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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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방공호 (0) 2015/06/25 PM 07:10
지구는 멸망했다.

마야문명의 예언에 따라 지구는 2012년에 멸망한다는 지구멸망설이 유행했던 올해였고, 이를 주제로 한 영화도 나왔었지만, 진짜로2012년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구멸망의 이유는 영화에서처럼 자연재해도, 외계인의 침략도 아니었다. 그냥 인간들끼리의 핵전쟁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렇다 해도 살아남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북한의 핵폭탄이 발사되기 전, 이 지역의 선택받은 100명의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방공호에 몸을 피신할 수 있었다. 생존자들은 비밀 승강기를 타고 방공호가 있는 지하로 몸을 피신했다. 승강기에 탄 100명의 사람들은 등에 가방을 짊어지고 숫자가 적힌 번호표를 목에 걸고 있었다. 내 가방 안에 손전등과 식량 등 생존물품이 들어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목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한번에 100명을 태운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승강기 안은 밝은 전등들 때문에 무척 밝았는데, 밖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과, 친구, 연인들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워하는 생존자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몇 명은 아직도 눈물, 콧물을 훌쩍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이 울음이 혹시나 전염될까봐, 혹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주위의 사람들이 그들을 위로했다.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어느 여자가 호흡곤란을 일으키자 하얀 가운을 입고 우리를 통솔하던 사람들 중 한명이 산소호흡기로 그녀의 호흡을 안정시켰다. 승강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지하방공호라 해서, 토굴 같은 방공호를 연상했던 것과는 달리, 방공호 내부는 깨끗한 병원 같은 느낌이었다. 정면에는 영화관 스크린만큼 큰 화면과 단상이 있었고, 가운데에는 의자 수백 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예상외의 광경에 놀라서 우왕좌왕하고 떠들고 있을 때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단상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KR013 지하 방공호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일단 모두 질서를 지키시면서 앞에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어수선하게 웅성웅성 소리를 내면서 남자가 말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의자 수는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남는 의자가 많았다. 나는 가장 뒤쪽의 의자에 혼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단상위의 남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방공호의 주민 여러분, 저는 이 방공호의 총 책임자인 김진윤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자신을 소개하자 기계적으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여러분이 계신 방공호는 원래 최대 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식량을 준비하지 못한 관계로 안타깝게 여러분 백 명만을 이곳에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10년이란 긴 시간동안 제한된 구역에서 제한된 식량을 가지고 생존하는 건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방공호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할 것입니다.”

책임자는 양 옆에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시켜주었다. 의료팀, 기술팀, 식량팀, 이 외에도 이름만 듣고는 무슨 일을 하지는 알 수 없는 팀들이 있었다. 책임자의 말이 길어지면서 더욱 격정적인 말투로 변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며, 인류를 지속시켜야만 하는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느새 그의 연설에 몰입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까까지 있었던, 슬픔과 불안감이 사라지고, 굳건한 표정으로 책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꺄아악!”

갑자기 들린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책임자의 연설을 중단시켰다. 시선을 소리 나는 곳으로 돌리니, 아까 승강기 안에서 호흡기로 안정을 한 여자가 발작 하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손톱으로 할퀴고 있었다.

“이 여자가 왜 이래!”

“아줌마 저리 좀 가요! 누가 좀 도와줘요!”

순식간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의료팀이 현장에 달려와 발작을 하는 여자를 붙잡아 주사를 놔 진정시켰고, 여자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그 자리에서 치료를 받았다. 단상 위의 총책임자는 헛기침으로 주의를 다시 향하게 하고 말했다.

“방금 여러분이 보신 것과 같이, 방공호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10년 동안 살아가는 건,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이 방공호는 설계되었고, 시스템까지 갖춰 놓았습니다.”

