다. 

 이 서장을 겐키 원년의 것이라 추고(推考)하고 있는『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가, 동년 9월 4일에 벳쇼 씨가 노부나가의 이시야마 혼간지 포위전에 150기를 동원해 가세했다는 것과 관련해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이상의 해석을 하게되었는데, 서장을 발행한 해에 대해서는 이설(異説)도 있고, 내용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이 있다.

 전해지고 있는 이상의 두 통의 서장(今村嘉雄編『史料 柳生新陰流』下巻所収)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조종하기 위해 그의 휘하에 있던 야규 세키슈사이를 어르고 달래며 사주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는 양자 사이에 내밀한 연락이 있었던 것이, 특정 인물의 이름을 약칭하여 기록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노부나가와 세키슈사이와의 관계는 이를 넘지는 못 했다.

 야규 씨는 오다 직속 휘하의 반열에 서기 위해 지리멸렬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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