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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욕심, 그 무한함2011.01.26 PM 10:57
인간에게 가장 도드라지는 특질이 무엇인가를 물어본다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주저않고 '욕심-단어가 가진 의미의 혼동을 막기 위해 '욕망'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도록 하자-'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욕심 자체는 어떤 동물이든 가지고 있다. 우리집 멍멍이들인 '쿠마.'쿠로' 이 두 형제만 봐도 그렇다. 간식인 오리고기 육포를 3개 던져주면 하나씩 차지하고 나머지 하나를 독식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실제로 시험삼아 3개 줬다가 반나절동안 싸우는 걸 보다 못해 재분배의 과정을 거친 적이 있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욕심은 비단 인간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볼 수 있기에 이것 자체를 문제삼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몫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단순한 욕심을 넘어서, 눈앞에 보이는 숫자 이상의 것을 무한대로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도록 인간의 두뇌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이에게 얼마를 벌고 싶냐고 물으면 대부분 '아주 많~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추상적 사고를 나타내는 단편적인 예이다. 단순하게 정해진 몫을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한대로 갖고 싶어한다.
기초적인 경제 논리로 설명하자면 유한한 자원에 대한 무한한 소유욕이다. 당연히 인간의 역사는 무한한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개인과 개인의 경쟁을 불러 일으켰고, 모자란 힘을 보충하기 위해 집단을 만들면서 집단과 집단끼리도 경쟁을 하는 구도로 발전해왔다. 'The winner takes it all.' 승자 혹은 강자가 무한히 자신의 몫을 독식하게 되는 사회 구조는 끝없는 문제를 만들었고 그러한 무한경쟁의 폐해를 막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특출한 사람 혹은 집단이 몇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간은 칼 맠스다. 맠스는 잉여재화가 권력화되어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보았고, 스스로도 그런 비참한 삶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래서 맠스는 개인의 무한한 사리사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장치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것이 공산주의라는 사상으로 집대성되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욕심을 제도적으로 막아버리는 사상이었다. 당연히 이를 실제 사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했고 정치적 권력순위대로 부는 재분배되었다. 또한 욕심을 없애버리면 생산의욕 자체도 사라져버린다는 사상 자체가 가진 오류를 간과했으므로 결국 반쪽짜리 정치사상으로 현 시점에서는 거론할 가치가 매우 떨어진 전근대적 사고로 전락했다.
두 번째는 히틀러의 나치즘이 대표하는 파시즘이다. 파시즘 사상의 알파요 오메가인 히틀러는-파시즘 사상의 원류는 무솔리니이고 히틀러가 이를 본받아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에 끼친 영향력이나 그 사상의 실행을 통한 극단적 결과를 명확하게 보여준 것은 히틀러이므로 그를 중심으로 이해하자- 사리사욕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 인류가 모두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했으므로 히틀러는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말고 다른 인종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인종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을 막아야 인간의 몫이 무한해지므로 히틀러는 다른 인종을 모두 없애거나 동물화시키고 아리아인-특히 게르만족에 한해서만-의 생활권(Lebensraum)을 확보하여 아리아인만이 부강한 세계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당연히 자신들을 제외한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무리수가 통할 리 없기 때문에 파시즘은 비참하게 패배했으며, 개인의 사욕을 국가의 사욕으로 전환한 이 사상이 히틀러 사후에는 아예 파시즘의 당사자인 독일 국민들에게조차 인정받지도 못했다. 개인의 욕망은 국가와 같은 비실체적인 것에 투사되지 않기 때문이다.(매국노가 생기는 이유도 이에 의해서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형태의 생태주의가 있다. 생태주의 중에도 심층 생태주의가 주장하는 기본 이념인 생명적 관점에서 인간이나 자연적 존재가 평등하다는 생명 중심적 평등(biocentric equality) 자체는 옳은 생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다른 자연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종교적 발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르네상스 이후 인간인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이념을 가지고 시작한 생태주의지만 생태주의의 문제점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방법론이 너무나 실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몇몇 선지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을 제외한다면 인류는 인간 또한 자연현상에 의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생명을 잃던 원시시대로 돌아갈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실행 불가능하다. 욕망은 진보할 뿐 퇴보할 수가 없다. 생태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제어하는 수준이 아니라 과거로 회기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방법론에서 문제가 많다.
이렇듯 인간의 무한한 욕심을 제어하거나 제한적으로 인정하던지 혹은 욕망을 원천봉쇄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여러 차례 있어왔지만 현재 사회는 민주주의를 통해 적절히 과도한 부분을 통제하는 제한적인 방법만으로 욕심에 대한 자율적 통제를 권장하는 것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제는 민주주의-엄밀히 말하자면 민주공화제-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적 논리인 자본주의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민주공화제를 인류가 생각한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 자본주의는 경제 체계의 하나지만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와는 결합하면 안되는 사상이다. 어울릴 수 없는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놓으니 '신 자유주의'라는 기형아가 탄생해 타인에 비해 특별히 강한 자만 모든걸 독식하고 무한히 약자를 옭아매는 현상이 계속적으로 발생한다. 민주공화는 기본적으로 개인과 개인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더불어 어울리는 사회를 만들자는 사상이다. 한자 그대로 해석한 내용이 그러하다. 특정한 개인의 무한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어울릴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연유하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20세기 초반에 지적했듯 인간이 생산하는 재화는 과장을 약간 보태 표현하자면 전 인류를 충족시킬 정도로 생산되고 있지만, 지구가 여전히 불평등으로 가득차 있는 이유는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무한한 욕심에 있다. 인간의 무한한 욕심은 물리적으로 없앨 수 있는 개념이 아니므로 욕심을 제어하자는 주장은 어떻게 보면 공허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해소하고 싶어한 여러 사람들은 민주공화제라는 훌륭한 정치제도이자 사상을 만들어냈다. 민주공화제는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이 아니라 최선의 제도다. 개인과 개인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더불어 어울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 이상의 해결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욕심을 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자는 주장은 인간 전체를 신으로 만들자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정치ㆍ철학적 주장이 아닌 종교 이론에 불과하다.