책임자는 한번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이곳에서 제일 처음 하게 될 일정은 사회성 구축입니다. 사회성 구축이란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이 다섯 명씩 한 조를 만들어 같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스템은 여러분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확립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스템으로,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이 해야 될 여러분한테는 꼭 필요한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인다고 확신이 되면, 개인 방을 사용 할 수 있게끔 허가 할 것이니 불편하시더라도 당분간은 협조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조는 여러분이 목에 걸고 계신 번호표 순으로 편성하게 될 것이며, 1번부터 5번까지가 1조, 6번부터 10번까지 2조 이런식으로 20조로 편성하겠습니다. 여러분 쪽에서 왼쪽에 있는 문으로 나가시면 긴 복도와 함께 문 위에 각 조가 적혀진 방이 있습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 천천히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임자의 말이 끝나자 생존자들이 움직였다. 그 중에는 자신이 몇조인지 알기 위해서 손가락을 꼽으며 수를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번호는 5번이었기 때문에 바로 사람을 사이를 해치고 나아가 복도로 나갔다. 원래 천명을 수용하려고 한 만큼 복도의 길이는 매우 길었다. 복도는 ㄷ자 모양으로 방금 우리가 있었던 커다란 홀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들어갈 1조는 복도의 가장 끝 쪽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다섯 개가 나를 맞이했다. 방은 다섯 명이 같이 사용해도 넉넉한 크기였다. 게다가 화장실과, 세면장도 붙어 있었고, 배치된 다섯 개의 침대에는 모두 수납장이 붙어있었다. 나는 가장 안쪽 벽에 붙어있는 침대에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짐을 정리하고 있자, 문이 열리며 남, 여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둘 다 중년의 나이였는데, 남자는 등에 큰 가방을, 여자는 어깨에 작은 가방을 가지고 같이 이 방에 들어온 것을 보아 부부로 보였다. 두 사람은 나한테 눈인사를 한 다음 나란히 있는 침대를 차지하고 짐을 풀었다. 두 사람에 이어서 연달아 나머지 사람들도 들어왔다. 둘 다 남자였는데, 한명은 등에는 가방을 손에는 천으로 싼 기다란 막대를 들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빈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짐 정리를 끝내자, 빈손으로 방으로 들어온 남자가 말했다.

“앞으로 좋던 싫던 10년 동안 보게 될 테니 자기소개를 하는 게 어때?”

남자의 말투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하고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부부로 보이는 사람 중 아내 쪽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좋네요. 그러면 누구부터 시작할까요?”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니까 처음은 나부터 하지, 내 직업은 오타쿠, 이름은.”

“으아아악!”

남자가 막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려는 순간 끔찍한 괴성이 방공호 안을 가득 채웠다.

“의사! 의사를 불러!”

“누가 이 여자 잡는 것 좀 도와 줘! 아아악! 내 손이!”

네 번째로 들어 온 남자는 문 밖에서 들려 온 괴성을 듣고 상황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에 가장 가까운 침대를 사용하고 있던 자신을 오타쿠라 소개한 남자가 그를 저지했다.

“무슨 짓이냐 비켜라!”

“아니, 잠깐 기다려 뭔가 심상치가 않아.”

“잠깐 밖의 상황을 확인할 뿐이다. 비켜!”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고 있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비키지 않겠다면, 힘으로 제압하겠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의 천을 풀었다. 천안에는 목검 한 자루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방안의 불이 꺼졌다. 나는 가방 안에서 미리 준비해 온 손전등을 꺼내 불빛을 비쳤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실랑이를 벌이던 남자 둘도,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전이 된 순간의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명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닫혀 있는 방문을 누가 있는 힘껏 두드리는 수리가 났다. 다행이 오타쿠와 목검 남자가 실랑이를 하면서 문을 잠갔기 때문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는 들리는 비명소리와 연신 문을 두드리는 소리, 손전등의 비친 사람들의 표정에서 문을 열어주어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의 갈등이 보였다. 결정을 내린 건 오타쿠였다.

“거기 목검 형씨! 그리고 아저씨! 침대를 이쪽으로 옮겨서 문을 막자! 일단은 사태가 진정이 될 때까지 여기 숨어 있는 게 최선이야.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손.”

“난 동의하네.”

“저도요. 지금은 여기서 상황을 보는 게 좋겠어요.”

부부의 손이 올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손전등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모였다.

“저도 그 편이 좋을 거 같아요.”

나까지 동의하자 목검 남자는 한숨을 쉬고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부부 중 남편도 따라 움직여 침대를 옮기는 목검 남자를 도왔다. 남자들 셋이 힘을 합쳐 침대로 문을 막고, 또 겹쳐 올려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문을 못 열게끔 만들었다. 침대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우리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뭐 하긴 하지만 자기소개를 마저 하는 게 어떨까요?”

부부 중 아내가 말을 꺼냈다. 그녀의 말 대로 아직까지 비명소리가 멈추지 않은 지금 태연히 자기소개를 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로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목검 남자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자기소개를 하는 거에는 동의하지만 이름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 아직 밖의 상황을 확실히 모르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떤 사고로 인해 살인이 일어난 거라면 눈앞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극단적일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는 방공호다. 좋던 싫던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이곳에서 10년을 버텨야 하는데, 그 동안 죽은 망자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며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검도 형씨 말이 일리가 있네, 그럼 이름은 소개하지 말고, 직업이나 방공호 밖에서 하던 일만 소개하는 게 어때? 그리고 나는 그냥 오타쿠라고 불러줘.”

오타쿠는 상황이 이런대도 전혀 침울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타쿠? 만화하고 게임에 환장한 사람을 말하는 그건가?”

“대충 그런 거지. 당신도 목검을 가지고 있는 거 보니 무기 오타쿠인거 아니야?”

“나는 수련 중인 검사다. 그러니 검사라고 불러라.”

