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권력의 이기심이 비추는 어둠2020.12.14 PM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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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이기심이 비추는 어둠

 

 

 

「이타적인 착한 한국인」 옛날옛적에 한국이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한국사람들은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타주의가 착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본인의 이익만 따지는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이타주의자는 착한 사람이 되고 이기주의자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착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파렴치한 이기주의자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하고 싶은 걸 할 때마다 선량한 이타주의자들은 따끔한 일침을 날렸습니다. 「왜 너는 너의 이익만 따지는 거야?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해야지!」 일침을 당한 사람이 본인의 이익을 내려놓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이타주의자는 그제서야 잘했다고 방긋 웃으며 칭찬을 했습니다. 「정말 착하네. 참 잘했어요.」 칭찬을 받은 이기주의자는 입가를 움직이며 웃습니다. 모두가 웃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짝짝짝. 이기적인 사람은 아직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두더지잡기의 두더지처럼 돌출되어 사람들의 눈에 띄면 이타주의자는 정의의 망치를 들고 그 사람을 두들깁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다니! 이런 이기적인 사람! 너는 잘못하고 있는 거야!」 이타주의자는 돌출된 이기적인 인간을 마구 두들겨 이타적으로 만들고 나서야 만족하며 웃습니다. 불편함이 사라졌는지 속 시원한 표정입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던 이기적인 사람은 바닥에 내려앉아 입가를 움직이며 웃습니다. 모두가 웃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그렇게 정의가 구현되었습니다. 짝짝짝. 한국인들이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모두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자 어떤 특정한 이익에 몰려 같은 이익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올바름이 되었습니다. 그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정의의 망치로 두들겨 같은 이익을 공유하게 했습니다. 이윽고 너도 나도 다 똑같은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착한 한국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 . . …… 막이 내려가다 멈춘다. - 막이 다시 올라간다. 만들어진 웃는 얼굴 그림이 사라지고 초췌한 현실 속 인간이 퀭한 눈으로 의지를 잃어버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착한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행동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졌다. 「어째서? 어째서야? 최선을 다해 착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는데 어째서 불행해지는 거야?」 진영갈등이 심해졌다. 집단 이기주의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집단 괴롭힘이 사라지질 않았다. 선동에 취약해졌다. 사이비종교가 인간을 세뇌시켰다. 의존도가 높은 사람이 늘어났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게 되었다. 겸손함을 강요당했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법을 모르게 되었다. 증오와 혐오가 멈추질 않고 불행의 연쇄가 끊어지질 않았다. 한국인들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면 행동할수록 사회문제는 심각해졌다. 한국사회에 짙은 어둠이 깔리게 되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이타주의자들은 꼭두각시처럼 누군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그건 잘했어요!」 우르르 몰려가서 다 같이 칭찬한다. 「그건 못했어요!」 우르르 몰려가서 다 같이 욕을 퍼붓는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유의지가 상실되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가엾어라.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게 된 가엾은 사람들.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타적인 착한 한국인」이란 동화는 희극이 아니었다. 도덕에 의해 자유의지를 상실해버린 가엾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이기주의자가 그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약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는 문제될 거 없지 않아?」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하겠다. 첫째, 한국에 이기주의자가 많은가? 아니다. 대다수는 이타주의자들이다. 본인의 이익만을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타인이 정해둔 어떤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걸 어찌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진짜 이기주의자라면 타인이 어떤 이익을 제시해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찌했는가? 누군가 괜찮은 것이 있다고 말하면 생각하지도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하지 않았나? 유행에 휩쓸려서 개업하고 유행이 끝난 뒤 폐업하는 수많은 자영업을 떠올려보라. 유행을 만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진정 이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유행을 만든 본사는 가맹점 계약으로 떼 돈을 벌고 가맹점주는 유행이 끝나면 쪽박을 찼다. 이 얼마나 이타적인가? 한국은 이타적인 사회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 정해둔 암묵적인 고정관념에 얽매인다. 10대는 이래야 해. 20대는 이래야 해. 30대는 이래야 해. 40대는 이래야 해. 50대는 이래야 해.」 서로 이타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떤 공통된 이익이 결정되면 그걸 위해서 살았다. 한국인은 평생 눈치를 보며 타인이 정해둔 삶을 산다. 취미도 개인사정에 따라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너희는 놀이공원에 가. 너희는 노래방에 가. 너희는 골프장에 가. 너희는 낚시터에 가.」 그러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공격한다. 「너는 왜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거야? 이상해.」 감정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이건 기쁜 거니까 웃어야 해. 이건 슬픈 거니까 울어야 해. 이건 예쁜 거니까 좋아해야 해. 이건 나쁜 거니까 화내야 해.」 다 같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너는 왜 혼자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남들은 웃고 있는데 왜 웃지 않아? 남들은 울고 있는데 왜 울지 않아? 이상해.」 인간관계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넌 얘하고 어울려. 넌 쟤하고 어울리지 않아.」 그런 기준에 맞지 않은 관계를 가지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나이차이가 많잖아. 미의 수준이 다르잖아. 노는 수준이 다르잖아. 버는 수준이 다르잖아. 이상해.」 장래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예체능은 없고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렴. 예체능을 잘한다고? 좋아한다고? 그걸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공부를 해. 그래야 성공해. 그게 맞는 거야.」 행복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이게 행복한 거야. 저게 행복한 거야. 이래야 행복한 거야. 저래야 행복한 거야.」 한국인들은 본인의 의지로 본인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의지로 타인을 위해 산다.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서글플 정도로 이타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부자들을 비난하는 걸 보고 똑같이 가난해야 하냐며 화를 낸다.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부자가 가난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이타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도 남을 위해 살라고!」 그래서 부자들이 자신을 위해 사치하면 비난 받는 것이다. 착각하면 안 된다.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그런 현대사상은 아직 한국사회에 스며질지 못했다. 