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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욕망의 한계, 양식2018.08.12 PM 09:55
욕망의 한계, 양식
위대한 평등은 옹졸한 자유를 앗아갔다. 모독의 자유, 강탈의 자유, 살육의 자유, 이외 모든 악덕의 자유는 평등의 등장으로 방종이
되어 사라졌다.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을 자유라 부르지 못하리니, 자유와 방종을 착각하지 말지어다.
0. 의의
이 글은 제 사상인 역할존중을 위해 준비된 생각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역할존중은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자’라는 주장이 담긴 사상이에요. 이 사상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본디 사람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순간부터 완전한
평등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답니다. 간단한 예로 보호자와 피보호자를 들어볼게요. 그 둘은 평등할 수가 없어요. 권리, 의무, 자격 등이 다른걸요. 그 외에도 수많은 사회적 역할에 따른 계급, 사라질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회적 ‘역할’을 분리할 필요성이 생겨났어요. 그렇게 분리하고 나서 계급을 사람이 아닌 역할에
속하게 만들어야 사람 자체는 계급에서 해방되겠지요. 그래야 인류는 비로소 진정한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봐요. 이렇게 평등해진 사회 속에서 특정한 사회적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 역할을 맡을 자격을
얻게 되고, 그 역할의 수행여부에 따라 인격적인 존중의 유무를
결정하고, 수행수준에 따른 기여도에 따라 금전적인 대우를 달리
하는 사상을 역할존중이라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에도 문제가 있어요. 위대한 평등은 옹졸한 자유를 앗아가 악덕의 자유들을
방종으로 만들어버렸죠.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로 욕하고 싶다거나, 질투로 빼앗고 싶다거나, 증오로 죽이고 싶다는 악덕을 부르는 감정의 충동을 억제해야 했어요. 그런데 이런 어두운 감정은 억제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곳을
찾게 되었지요. 상대적으로 낮은 대상을 공격한다거나, 조금이라도 나빠 보이면 공격하는 현상들이 나타났어요. 바로 악덕과 악덕을 향한 악행이죠. 이건 어느 시대나 공통된 사항이죠.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의 글과 댓글이에요.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방법이나 장소를 마련해주지
않고 그냥 억제만 하라고 하니 사라지지 않는 그 어두운 감정은 익명성의 방패 속에서 마음껏 소비하게 되었지요. 아무에게나 악플을 달거나 자기 기준으로 나쁘다고
여겨지는 상대에게 악플을 단다거나 말이죠. 이런 현상을 가리켜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낸 무차별적인 악덕난사라고 불러 볼게요.
이번 글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구상하게 되었어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통해 보편적인 행복이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1. 죄
우선 인간의 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무엇이 죄인지 명확하게 정리해놔야 앞으로의 전개가
가능해지니까요. 저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욕구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도요. 세상의 모든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순간
생기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게요. 대부분의 인간은 악덕을 부르는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즉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런데 그게 죄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없애려고 한다면, 그 인간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니게 돼요. 사이코패스가 선천적 공감능력결핍인 것처럼 어두운
감정이 없는 것 또한 감정결핍일 뿐이니까요. 망가지고 말 테죠. 불쌍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무엇이 죄가 되는지 명확하게 구분해야 돼요. 그리고 이 구분이야말로 이번 글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 죄가 생긴다는 전제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하게끔 유도해야 한다.’가 가능해지니까요.
기초를 마련했으니 그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인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2. 악덕
처음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미덕의 불운을 읽었을 때예요.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의 저서죠. 그러니 미덕의 불운을 이야기해볼게요. 아무래도 글 내용을 인용하게 될 예정이니 내용 누설이 있어요.
미덕의 불운은 18세기 프랑스에서 가난한 소녀가 미덕을 추구하여 겪게
되는 불운들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사드 후작이 왜 사디즘이 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던 작품이죠. 좀 변태적일 정도로 작품 내내 주인공을 괴롭혀요. 그 시대의 어린 고아소녀가 겪을 수 있는 불운이란 불운은 대부분 겪게 만들거든요. 그 주인공인 쥐스띤느는 미덕을 추구할 때마다 불운을 겪게 되는데 그 중 하나, 의문이 생기는 장면이 있었어요. 악덕을 향한 악행도 미덕이라 말하더군요.