오타쿠와 검사 두 사람이 소개를 끝내자 뒤를 이어 부부가 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수의사입니다. 밖에서는 동물병원을 했었지요. 이 쪽은 제 아내. 그러니까.”

의사가 아내를 뭐라고 소개할지 곤란해 하자 아내가 나서서 말했다.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 줘요 총각, 아가씨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궁리하면서 억지로 입을 땠다.

“저는……. 특별히 하는 일은 없고요 그러니까…….”

도무지 나를 소개할 만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에겐 수의사 아저씨처럼 직업이 있는 것도, 그의 아내처럼, 누군가와 관계가 있는 것도, 검사와 오타쿠처럼 자신을 지칭할 단어도 없었다. 내가 말을 하지 못하자 아줌마가 나를 거들어 주었다.

“학생이구나!”

“과연, 학생이라면 특별히 내세워서 소개할 것도 없겠지. 뭐든지 보통, 평범함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가장 큰 부작용이야. 안타깝지만, 너는 그냥 학생이라고 불려야 될 것 같다.”

오타쿠는 듣는 사람을 정신없게 만드는 빠른 말투로 말했다. 가만히 우리들의 소개를 보고 있던 검사가 말했다.

“쉿! 조용히.”

검사가 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내자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모두가 입을 닫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단 한 차례 폭풍은 지나간 것 같다.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냐”

“책임자 분들이 구해 줄 때 까지 기다리는 건 어떤가요?”

아줌마가 말했다. 그러나 오타쿠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책임자가 있다면. 일단 이 불부터 켜 줬겠죠. 그쪽에서 움직이길 기다리는 것 보다는 이쪽에서 움직이는 게 뭘 하든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 말엔 나도 찬성 하지만 밖의 상황을 몰라서야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이번에 의견을 말한 건 수의사였다. 그 말을 들은 오타쿠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대충 1분 정도가 지나자 오타쿠가 손을 때고 말했다.

“아까 들린 비명 소리로 추리를 해 보면, 밖에서는 살인이 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아니 이건 확실해. 그렇다면 누가? 왜? 살인을 저지른 것이고, 비명소리가 장시간 동안 멈추지 않았을까?”

“누가, 왜 살인을 저지른 건 모르겠지만, 비명소리가 장시간 멈추지 않았던 건, 한 사람이 저지른 사고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다발적으로 사고를 일으켜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맞아, 아줌마. 아주 좋은 발언이었어. 그렇다면 남은 부분을 생각해 보자,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사건을 일으킨 걸까?”

수의사가 입을 열었다.

“바이러스에 의한 정신착란이 아닐까 생각하네, 그 있지 않은가? 승강기에서 호흡기로 치료를 받았던 여자 말일세. 나중에는 발작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공격했고 말이야.”

“빙고! 좋은 착안점이야. 난 말이지. 이게 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좀비 바이러스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숙주가 아저씨가 말한 그 여자고, 감염자들이 여자에게 공격당한 사람. 사건을 일으킨 건 그 사람들이 발병해서 이성을 잃고 사람을 공격한 탓일 거야.”

잠자코 수의사와 오타쿠의 말을 듣고 있던 검사가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리가 있군. 만약 의료진이 데려간 숙주가 책임자와 그쪽 스텝들을 공격했다면 이곳이 장전이 된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지.”

나는 오타쿠가 사람들을 단결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거에 놀랐다. 첫인상은 경박스럽고 생각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의외로 냉철하고 상황판단이 빨랐다. 그리고 이 상황에 가장 빨리 적응했다. 오타쿠는 내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 거렸다.

“이 방공호는 3층으로 되어 있어. 1층은 우리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2층은 식량고, 3층은 방공호의 책임자와 스텝들이 머물면서, 이곳을 관리하는 설비가 있는 곳. 어차피 지상으로 나갈 수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으니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적어도 2층으로 내려가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만약 할 수 있다면 3층으로 내려가 이곳의 통제권을 손에 넣으면 감염자들에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책임자가 한 말 중에서는 지하 2층의 식량은 조별로 식량을 가져와서 배식을 한다 했었지. 즉 2층은 우리들도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열어났을 거다.”

“그렇게 쉬운 이야기는 아니야 검사 형씨. 조별로 당번을 한다고 했잖아 해당 조에게만 2층 식량고 열쇠를 줄 생각일 수도 있지. 그리고 2층 식량고 문이 열려 있다고 가정해도 가는 길을 모르잖아.”

“길이야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 탄 승강기를 이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검사 형씨. 지금 정전이거든?”

검사는 오타쿠에게 뒤통수를 한번 얻어맞은 표정을 한 뒤 다시 침묵을 지켰다.

“오타쿠, 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수의사 아저씨가 오타쿠에게 의견을 물어봤을 때. 나는 어느새 오타쿠가 우리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타쿠는 대답할 내용을 미리 머리로 정리를 했는지 막힘없이 말했다.