대다수 한국인의 생각과 행동은 과거의 도덕에 근거한다. 둘째, 약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는 문제가 없는가? 아니다. 약자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불공정한 사회를 불러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만들었다. 여성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역차별 논란을 불러 이성혐오를 부추기게 되었다. 아동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불합리한 교통법이 생겨 아이들이 그 법을 악용하게 되었다. 소수자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풍기문란을 저질렀다. 외국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표현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자유롭지 못하고 차별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 자유를 바라는 사람들이 불안을 떨게 되었다. 약하게 태어난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치안이나 소방 등의 직업에 역할에 맞는 능력이 아닌 성별 같은 타고난 것으로 평가하고 구인해 제 역할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 사회질서가 흔들리게 되었다. 맹목적인 이타주의는 대상이 무엇이든 잘못되었다. 빌어먹을 이타주의는 옳다는 이유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꺾고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었다. 이타주의는 올바름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의지를 앗아가는 괴물이었다. 이런 것은 지배국가에서나 어울린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모두가 서로의 이기심을 평가해 올바른 것을 선정하여 그걸 자유의지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올바름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타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첫째는 올바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것이 잘못된 결과를 낳을 거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올바른 행동을 했는데 왜 나쁜 결과가 나와? 그럴 리가 없지!」 그런 안이한 생각 때문에 인지할 수 없었다. 둘째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설명할 것은 굉장히 중요하니까 꼭 기억하길 바란다. 「대부분의 인간은 주변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농담이 아니다. 자아성찰을 하지 않는 한 그렇게 되어버린다.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모든 정보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행동원리를 결정한다.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했던 어떤 생각과 행동이 반드시 자신의 의지라는 보장이 없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주장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가령 이런 것이다. 누군가에게 「너는 A를 해야 해!」라고 교육받은 뒤 잊는다. 나중에 A를 무의식 중에 떠올려서 하고 싶어지게 된다. 그러면 마치 그것이 교육과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A를 하고 싶어하는 건 나의 본심이야!A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A가 잘못되었다고 비판 받으면 마치 자신이 비판 받는 것처럼 느껴지고 만다. 그래서 A가 잘못되었어도 바꾸기가 어렵다. 관습, 관행, 도덕 따위가 한번 주입되면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그것이 잘못되었어도 바꾸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어떤 것이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본질적인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올바름과 무의식 때문이었다. 요즘 불편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이것저것 불편함을 나타내며 불만을 표한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위의 예시처럼 네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탓에 마음속 불편함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의 무의식은 너의 것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향이 크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걸 스스로 고찰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의지가 된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나는 식사를 하던 도중 먹고 있는 육류가 갑자기 맛이 없어지고 불쾌해짐을 느꼈다. 고기가 역겨워졌다. 토악질의 충동을 느꼈다.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이걸 왜 불쾌해할까? 나의 무의식은 왜 불쾌감을 느꼈을까?」 나의 내면을 돌아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번 고기가 되는 동물들의 참상과 환경오염에 관한 영상을 접한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내가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그랬던 거구나.」그리고 의식적으로 종의 본능, 생존 따위를 떠올리며 별 문제없음을 인지한 뒤 불쾌감을 감수하고 육류를 섭취했다. 그러자 다시 맛이 돌아왔다. 불쾌감도 사라졌다. 그 뒤도 별 문제없이 육류를 섭취하고 있다. 무의식이 시키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나의 의지로 고기를 먹는 것을 결정했다. 나는 이런 것이 자유의지라고 생각한다. 상당히 인상 깊은 경험이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만약 그 순간 고찰하지 않았더라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고기를 먹지 못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육식을 하든 채식을 하든 내 자유의지가 결정할 문제다. 타인이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본인의 육체를 지배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이런 사례들이 얼마나 있을까?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의지로 불편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환경에 지배 받는 걸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사람들이 무의식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깨닫고 환경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무의식에 간섭을 받지 않고 현상의 본질을 파악해 자유의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낡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낡은 것들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것을 의심하지 않고 무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연하를 차별하는 장유유서가 꼰대라는 원인을 만들어 가족애결핍과 세대혐오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성을 멀리하는 남녀유별과 정조관념이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금지라는 원인을 만들어 이성애결핍과 이성혐오라는 결과를 낳았다. 음주에 강한 사람이 우대받는 음주문화가 음주운전이라는 원인을 만들어 음주운전사고라는 결과를 낳았다. 맹목적인 이타주의 강요가 집단이익우선이라는 원인을 만들어 집단 이기주의라는 결과를 낳았다. 교육 받은 대로 결과가 나온다. 교육 받은 대로 하자 불행해졌다.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를 그렇게 강요해놓고 왜 출산율이 낮느냐고 불평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쓴웃음을 나온다. 올바름과 무의식이 배운 걸 평생가게 한다. 그런데 그런 걸 몰라도 학생 때 공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걸 보면 학생 때 배운 게 평생 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알면서도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는 평생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된다. 정말 희극이자 비극이다. 대부분 평생 갔으니까 출산율이 줄어들고 이성혐오가 늘어난 것이다. 꼰대나 낮은 출산율이나 이성혐오나 음주운전 따위가 나타났던 것은 한국인들이 그저 배운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올바른 것을 위해 사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단지 착하다는 기준이 문제였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가르친 대로 행한 것뿐이니 사회문제를 보고 이들을 너무 나무라지 말길 바란다. 그건 이제부터 바꿔야 하는 문제다. 바꾸는 걸 거부하는 이들을 나무라길 바란다.

