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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28 (0) 2017/03/19 AM 09:04

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무네노리(宗矩)의 제자들(門系)과 정보망

~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의 은연한 힘의 배경으로, 좀 더 다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무네노리의 주된 제자들이다. 무네노리의 제자들은 전국 각지의 여러 한(藩)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데, 그들 태반은 여러 다이묘(大名)들의 요구에 응해 무네노리가 추천을 해주면서「천하의 검(天下の剣)」인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의 사범으로서 들여보낸 제자들이었다.

 여기에는 전술한 키무라 스케쿠로 토모시게(木村助九郎友重)라는... 굴지의 수제자도 포함되어 있다. 스케쿠로는 야규 고(柳生郷)와 인접해 있는 오우치(邑地: 나라 시 오오지 쵸) 출신이다. 부친과 함께 로닌(浪人)으로 살았으나, 에도(江戸)로 나와 무네노리에게 입문하면서 즉시 두각을 드러내었고,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가 쇼군(将軍)이 되기 전부터 대련 상대를 맡았다.

 나중에 스케쿠로는 이에미츠의 명령에 따라 이에미츠의 동생인 타다나가(忠長)에게 출사했기 때문에, 스루가(駿河: 시즈오카 현 동부)로 가게 되는데, 이때, 이미 마흔살이 넘었었다. 이윽고 주군인 타다나가가 개역(改易)에 처해졌기 때문에, 2년 뒤인 칸에이(寛永) 11년(1634), 쉰살 때에 키슈(紀州) 와카야마 한(和歌山藩)의 한슈(藩主)인 토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에게 초빙되어 600석을 영유하는 신분이 되었다. 이때, 야규의 병법을 쓰기를 기피하자, 무네노리의 지시에 따라「운츄류(運籌流)」라는 유파명을 세웠는데, 후에 야규 신카게류(柳生新陰流)... 약칭,「류세이류(柳生流)」를 칭할 것을 허락받았다. 죠오(承応) 3년(1654)에 일흔살 때에 세상을 떠났는데, 적자인 스케다유 토모야스(助太夫友安) 이후, 자손대대로 와카야마 한의 사범이 되었다. 덧붙여, 스케쿠로의 저서라 전해지는『兵法聞書(헤이호키키가키)』는, 무네노리와 쥬베에의 가르침을 정리한 귀중한 사료라 여겨진다.

 에치젠(越前) 후쿠이 한(福井藩) 50만 5천석에게 고용된 이즈부치 헤이베에 모리츠구(出淵平兵衛盛次) 역시 자손대대로 사범 자리에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 이후에 에치젠 68만석에 봉해진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차남이다. 그런 히데야스가 죽은 뒤에 가독(家督)을 이어받은 장남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는 겐나(元和) 9년(1623)에, 앞에서 말한대로 개역당해 분고(豊後)로 유배되었는데, 그가 남긴 영지 태반은 동생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忠昌)에게 상속되었으며, 그 본거지는「키타노쇼(北ノ荘)」에서「후쿠이(福井)」로 교체되었다. 그의 자손들에 의해「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은 메이지시대明治時代)의 폐번(廃藩)에 이를 때까지 존속된다. 

 헤이베에가 2대 한슈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에게 고용된 것은 칸에이 9년(1632), 정확히 스승인 무네노리가 소메츠케(惣目付)로 등용된 해로, 녹봉은 500석이었다. 쇼호(正保) 2년(1645)에 타다마사가 죽었을 때, 헤이베에는 사퇴를 신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오히려 200석을 가증받았다(도합 700석). 이 해는 무네노리가 이미 병석에 누워있던 시절이었는데, 헤이베에는 에치젠에서 에도로 올라와 간병을 맡았다 전해지고 있다. 사제간의 유대감이 깊었음이 추고(推考)되나, 이를 허가한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과 무네노리의 교류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두자면, 무네노리는 분고 유배 이후의 마츠다이라 타다나오와도 교류가 있었다. 매사냥에서 잡은 학을 무네노리가 선물한 것에 대해「에치젠 타다나오」라는 서명과 카오(花押)가 있는 감사장이 전해지고 있다. 연월은 쓰여져 있지 않지만,「야규 타지마님」이라 쓰고있기 때문에, 무네노리가「종 5위하 타지마노카미」로 서임된 칸에이 6년(1629)에서 그가 죽은 해인 쇼호 3년(1646) 사이에 보낸 것이리라(타다나오는 케이안 3년... 즉, 165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건 그렇고, 여러 한에 뿌리를 내린 제자들과 무네노리와의 사제 관계는, 그야말로 견고했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한 관계는 한편으로, 각각의 한의 내정에 관한 정보 수집에 편의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무네노리가 소메츠케직에 있었을 때는 물론이고, 퇴직한 뒤에도 그 정보 수집력은, 그가 가진 특이한 잠재 능력으로서, 이에미츠 뿐만 아니라, 다이묘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있던 이에미츠의 강권 정치라는 세상 속에서, 특히나 여러 나라의 동정, 여러 다이묘들의 비밀리에 이뤄지는 연동(連動)에 관한 정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무네노리가 장악하고 있는 정보망은, 한 층 더 기화(奇貨)로 삼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옛부터, 무네노리를 미국 CIA의 장관처럼 떠받든 경향이 있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말해 온 이유들 때문이리라. 각 나라, 각 계층에 네트워크를 가진 정보 수집 기관이 CIA인데, 그 정보 수집의 수단으로서는 첩보 행위가 동반되며, 또한 미국과 관련된 정치적 분쟁이 있을 때에는, 극비 활동, 모략도 굳이 마다하지 않는 임무도 포함된 것도 지적받는다.

「그림자 군단」「우라야규(裏柳生)」「온미츠 쥬베에(隠密十兵衛)」같은 허구의 산물은, 야규 = CIA라는 억측과 구분하기 어렵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무네노리의 정보 수집력은 시인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와 그의 일족, 제자가 첩보 아닌 모략을 업(業)으로 삼았다... 고 멋대로 상상하는 것은,「읽을거리(語り物)」의 창작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지, 사적 사례(史的事例)로 이를 증명해서는 안 된다. 무네노리의 정보망의 존재는,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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