“이 복도는 ㄷ자 형태야. 그리고 우리는 이 복도의 끝인 1호실에 있지. 이 복도를 따라 반대쪽에 가면 분명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을 거야.”

“복도 끝이라. 마지막 20조에 편성된 사람들은 벌써 지하 2층으로 내려가 있을 수도 있겠군 그래.”

“이곳에서 복도 끝까지 가는 루트는 두 개야. 하나는 복도를 따라 돌아가는 것, 나머지는 우리가 처음 왔었던 광장을 돌파해서 직진으로 가는 것.”

“불이 켜 있었으면 돌파하는 쪽을 선택했겠지만, 이런 어둠 속이면 나라도 동시에 여러 명을 제압하는 건 무리다.”

아줌마가 말했다.

“그러면 결론은 돌아가야겠네요. 복도라면 앞뒤에서 오는 적들만 신경 쓰면 되고, 위험하다 싶으면 근처에 있는 방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면 될 테니까요.”

“아줌마, 이번에도 좋은 지적이었어. 밖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2층 식량고로 갈 생각이야. 댁들은 어떻게 할래.”

“나도 가겠다.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 보다는 내 힘으로 살 길을 찾는 게 적성에 맞으니까.”

“우리도 가겠네. 위험 하다는 건 알지만, 자네들과 함께라면 무사히 2층 식량고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수의사는 아줌마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나 혼자 이곳에 남아있기 싫었기 때문에 나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만만의 준비를 하고 나가자. 이번에도 검사 형씨하고 수의사 아저씨가 좀 도와 줘야겠어.”

오타쿠는 두 사람과 힘을 합쳐 침대를 분리했다. 침대는 여러 개의 파이프를 연결해 만든 조립식 침대였는데, 분리를 하자 파이프가 좋은 무기가 됐다. 남자들이 무기를 준비하는 동안, 아줌마와 나는 필요한 도구를 정리했다. 일단 내 가방 안에 있는 옷가지와, 로션 같은 잡품을 모두 버리고, 아줌마가 가져온 구급약과 내가 가지고 있던 물과 초코바를 우선으로 챙겼다.

“가방은 아줌마가 메도록 해요, 그리고 이 파이프도 받고.”

오타쿠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침대에서 분리한 긴 파이프를 나눠주었다. 단 검사는 파이프 대신 목검을 들었다. 빈손으로 멀뚱히 서 있는 나에게 오타쿠는 방 안을 비추고 있던 손전등을 들어 나에게 줬다.

“학생, 너는 검사 형씨하고 함께 가장 앞에 서도록 해. 길을 비추는 역할과 만약 감염자가 습격해 오면 검사 형씨가 공격할 수 있게 감염자를 놓치지 않고 비추는 역할을 하는 거야.”

“학생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오타쿠는 수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을 이어서 했다.

“가운데에는 가방을 멘 아줌마가, 그리고 가장 뒤에서는 나하고, 수의사 아저씨가 파이프를 들고 후방을 경계할거야. 아줌마는 싸움이 일어나면 주위의 경계해 주고.”



오타쿠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각자 자기가 할 일을 확인시켰다. 준비가 끝나고 문을 막았던 침대를 치웠다. 가장 앞에선 검사는 내 긴장된 얼굴을 보고 손으로 어개를 가볍게 두드려 줬다.

“겁먹지 마라. 감염자든 뭐든 상대가 사람이라면 이 목검으로 일격에 제압할 수 있다.”

검사는 목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문손잡이를 돌렸다. 나는 혹시나 놀라서 손전등을 떨어뜨릴 일이 생길까봐 힘을 주어 손전등을 단단히 잡았다. 일단 나는 오타쿠가 시킨 대로, 뒤쪽을 먼저 비춰 확인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복도에 끝이기 때문에, 처음만 뒤를 체크하고 진행방향을 확실히 체크하면, 습격당할 가능성은 매우 적을 거라고 했다. 손전등을 비춘 뒤 쪽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손전등을 앞 쪽으로 향했다. 손전등의 불빛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눈 앞 2~3M의 거리만 겨우 보였다. 복도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복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학생, 저쪽 벽을 좀 비춰 봐.”

나는 검사의 말대로 손전등을 벽 쪽에 비췄다. 벽에는 빨간 손자국과 손바닥 크기의 선이 이어져 있었다. 손전등으로 손을 따라가자 그 곳엔 어떤 남자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핏자국이 이어진 모양과 거리로 추측해 보면 아까 우리 방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렸던 사람인 것 같았다.

“우욱!”

나는 태어나 처음 보는 시체를 보고, 손전등을 돌렸다. 하지만 검사는 손전등을 잡은 내 손을 잡고 시체를 비췄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갑자기 손전등을 돌리지 마라. 모두가 위험해 질 수도 있으니까.”