민주공화의 이념을 개개인에게 확립시킬 수 있는 방안은 역시나 교육 뿐이다. 앞서 말한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방식들로는 인간의 무한한 사리사욕을 막을 길이 없다. 오히려 부추길 뿐이다. 교육의 효과는 급진적이지 않지만 길게 지속된다.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욱 균형있고 조화로운 사회가 교육을 통해 점진적으로 실현될 것을 나는 믿는다. 더불어 살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가면 인간은 서로를 더욱 사랑하는 아름다운 존재로 지구상에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동물들과도 조화롭게 어울릴 줄 아는 슬기로운 존재로 발전했면 좋겠다.
댓글 : 2 개
- 949N
- 2011/01/27 AM 08:54
인간에 무한한 욕망이 있더라도,
다만 일반인들에겐 그것을 추구하기에 수많은 견제가 있으니
그런 욕망들은 충분히 제어되고 제어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잘 구성되고 돌아간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마이너스로 돌아오는 부분에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예들이 근대에 들어 점점 발견되고 있으니...
다만 문제는 지금 시대에서 거대자본이란 것에는 충분한 견제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거대자본이 언론까지 지배하여
돈이 많은 자가 목소리도 큰 지금의 사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자본은 목소리가 커졌을 뿐 아니라
충분한 자금으로 좋은 인력을 뽑아 연구하여
선동하는 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보입니다.
노회하다 말할 정도로 느낍니다.
덕분에 거대자본은
견제없이 뒷일장래 생각지 않고 마구마구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보입니다.
그게 지금 시대에도 문제라 생각이 듭니다.
자본은 인간의 확장정도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자체가 생명과 의지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보이곤 합니다.
의지라고 말하기보다는 탐욕이 더 어울리겠군요
거대 자본이란 괴물을
어찌해야 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와 환경아래
적절히 견제되게 할 수 있을지는
이반님 말씀처럼 결국 개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교육외에는
사실 답이 없어보입니다.
다만 그런 개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교육을 시스템화하는 것 외에도 언론을 자본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 시민들의 삶을 자본의 극단적인 이익추구에서 보호하는 것 등 여러가지 장치가 필요하다 느낍니다. 사실 어느하나도 다 연결되어있어 동시에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만...
다만 일반인들에겐 그것을 추구하기에 수많은 견제가 있으니
그런 욕망들은 충분히 제어되고 제어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잘 구성되고 돌아간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마이너스로 돌아오는 부분에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예들이 근대에 들어 점점 발견되고 있으니...
다만 문제는 지금 시대에서 거대자본이란 것에는 충분한 견제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거대자본이 언론까지 지배하여
돈이 많은 자가 목소리도 큰 지금의 사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자본은 목소리가 커졌을 뿐 아니라
충분한 자금으로 좋은 인력을 뽑아 연구하여
선동하는 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보입니다.
노회하다 말할 정도로 느낍니다.
덕분에 거대자본은
견제없이 뒷일장래 생각지 않고 마구마구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보입니다.
그게 지금 시대에도 문제라 생각이 듭니다.
자본은 인간의 확장정도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자체가 생명과 의지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보이곤 합니다.
의지라고 말하기보다는 탐욕이 더 어울리겠군요
거대 자본이란 괴물을
어찌해야 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와 환경아래
적절히 견제되게 할 수 있을지는
이반님 말씀처럼 결국 개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교육외에는
사실 답이 없어보입니다.
다만 그런 개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교육을 시스템화하는 것 외에도 언론을 자본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 시민들의 삶을 자본의 극단적인 이익추구에서 보호하는 것 등 여러가지 장치가 필요하다 느낍니다. 사실 어느하나도 다 연결되어있어 동시에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만...
- 이반 데니소비치
- 2011/01/28 AM 01:46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을 제어하는 견제장치는 개인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법이나 양심 등에 의해 할 수 없이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욕망을 가진 자가 타인의 욕망을 실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거대자본과 부패언론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큰 욕망의 덩어리들입니다.
저는 저런 것들을 제어하는 것은 국가권력이나 군사적인 힘이 아닌 여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에 가장 큰 희망을 가지는 이유도 그렇게 때문이죠.
사회가 균형을 이루려면 갈 길이 참 멉니다......
그런 맥락에서 거대자본과 부패언론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큰 욕망의 덩어리들입니다.
저는 저런 것들을 제어하는 것은 국가권력이나 군사적인 힘이 아닌 여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에 가장 큰 희망을 가지는 이유도 그렇게 때문이죠.
사회가 균형을 이루려면 갈 길이 참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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