[맹세를 어김도 미덕이니, 그것은 죄악을 벌할 때이니라.]
[야수처럼 죽어 가는 너를 끄집어내서 다시 살아가게 해주었던 이 덤불을 알아보겠지? 내가 너에게 베푼 후의를 나 스스로 후회하게 만들 일을 네가 저지를 경우, 너를 다시 비끄러매겠다고 했던 이 나무를 기억하겠지! 내 어머니를 해하려고 너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네가 나를 배신할 뜻을 가졌다면 왜 내 청을 수락했어? 네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의 자유를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미덕을 실천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죄악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하더라도, 무슨 이유로 더 추악한 쪽을 선택하게 되었느냐 말이야? 내가 너에게 요청하는 것을 거절했으면 그만이었어. 나를 배신할 의향이었다면 아예 수락하지 말아야 했어.]
그럼 이 사건까지의 줄거리를 이야기해볼게요.
작중의 주인공인 쥐스띤느는 14살의 어린 고아임에도 미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고결한
소녀예요. 그런데 쥐스띤느가 사는 곳은 미덕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성실하게 일을 하며 꼿꼿하게 미덕을 추구했지만, 그 미덕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의 거짓된 절도신고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는 부당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죠. 그 소녀는 매우 비참했어요. 그런데 마침 수많은 죄를 짓고 정당하게 사형선고를
받는 한 여인의 도움으로 탈옥 하게 되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미덕은 불운을 불렀지만, 죄악은 행운을 부르게 되었죠. 쥐스띤느의 불행한 사연을 듣게 된 그 여인은 탈옥 후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아가씨가 직접 보았듯이, 아무 성공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미덕의 실천을 내동댕이치라는 것이에요 어울리지 않는 미덕이 아가씨를 단두대로 인도한 반면, 끔찍한 범행이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어요. … 중략 … 아가씨는 젊고 아듬다우니, 원한다면 브뤅셀로 함께 가서 내가 책임지고 아가씨의
행운을 찾아주겠어요.]
그럼에도 이 고결한 소녀는 달콤한 죄악의 제안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지으면 하늘의 벌을 받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태도를 보고 여인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헤어지려고 했지만, 여인의 패거리들은 쥐스띤느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탈옥 후 마신 술은 한줌도 채 남지 않았던 그들의
도덕심을 녹여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에요. 쥐스띤느를 덮쳐 성욕을 충족하기로 패거리들끼리 합의를 한 그들은 덮치는 순서를 정하기 위해 서로 싸우게 돼요. 그들이 싸우는 틈을 타서 쥐스띤느는 도망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도망치다가 어떤 한 남자에게 구원받게 되는데, 그 시점이 [야수처럼 죽어 가는 너를 끄집어내서 다시 살아가게
해주었던 이 덤불을 알아보겠지?] 예요.
수많은 불운 끝에 구원을 받았으나, 이 남자도 정상이 아니었어요. 이 남자의 이름은 브레삭이라고 하는데, 쾌락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미친놈이죠. 그러다가 끝내는 패륜까지 저질렀어요. 그리고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기도 해요. 정말 미친놈이죠.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스띤느를 구원해준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뒤 먹고 살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했어요. 거기다 패륜을 도와주면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돈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거기다 패륜을 돕지 않겠다고 말하면 다양한 지원을 끊었을 뿐이라고 해요.
이런 상황 속에서 쥐스띤느는 미덕을 위해 패륜을
돕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배신했어요. 주인마님에게 달려가 패륜에 대한 것을 모든걸 고백했죠. 주인마님은 분노에 가득 차서 브레삭의 자유를 억압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교활하고 사악한 브레삭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어요. 기어코 패륜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 미친놈. 그리고 나서 배신당한 분노에 가득 찬 채로 쥐스띤느를 몰아붙이죠. 그게 위에서 인용한 긴 문장이에요. [네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의 자유를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미덕을 실천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미친놈의 말이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어요. 과연 죄악을 벌할 때엔 죄악도 미덕이 될 수 있을까요?