시체에 다가가자, 비릿한 냄새가 확하고 풍겼다. 나는 당장이라도 손전등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오타쿠가 후방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수의사가 시체를 살폈다.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경동맥 절단으로 인한 과다출혈일세. 이건 아주 죽일 작정을 하고 물어뜯은 게 확실하네.”

수의사가 진단을 내리자 바로 오타쿠와 자리를 교체했다. 오타쿠는 죽은 남자의 주머니를 뒤졌다.

“나이스, 담배하고 라이터 발견.”

오타쿠는 지갑도 찾았지만, 열어보지 않고, 죽은 남자의 배 위에 올려놨다.

“형씨, 당신 물건은 우리가 고맙게 생각하고 가져갈게. 그러니까 괜히 저주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오타쿠는 다시 원래 진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이동했다. 복도는 군데군데 핏자국이 있었지만, 시체는 처음에 봤던 남자의 것 밖에 보지 못했다. 괴물처럼 변한 감염자들이 어둠속에 숨어 우리를 습격할 거라고 예상 했던 게 빗나간 셈이었다. 내 바로 뒤에 붙어 걷고 있던 아줌마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금방 반대쪽 복도로 갈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요?”

“우리가 무기까지 준비하고 난리 법석을 친 것 치고는 아주 순조롭군. 오히려 긴장이 풀어질까봐 걱정이 될 정도다.”

“아줌마, 형씨 그렇게 생각하면 큰 코 다칠 걸. 감염자든 아니든 여기에는 1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다고, 복도에 사람이 없다는 건, 사고 직후 죽은 사람들만 빼놓고 방으로 도망쳤다는 거야 즉 우리가 지나친 방 안에 상처를 입고 감염이 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언제 앞뒤로 협공 당할지 모르니까 긴장 풀지 마.”

“생긴 것과는 달리 잔소리가 많은 녀석이군.”

나는 두 사람이 뭐라 떠들던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손전등 불빛에 집중했다. 만약 한눈이라도 팔았다간 감염자가 순식간에 덮칠지도 모를 두려움 때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잠깐만요.”

바짝 온몸을 긴장시키고 걷던 중에 내 귀에 뭔가 자그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였다.

“누가 우는 소리가 들려요. 아직 감염이 안 된 사람일지도 몰라요.”

“소리?”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소리는 9호실에서 나고 있었다.

“이 안에서 들리는 것 같군.”

“어린애 울음소리 같은데 아직 감염이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네.”

“좋아, 그러면 이 안으로 진입한다. 혹시 감염자 일지도 모르니까 준비 확실히 해.”

“그럴 경우에는 나한테 맡겨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숨통을 끊어버릴 테니까.”

검사는 목검을 양손으로 잡고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사가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내자 나는 9호실의 문을 잡아당기고, 손전등으로 안을 비췄다. 안에는 초등학생 정도 나이의 소녀가 우리한테서 등을 돌리고 훌쩍이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아이고 가여워라 난리 통에 부모를 잃어버렸나 보네. 애야 이제 괜찮으니까 아줌마한테 오렴.”

아줌마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아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오타쿠는 아이를 달래려는 아줌마의 팔을 붙잡아 이를 저지했다.

“잠깐만 아줌마. 혹시 모르니까 나하고 검사가 먼저 확인을 해볼게. 학생 불빛 흔들리지 않게 확실히 비춰.”

나는 손전등의 불빛을 훌쩍이는 소녀 등에 비췄다. 검사와 오타쿠는 무기로 만전의 태세를 갖추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애야 잠깐 이쪽을 좀 봐 볼래?”

오타쿠가 말하자 소녀는 울음을 그치고 이쪽을 쳐다봤다.

“꺄아아아아악!”

소녀의 얼굴은 끔찍하게 변해있었다. 두 눈은 흰자의만 들어낸 체 뒤집혔고, 얼굴에는 흉측한 검은 반점이 나 있었다. 소녀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비명소리가 너무 공포스러웠던 탓에 감염자의 얼굴을 보고 비명이 나오려던 게 멈춰질 정도였다.

“핫!”

검사는 순간적으로 감염자를 향해 목검을 내려쳤다. 목검은 감염자의 머리를 향했고, 목검에 맞은 감염자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검사는 목검에 흐르는 피를 허공에 휘둘러 털어내고 말했다.

“이거 장난이 아니군.

“뭐야 검사 형씨. 겨우 이런 꼬마한테 겁먹은 건 아니겠지.”

“농담이 아니다. 어떤 바이러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긴 건 공포영화에서나 본 게 전부란 말이다.”

