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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마약에 타락한 맑스주의 게릴라,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0) 2009/09/25 PM 02:31

전통적으로 콜롬비아는 대단히 불평등한 나라였습니다. 전 국민의 3%에 불과한 백인 상류층이 각종 커피 및 농산물, 석유, 광산 사업을 지배하며 90%의 국부를 향유하는 동안, 나머지 97%의 주로 흑인들이나 원주민, 메스티소인으로 이루어진 소작농과 도시 빈민, 노동자 등은 끝없는 빈곤 속에서 허우덕거리다가 힘든 생을 마감하곤 했지요.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고 세습되는 불평등에 빈민들은 서서히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수도 보고타에서는 2,000명이 사망하는 대폭동이 일어났었고, 이후 약 10년간 군사독재 정부, 좌파 게릴라, 지방 대농장주들의 사병, 그리고 산적떼들이 콜롬비아의 산골 마을 속에서 잔인한 유혈극을 벌입니다. 이런 무정부상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콜롬비아 정부군이 1950년대 말부터 지방의 게릴라들과 산적들을 진압한 후에야 평정됩니다.

하지만 외면상의 평화 아래 새로운 증오의 씨앗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1964년에는 '콜롬비아의 빈민을 위해', 그리고 '남미에서의 미국의 간섭에 대항'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맑스주의 반군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de Colombia)이 결성되었습니다. 애초에 이들의 세력은 미약했고, 당국은 단순히 콜롬비아의 남동부 산맥과 아마존 정글지대에서 준동하는 산적 정도로 취급하곤 했죠.

1970년대 말부터 콜롬비아는 마약의 세계적 원산지로 떠오르고, 미국과 유럽으로 코카인을 밀매하는 마약상들은 떼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FARC의 지도부는 이를 전력 강화를 위한 기회로 삼고, 농촌의 마약상들로부터 비싼 '보호세'를 뜯거나 직접 마약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는 식으로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농촌에서의 도시 포위전략과 도시 내에서의 게릴라 투쟁을 병행하는 새로운 양면전략을 수립하고, 빈약했던 무장을 강화하게 되죠. 1980년대 무렵부터 콜롬비아는 마약상들의 폭력과 좌파 게릴라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고,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이용해 FARC는 농촌에서의 세력을 강화하게 됩니다. 특히 점령지역에서 가난한 소작농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대농장 지주들을 처형하고, 이들의 토지를 몰수해서 재분배하는 정책을 통해 민중의 신뢰를 얻게 되죠.

이들에 대처하는 역대 콜롬비아 정부의 태도는 종종 효과적이지 못했고 사태를 도리어 악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980년대에 FARC가 아직 미약하지만 세력을 확대하는 시기에 부패한 콜롬비아 정부는 게릴라들과의 협상을 시도하면서도 정작 이들의 주 수입원인 마약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꺼렸고(실제로 당시 국회의원이나 공무원, 경찰 등에서 마약상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의 수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진도가 지지부진한 평화회담을 계속하면서도 전투는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콜롬비아 정부는 좌파 게릴라와의 전쟁에서 최대의 실책을 저지르는데, 다름아닌 약 42,000 km2의 '비무장지대'를 콜롬비아 남동부의 산 비센테 델 카구안 지역에 허락하고, 이 지역에 정부군과 경찰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보금자리를 반군에게 마련한 것입니다. 분명 콜롬비아 정부는 평화협상의 진전을 위해 FARC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한 것이었겠지만, FARC는 정부의 기대를 저버리며 평화협상에서는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우고, 이 지역을 요새화하고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주력합니다. 그 결과 콜롬비아 남동부의 정글뿐만 아니라 인접국인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파나마, 브라질과의 국경지대에까지 활동기지를 세우고 사실상 콜롬비아 농촌을 지배하게 되죠. 2001년의 FARC는 70개 '전선'에서 싸우는 무려 16,000여 명의 게릴라 전사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2005년에 이르면 안데스 산맥과 평원의 500,000 km2가(콜롬비아 전 영토의 약 43%) 사실상 FARC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특히 FARC는 정규군과 흡사한 편제를 갖추고, 상당한 군기와 철저하게 계획된 작전, 그리고 마약 수익으로 강화된 무장으로 콜롬비아 주요 도시를 포위하게 되죠.