흥미로운 사색을 가져다 주는 생각이었습니다.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나왔지만, 과연 이런 생각이 올바른지에 대해 고민을 좀 하게
되었네요. 그에 대해 써볼게요. 뭐, 간단한 이야기예요. 죄악은 죄악이고 미덕은 미덕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배신은 죄악이 맞아요. 단지 그것이 정당하냐, 부당하냐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건을 예로 들자면, 쥐스띤느의 행동은 미덕이 아닌 정당한 죄악이라고 봐요. 죄는 죄죠. 그걸 잊고 미덕인 양 생각하게 되면 자신의 미덕에
취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울지도 몰라요. 이걸 가리켜 자신의 선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말과 비슷하겠네요.
그렇다면 왜 쥐스띤느는 그것을 미덕이라 여겼을까요? 그건 미덕의 보상이나 죄악의 심판이 전부 하늘의
뜻이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앞뒤사정 고려도 하지 않고 미덕을 추구했던 것이겠지요. 쥐스띤느는 미덕을 추구했기 때문에 불운을 겪은 것 같지만, 이 사건에서는 미덕 때문이 아니에요. 그녀의 실수는 미덕과 죄악의 정의, 그리고 미덕의 보상이나 죄악의 심판은 하늘이 아닌
사람이 정하는 것임을 몰랐던 거예요. 사람이 정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자신의 미덕을 위해 좀 더 똑똑하게 처신했어야 했겠지요. 물론 뭐, 그 시대에서 14살의 고아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겠지만요.
이런 상황은 현대에서도 볼 수 있어요. 악덕을 향해 저지르는 악행은 미덕이 아니에요. 정당할 뿐이에요. 예를 들어 범죄자를 대할 때 미덕은 무엇이고 악덕은
무엇일까요? 미덕은 관련기관에 신고하여 사회적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고, 악덕은 개인판단으로 처벌을 하는 것이겠지요. 단지 정당방위면 정당한 악행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정당한 악행은 다양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죠. 쉽게 알 수 있는 정당한 악행은 내부고발이라고 생각해요. 내부고발은 비리를 저지른 사람을 배신할 확률이 매우
높지요. 그렇지만 그건 더 큰 집단인 사회에 이익이 되는
행위에요. 매우 정당한 악행이죠. 하지만 미덕은 아니에요. 미덕은 아니기 때문에 비리를 저지른 악당에게 보복
당할 확률이 매우 높아요. 실제로 내부고발자들은 대체로 불운한 인생을 살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미덕이 아니라 정당한 악행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그런 사람들을 사회가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부의 비리를 고발한 정의로운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밖에 없어요.
여기까지 악덕(죄악)을 향한 악행에 대해 알아봤어요. 제 생각으로는 악덕을 향한 악행은 결코 미덕이라 부를 수는 없어요. 정당하냐, 부당하냐 로 구분될 뿐이지요.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규모와 관계가 없어요. 작은 규모로 예를 들자면, 아이들 장난이라도 못된 짓에 못된 짓으로 대응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에요. 상황에 따라 정당할 뿐이죠. 큰 규모로 예를 들자면, 전쟁에서 침략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미덕은 아니에요. 단지 정당한 것이죠. 미덕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은 승자든 패자든 심각한 PTSD를 겪을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전쟁은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해요. 그러니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돼요. 그것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기초 선이라 여기는
제게 있어 매우 커다란 죄예요.