“주온에 나오는 귀신도 감염자에 비교하면 멀쩡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니 말다했지. 여기선 감염자가 어린 아이였다는 사실에 감사하자고.”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누군가 문을 미친 듯이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 문을 잠가서 열리지 않았지만, 문을 때리는 기세는 점점 더 강해졌다.

쾅! 쾅! 쾅! 쾅! 쾅!

여기 있는 모두가 지금 문을 막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빨리 진형을 맞춰 섰다.

“상대가 어떻게 생긴 괴물이란 걸 안 이상. 두려워 할 건 없다. 일격에 한명씩 보낼 테니까 불빛이 흔들리지만 않게 해라!”

“네!”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지금은 생존하고 싶다는 생각보단 만약 감염이 되면 저들과 같은 모습을 해야 된다는 사실이 제일 무서웠다.

콰광!

문이 부서지고 감염자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양손으로 손전등을 잡아 문 쪽을 비췄다. 끔찍하게 생긴 감염자가 괴성을 지르면서 우리들을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검사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일격필살의 검법으로 감염자의 목과 머리에 있는 급소를 정확히 공격했다. 목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목검이 감염자들한테 적중할 때 나는 둔탁할 소리가 날 때마다. 감염자들은 피를 흘리며 한명씩 쓰러졌다. 검사가 목검을 다섯 번 휘두르자 우리를 습격했던 감염자 다섯이 모두 쓰러졌다. 검사는 눈앞의 모든 감염자가 죽은 걸 확인하고 심호흡을 했다.

“굉장하군. 자네! 말하는 거나 행동을 봐서 보통 사람은 아닌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숙련된 검사에게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수의사! 뒤에!”

뒤를 돌아보자 수의사의 바로 뒤에 아까 검사가 해치웠던 소녀 감염자가 피를 흘리며 수의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수의는 손에 든 파이프를 풀 스윙으로 휘둘러 감염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깡!-

복도가 파이프가 울리는 소리가 퍼졌다. 수의사의 파이프에 얻어맞은 소녀 감염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움직이지 않았다.

“여보! 괜찮아요?”

“괜찮아. 검사씨 덕분에 살았네.”

“인사는 됐다. 다음부턴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우리는 가방에 든 물을 마시면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감염자들의 시체 사이에서 하는 휴식이었지만, 누구도 그걸 가지로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타쿠는 우리는 쉬는 동안 천과 파이프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었다.

“오타쿠, 자네 아까부터 뭘 만드는 건가?”

오타쿠는 수의사에게 자기가 만든 걸 보여 주었다. 오타쿠가 만든 건 파이프에 천을 감아 만든 횃불이었다.

“별다른 도구도 없이 급조한 거지만, 복도 끝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야. 나도 만화책을 읽은 게 이렇게 도움이 뒬 줄은 몰랐네.”

“오타쿠 자네, 혹시 밖에 있을 때 뭔가 대단한 일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자네의 냉정한 상황판단과 리더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텐데 말이야.”

수위사의 칭찬에 오타쿠는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오타쿠가 뭔가 말을 하는 걸 기다렸지만 오타쿠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아까 얻은 라이터로 횃불에 불을 붙이고, 횃불을 잡은 손에는 파이프의 열이 전달되는 걸 막기 위해 모포를 잘라서 감았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지하 2층을 향해 움직였다. 오타쿠가 만든 횃불 덕분에 처음보다는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한두 차례 감염자들과 싸울 걸 예상했지만 의외로 감염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처참한 몰골의 시체들을 몇 구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은 길지 않았다. 조심해서 계단을 내려가자 단단한 철문이 우리 앞을 막았다. 철문 위에는 식량고라고 써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방심하기엔 아직 일러, 이 안에 감염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럴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기는 수밖에는 없다는 걸 명심해.”

“만약 그렇다면 비상등이라도 켜져 있기를 바라야겠군. 복도와는 달리 넓은 공간에서는 이 진형이 효력을 못 볼 테니까 말이다.”

“검사 형씨 말이 맞아.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하기 싫지만, 이번에는 하늘에 운명을 맡기자고.”

나는 식량고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나는 힘을 줘서 열려고 했지만 식량고는 열리지 않았다.

“잠긴 건가. 아주 최악의 상황의 상황이군.”

“먼저 이곳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안에서 잠갔을 가능성도 있어. 검사 형씨 내가 문을 두들길 테니까 후방을 부탁해.”

“알겠다.”

오타쿠는 횃불을 수의사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보소! 안에 우리들은 감염자를 피해 여기까지 내려온 사람입니다. 여기에 감염된 사람은 없으니 안에 사람이 있다면 문을 열어줘요.”

오타쿠가 소리치자 굳건히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드디어 살았구나 라는 안도감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철컥하고 안에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드디어 식량고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우리를 맞이해 준 사람은

.

.

.

감염자의 얼굴이었다.