마약과 게릴라와의 전쟁에서 지는 듯한 콜롬비아 정부였지만, 2002년 보수당의 알바로 우리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전세가 역전됩니다. 본인의 아버지가 게릴라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되는 비극을 겪은 우리베는 게릴라를 섬멸하기 위해 콜롬비아군과 경찰의 훈련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자국 내 정부와 군대, 경찰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나서고, 미국과의 군사공조를 강화하고 자국의 마약범들을 미국으로 강제송환하는 강수를 둡니다(당시 마약상 또는 게릴라들에게 매수당하거나 목숨을 위협받을 콜롬비아 경찰 및 사법부의 현실을 감안한 조치였죠). 미국 역시 자국으로의 마약 유입을 차단하고 남미 각국에게 안보 위협이 된 FARC라는 눈엣가시를 없애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에 막대한 군사원조금과 최신 중장비를 지원하고 특수부대원으로 구성된 군사 고문단을 보냅니다. 2001년 이후 테러와의 전쟁은 이를 더욱 수월하게 만들었죠. 불리해지는 전세에 당황한 FARC 지도부는 인질을 잡고 주요도시에 맹공세를 가하지만, 미국이라는 '물주'를 만난 콜롬비아군과 경찰의 공세가 갈수록 이들을 압도하게 됩니다. 게다가 오랜 전쟁에 지친 콜롬비아 국민의 민심도 더 이상 게릴라들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2007년의 대공세와 2008년 에콰도르 접경 지역에서의 공세를 통해 콜롬비아군은 FARC 지도부 주요 요인들을 대부분 죽이거나 체포하는 등 사실상 궤멸시킵니다. 특히 2008년 7월에는 과감한 구출 작전을 통해 8년 동안 FARC의 인질로 잡혀 있던 콜롬비아 국회의원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잉그리드 베탕쿠르를 구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사건은 이제 전세가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는지를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죠. 이제 콜롬비아군에게 자발적으로 투항하는 게릴라의 수 역시 증가하게 됩니다. 콜롬비아 정부는 2009년 현재 FARC의 전력을 2001년에 비해 1/3 정도 감소한 11,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FARC는 초기에는 사회정의 실현과 빈부격차 해소 등의 명분을 걸고 무장투쟁을 시작했고 이 덕분에 콜롬비아 빈민층과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갈수록 그들의 본래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민중의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코카인 재배와 마약 밀매를 통한 전쟁 수입, 주요 정부 관계자 및 인사들의 납치, 인질극, 점령 지역에서의 소년/소녀병 강제징집(FARC 총 병력의 30%가 미성년자), 민간인 사상자를 낳는 지뢰와 박격포 공격, 우파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의 고문과 살해 등,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잔혹행위라도 할 수 있다는 FARC의 극단적 투쟁은 이제 도리어 FARC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듯 합니다.

현재 FARC는 미국과 캐나다, 유럽연합 등에서는 '테러집단'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FARC의 입장을 여태껏 가장 충실하게 대변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 역시 FARC의 테러기법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특히 '혁명 1세대'인 카스트로는 "진정한 게릴라라면 인질을 잡거나 어린 아이들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는다"며 FARC가 억류하고 있는 모든 인질들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죠. 콜롬비아의 대문호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FARC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들의 전술이 나라 전체를 더욱 혼란스러운 무질서로 빠트리고 있다고 지적하며 비난받는 전술들을 즉각 중지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답니다. 결국 이상이 아무리 숭고하고 좋아도,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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