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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11 (0) 2017/02/19 AM 09:23

제 1 장 인닌(隠忍)의 일족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와 센고쿠(戦国)

 

 

◎ 야규 고(柳生郷)에서 은거하다

~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라 하면 하극상(下克上)의 장본인인 것 처럼 역사상 주장되고 있다. 이 생년미상의 인물은 기회를 엿보는 데에 민감했기에 상황에 대한 처신이 매우 빨랐고, 덕분에 포학(暴虐)한 기질을 겸비하고 있었다.「효웅(梟雄)」이라고도 불리운 이유이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입경(入京)하기 전년(에이로쿠 10년 = 1567)의 늦가을 10월 10일 심야에, 적대하고 있던 미요시 삼인방(三好三人衆)이 자리잡은 토다이지(東大寺) 대불전(大仏殿)을 야습해 이를 태워버린 방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효웅으로서의 면목약여(面目躍如)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런 포학함도 노부나가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 했다. 그는 입경한 노부나가의 야마토(大和) 평정의 압잡이가 될 것을 잠자코 받아들여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 토벌에서 활약했으며, 또, 카와치(河内)와 셋츠(摂津), 이즈미(和泉)에서도 노부나가를 위해 싸웠다.

 그러한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키게 된 것은, 겐키(元亀) 2년(1571) 5월의 일이었다. 이는 노부나가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불화를 일으켜,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주축으로 하는 反오다 세력이 활기를 띄었던 기회를 틈탄 것이다. 그러자, 숙적이라 해야할 법한 츠츠이 쥰케이는 노부나가에게 귀속해 숨을 돌렸다. 양자가 격돌한 것은 동년 8월, 쥰케이가 거점으로 삼았던 타츠이치 성(辰市城: 나라 시 토쿠죠 쵸)을 히사히데가 공격했을 때다. 

 당시 마흔세살이었던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는 히사히데 휘하에 속해서 참전했지만 대패를 맛 봐야했다. 부친과 함께 종군한 스무살 청년이던 장남 요시카츠(厳勝)는 이 격전 도중에 중상을 입어, 이후에 평생 불구로 살아가게 된다.

 선견지명이 뛰어났을 세키슈사이가, 히사히데를 떠나 노부나가에게 속해야겠다는 길을 선택하지 못 했던 것은, 이상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어쨌든, 장남의 중상이 자기 안에서 길고 긴 꼬리를 말아버린 통한의 사건이 된 것이다. 

 그후의 세키슈사이는 히사히데의 추락을 순순히 따를 뿐이었다.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의 중신인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를 통해 노부나가 휘하에 속해 있었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휘하가 된 츠츠이 쥰케이와 화해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포위 때에는 텐노지 요새(天王寺砦: 오오사카 시 텐노지 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게 덤볐다가 쫓겨난 텐쇼(天正) 원년(1573)은, 야마토에서의 마츠나가 씨의 지배가 끝난 해였다. 히사히데의 거점이었던 타몬야마 성(多聞山城: 당시는 아들인 히사미츠가 거성으로 삼고 있었다)은 넘겨주게 되어 노부나가의 신하인 야마오카 타케타카(山岡景隆)가 모쿠다이(目代)로서 거주하게 되었으며, 마츠나가 부자는 카와치의 시기산 성(信貴山城)으로 퇴거하게 된다. 

 세키슈사이가 야규 고(柳生郷)에서 은거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다.


【世をわたるわざのなきゆへ 兵法をかくれがとのみたのむ身ぞうき】


 후년에 만든 세키슈사이의『兵法百首(헤이호햐쿠슈)』모두에 나오는 이 노래는, 난세에 대처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개탄하는 한편, 마흔다섯살이라는 나이의 은거와 함께 병법에 대한 연구를 깊히 해야겠다는 결의를 읊은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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