가장 빠르게 대응한 건 오타쿠였다. 오타쿠는 파이프로 감염자의 머리를 후려쳐 뒤로 넘어뜨렸고, 검사가 앞으로 달려와 문을 연 감염자의 숨통을 끊었다. 나는 손전등으로 식량고의 안을 비췄다. 안에는 10명 아니 15명은 되어 보이는 감염자들이 어둠속에 숨어 있었다.

“아줌마! 문 닫아!”

나는 이 위기만 버텨내면 모두가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온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우리는 감염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감염자부터 빛을 비춰 공격을 성공시키게 했다. 우리에겐 검사가 있었기 때문에 치열했던 싸움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싸움이 끝나고 우리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무기로 사용한 파이프는 피가 잔뜩 묻은 채 찌그러져 있었고, 검사의 목검도 피에 완전히 물들어 갈색이 아니라 진한 붉은색으로 보였다. 우리는 모두가 상처하나 없이 무사히 이 고비를 넘긴 걸 확인하고 드디어 안도했다. 수의사 부부는 서로 껴안고 기쁨의 포옹을 했고. 오타쿠와 검사는 멋지게 하이파이브를 짝 소리 나게 했다. 우리의 흥분이 충분히 가라앉았을 때 오타쿠가 말했다.

“감염자들의 시체는 식량고 밖으로 운반하는 게 좋겠어. 썩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군. 기뻐하는 것도 좋지만 이거부터 끝내지.”

남자들이 감염자들의 시체를 옮기는 동안 아줌마와 나는 이곳에 있는 식량상태를 확인하기로 했다. 식량은 대부분 통조림과 건조식량이었는데, 나는 그중에 페트병에 담긴 생수가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식량고 안을 한참 조사하고 있을 때 아줌마가 말했다.

“학생,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여기 있는 식량. 아무리 봐도 100명이 10년 동안 먹을 식량치고는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아줌마의 말을 듣고 식량고를 다시 보니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책임자가 우리들 100명만 방공호에 보호한 이유는 식량이100명분 밖에 준비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식량고의 식량들은 식량고 선반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1000명분의 식량 같은데……”

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식량고의 바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색 벽이었다.

“여긴?”

“일어나셨군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다음으로 보인 건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였다. 오늘 방공호에 왔을 때 의료팀의 스텝이라고 소개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하고 있는 산소 호흡기를 제거한 다음 상반신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여기는 3층 스텝룸 이에요. 식량고에 도착하신 여러분들을 수면가스로 재운다음 이곳으로 옮겨 드렸죠. 다른 분들도 곧 있으면 깨어나실 거예요.”

주위를 둘러보니, 오타쿠, 검사, 아줌마, 수의사도 침대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우리들이 정신을 차리는 사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방에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책임자인 김진윤도 있었다. 책임자는 얼굴에 연신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

책임자의 축하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성대한 박수가 시작됐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우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뭘 축하한다는 거야 책임자 양반.”

역시나 먼저 질문을 한 건 오타쿠였다.

“테스트에 통과하신 여러분들을 축하한다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은 정식으로 방공호의 입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테스트?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책임자는 오타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방 안에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에는 오타쿠와 책임자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문답을 주고받고 있었다.

-테스트에 참가하시면 강력한 최면을 사용해서 방공호에 들어오기 이전의 기억을 조작할 겁니다. 대단한 걸 조작하는 건 아니고, 테스트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지금이 지구멸망 상황이라고 믿게 끔만 할 겁니다.-

-당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말이야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은데 2012년 12월 30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게 사실이 확실한 거야?-

-네,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모든 나라들은 인류가 조금이라도 생존할 가능성을 높이게 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실시한 겁니다. 이 지역 방공호에 수용할 수 인원은 천명입니다. 그리고 이 천 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테스트이기 때문에, 이게 겁나시면 지금 테스트를 거부 하셔도 좋습니다. 단 이곳에서의 기억은 제거되며, 아무것도 모른 체로 2012년 12월 30일 지구멸망에 날을 맞이하시게 되겠지요.-

-좋아, 테스트에 참가하겠어.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한 번이라도 이런 만화 같은 상황 속에서 살고 싶으니까.-

-좋은 결정입니다.-

오타쿠의 모습이 나오던 녹화 영상이 끝나고 검사, 수의사, 아줌마의 녹화영상이 차례로 나왔다. 각자 하는 질문은 달랐지만, 책임자의 대답은 비슷했다. 마지막으로 내 모습이 녹화된 영상이 나왔다.

-안 할래요-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는데요?-

-어떤 실험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저는 못할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취미도,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었고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백수가 됐어요 전 남들 다 하는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못해서 짤렸던 사람이에요.-

-이 실험에 그런 건 상관없어요. 오히려 당신이라면 이 실험을 통과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생존에만 집중하는 거 이게 포인트거든요.-

-정말 제가 이 실험에서 쓸모가 있을까요?-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영상을 본 우리들은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상의 내용대로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내용들은 테스트의 과정이었고, 스스로 이 테스트를 받는 걸 승낙했다는 거니까.