3. 정당
악덕을 향한 악행은 미덕이 아닌 정당한 악행임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무엇이 정당한 걸까요? 그리고 어디까지 정당한 걸까요? 이걸 알아야 사람들이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때에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이것에 대해 많이 고민해봤어요. 그런데도 잘 모르겠네요. 기본적으로는 악덕을 향했을 때 정당한 악행이 돼요. 그런데 악덕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무엇이
정당한지 의문이 생기게 돼요. 왜, 세상에는 명예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리고 어디까지 정당한지도 의문이 생기죠. 욕 한번 들었다고 때려죽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그대로 돌려주는 것 또한 매번 정당한 것은 아니에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이 정당한지를 명확하기 구분
짓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제 나름대로 정한 기준을 이야기해볼게요.
세계화가 됨에 따라 각 나라의 질서를 최고선이라
부르기 어렵죠. 반드시 선이라는 보장은 없거든요. 그래서 모든 종의 기초 선인 종의 생존과 번영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잡아 그걸 기본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 각 나라의 질서를 기준으로 잡아야겠지요. 이런 기준의 토대가 마련된 상황 속에서 상대가 명백한 공공의 적일 때엔 악덕을 향한 악행이
대부분 정당해진다고 봐요. 세가지 집어볼게요.
첫째, 인류의 적, 침략국
정당하기 때문에 현대의 침략국은 전 인류의 적이
되어 말살되겠죠.
둘째, 나라의 적, 비리 등.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여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비리는
내부 고발로 배신당해도 싸요.
셋째, 개인의 적, 정당방위.
개인의 폭력에 살아남기 위해 자기방어수단으로 반격하는
것을 가리켜 정당방위라고 하죠. 이걸 얼핏 보면 개인의 적일 때 정당해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폭력을 써서 종의 생존과 번영에 해를 끼친
쪽이 공공의 적이 되겠지요. 그런데 정당방위가 법을 기준으로 하면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기는 해요.
그 외에도 인류의 갈등을 초래하는 잘못된 사상은
욕먹어도 싸다고 생각해요.
이제 어느 정도는 기준이 잡혔을 거라 생각해요. 공공의 적을 대상으로 할 때엔 대체로 정당하죠. 그리고 악덕의 수준에 맞게 악행을 저질러도 대체로
정당해져요. 물론 그 수준 이상은 부당해질 가능성은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긴 할거예요. 그런데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이 이외에는 정당하기 어렵다는 거에요. 그러니 누군가를 욕하고 싶다면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도록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스포츠를 예로 들자면, 선수들이 부진 하다고 욕하는 건 정당한 게 아니에요. 그들은 공공의 적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것은 부당해요. 논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무작정 비난을 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약점이 되게 되어있어요.
어느 정도 기준은 잡혔어요.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악덕을 향한 악행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였죠.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줄 때 생겨나요. 그리고 악덕을 향한 악행은 공공의 적일 때 주로
정당해져요. 이걸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소비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4. 소비
감정과 욕구를 소비하는데 쓰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있다고 봐요. 악덕을 부르는 감정과 욕구를 소비할 때엔 양식으로 소비하고, 악덕을 향한 악행일 때엔 공공의 적을 상대로 소비해야 정당하겠지요. 우선 양식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양식 [물고기나 해조, 버섯 따위를 인공적으로 길러서 번식하게 함.]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양식이란 단어를 쓰도록
할게요.
사실 이미 어느 정도는 다들 양식으로 감정이나 욕망을
소비하고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예술이죠. 사람이 만든 인공물에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끔 했어요. 그건 밝은 감정뿐만 아니라 어두운 감정도 마찬가지예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첫째, 조롱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다, 조롱하고 싶다, 그런 감정과 욕구는 사실 본성에 가까워요. 그것이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되니까 악덕이라 부르며
참게 만드는 거죠. 그건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게 희극이라고 생각해요. 광대들은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서 사람들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둘째, 성욕
발정기가 따로 없는 인간에게 이런 성욕은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악덕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이런 본능을 나쁘다고 해서는 안돼요. 제어할 수 없는 게 나쁜 거죠. 이런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외설이라고 생각해요. 외설제작자들은 사람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셋째, 폭력
폭력은 서로를 상하게 만들어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되죠. 그래서 악덕이라 불러요. 하지만 이것조차 원래 나쁘다고 해서는 안돼요. 제어를 못할 때 나쁜 거죠. 이런 어두운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에는
격투 스포츠 또는 게임 등이 있다고 생각해요.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어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이처럼 사실 우리 인간은 이미 감정과 욕구를 양식으로
소비하고 있어요. 인공적인 것을 통해 감정이나 욕구를 제어하는 거죠.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모든 감정과 욕구는 무조건 막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통해 소비할 수 있게끔 해야 돼요. 앞서 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인공물에
대해서는 뭐든지 가능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하는 것을 광범위하게 확대하는 거죠.