“믿을 수가 없군. 최면을 이용해서 기억을 지웠다니.”

검사가 말했다. 책임자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검사의 말에 대답했다.

“그걸 증명할 방법은 간단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면을 풀어드리면 되니까요. 하나, 둘, 셋!”

책임자가 박수를 강하게 치는 순간, 머릿속의 한 부분이 딸깍하고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잃어버리고 있던 기억들이 돌아왔다. 책임자의 말은 진짜였다. 기억이 돌아온 수의사와 아줌마는 침대에서 내려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검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방공호에서 지구멸망을 피할 수 있다는 좋은 일이지만, 크게 감흥이 느껴지진 않았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내 건너편 침대에 있는 오타쿠도 마찬가지로 아직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 테스트에 나온 감염자들은 도대체 뭐지? 그쪽에서 바이러스를 주입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건가?”

“아! 그거요 실은 그 질문이 마지막 테스트입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충격에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이 있는가 이게 핵심이거든요.”

책임자는 리모컨을 조작해 다른 영상을 재생시켰다. CCTV 영상이었는데, 오늘 1호실에 있었던 우리들을 촬영한 영상이었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들이 했던 일을 다시 보는 게 테스트인가?”

“계속 보시면 압니다.”

영상은 2배속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정전이 되고, 내가 손전등을 켜고, 침대로 문을 막고, 그리고 나중에는 복도로 나가 시체에게서 담배와, 라이터를 얻은 다음. 소녀 감염자가 있었던 곳에 들어가는 거까지 영상으로 보니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보는 것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 저게 뭐야?”

흉측한 얼굴의 소녀 감염자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엉엉 울고 있는 평범한 소녀가 있었다. 적외선 CCTV라 녹색으로 보였지만 절대 감염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영상에는 검사가 목검으로 소녀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모두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누가 봐도, 소녀를 구하러 온 사람들을 검사는 목검으로 급소를 노려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겨우 치명상을 피한 소녀가 수의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가오는 걸 수의사가 파이프로 끝장을 내는 장면이 나왔다.

“이게 무슨 더러운 장난이야!”

보다 못한 검사를 소리를 질렀다. 책임자는 영상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여러분의 방에 있는 환풍기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기체를 투입했습니다. 이 기체의 효과는 한 장소에 있는 사람들끼리 공통의 환각을 체험한다는 것이죠. 여러분에게는 그게 좀비로 보인 것이고요. 물론 다른 방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은 정상이지만 다른 방의 사람들은 괴물로 보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난동을 부렸던 여자는 뭐지?”

“승강기에 있을 때 호흡기로 그 기체를 먼저 주입시켰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효과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한 연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식량고에 있던 감염자들은?”

“출구 쪽에 있던 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여러분들을 식량고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보호할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여러분들은 가스에 중독된 상태에서 말이지요.”

“아니야! 그 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믿을 거 같아! 거짓말! 내가 죽인 건 감염자라고!”

“내가, 사람을 그것도 어린 소녀를 죽이다니…….”

이성을 잃은 검사가 날뛰자 방공호의 스텝들이 강제로 진정제를 투여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수의사는 날뛰진 않았지만, 입에서 선혈을 흘렸다. 혀를 깨물고 자살을 기도한 거였다. 옆에선 아줌마가 오열을 하며 난리를 쳤고, 수의사도 침대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에 남은 건 나와 오타쿠, 그리고 책임자뿐이었다.

“당신들은 괜찮나요? 아무리 테스트라 해도 사람을 죽였는데요.”

오타쿠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었던 이죽거리던 표정을 없애고 말했다.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거든. 세상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감염자가 나타나고 게임처럼 행동하는 걸로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었을 때부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방공호 측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어차피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목숨을 걸고 테스트에 응한 거잖아. 그렇다면 우리들 손에 죽었다고 해서 뭐라 원망하지는 않을 거야.”

오타쿠의 말을 들은 책임자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요?”

나는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떠올렸다. 정전이 되고, 사람이 죽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필사의 폭력을 휘둘렀던 우리들을. 하지만 난 그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저 손전등 하나를 들고 여기저기를 비췄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한 적도 없었고, 그냥 이리저리 끌려 당하면서 시키는 대로 한 거뿐이었다. 나는 어렵게 대답할 말을 찾아서 말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소장은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환히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제가 생각했던 대로군요.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는 법이지요.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생존해야 될 세상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고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사는 당신이나, 민정씨처럼 무리에 섞여서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사람들에 의해 지탱될 지도 몰라요. 어쨌든 방공호에서의 생존을 축하드립니다.”

책임자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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