사실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파헤쳐보면 장난 아니에요. 나이나 지위 관계없이 대부분 더러운 욕망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걸 표출하면 죄가 되니까 참는 것뿐이죠. 그렇지만 이런 더러운 욕망 또한 충족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스스로를 갉아먹게 될 수밖에 없어요. 어쩌겠어요. 그게 본성인데.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욕망도 충족할 수 있게끔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흔히 사람들의 이상성욕을 보고 불쾌해 할 수 있지만, 그걸 양식으로 해결한다고 하면 오히려 권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욕망 또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죄가 되지 않으니까요. 대놓고 말해서, 실존인물이 아닌 대상으로 욕망을 배출하여 충족하겠다고 하면 서로 이해를 하는 쪽이 인류를 위해 이롭다고 생각해요. 물론 공공연하게 드러낼 때엔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해야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즐길 때엔 내버려 둬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과연 인간의 욕망은 양식만으로 충족이 가능한
걸까요? 흔히 이런 양식으로 더러운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보고 불안에 떠는 것은 그런 모습이 현실로 이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에요.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던 아이가 폭력적이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것과 같다고 봐야겠지요. 보통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기 마련이기 때문에 가상과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시키기만 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족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어쩔 수 없으니까 대리 만족하면서 참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현재로서는 양식만으로 충족은 안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미래에는 조금 달라질 거라 생각해요. 현실과 매우 유사하게 지낼 수 있는 가상현실기술이
발달하고 있으니까요. 만약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어려워지는 시점에 도달한다면 그때에 비로소 양식만으로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끔 된다고 봐요.
그럼 이제는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요즘은 보통 인터넷에서 욕설을 쓰는 것도 제재를
받기 때문에 쉽사리 하기가 어렵지요. 악덕은 배제 당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악덕을 향한 악행은 어느 정도 정당화되고 있는 현실이에요. 나쁜 놈을 상대로 욕하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거죠. 그런데 그 나쁜 놈이라는 기준이 상당히 애매하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공공의 적이죠. 공공의 적을 대상으로 할 때엔 비난을 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범을 비난하는 건 정당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할게요. 정리가 더 필요하네요. 현실의 문제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 예민해서요.
5. 행복
행복이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제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것이 밝든 어둡든 소비해야 행복해지는 거겠죠. 그런데 평등해진만큼 어두운 감정은, 정확히 어둡다고 사람들에게 평가 받는 감정은 악덕을
부르기 때문에 소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자위만 해도 더러운 것이라며 타박하던 때도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죠)
그러니까 양식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소비해야
평등을 유지하면서 행복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좀! 실존인물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사람들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끔 나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막 무조건 막기만 한다면!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언젠가 한계에 다다라 폭발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즐기게끔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어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정당한지를 분명하게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감정과 욕망을 소비하여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겠지요.
일단 여기까지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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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부족하네요. 그래도 일단은 여기까지 정리할게요. 언젠가 다시 한번 더 써보고 싶어요. 인간의 욕망을 양식으로 충족하자는 것은 감정이나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반드시 필요한 논의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가짜뉴스, 선동뉴스들이 많이 보이고 있긴 하지만, 괜찮은 언론인도 있는 걸 보면 매우 기쁘네요. 아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가르치는 것이 교사라면,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가르치는 것은 언론이겠죠. 명예로운 일이니까 부디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으면
좋겠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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