 

 

 

본격적으로 이타주의가 부르는 현상들에 대해 알아보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정치는 진영갈등을 부르는 진영논리가 심각하다. 지지하는 정당이 잘하건 잘못하건 지지한다. 심지어 자신의 신념과 다른 행동을 해도 지지한다.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당과 관계없이 그 가치를 중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떠했던가? 지지하는 정당의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음에도 지지는 변하지 않았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당과 관계없이 그 가치를 중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떠했던가? 지지하는 정당에서 폐단의혹으로 논란이 발생해도 지지는 변하지 않았다. 지극히 이타적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보다 정당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만약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에 맞춰서 세상을 바라봤을 것이다. 반공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공산당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정당에 관계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폐단을 일으키는 사람은 정당과 관계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런 자신의 이익보다는 그걸 주장했던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접고 정당을 지지했던 것이다. 어떤 정당이 싫어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일이 있다. 여당이 싫어서 야당을 지지할 수도 있고 야당이 싫어서 여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만약 정책을 보고 지지했다면 다수의 정당이 지지를 받았겠지. 그러지 않고 양당체제가 된 것은 상대정당을 보기 싫어서 이길 수 있는 정당에 투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싫어서 지지했음에도 어째서 맹목적으로 변해버리겠는가?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한번 지지를 결정한 정당에 소속감을 느끼고 그 정당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던 것이다. 나는 자유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독재자를 미화하거나 옹호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을 신의 종으로 삼으려는 종교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공산당을 용납할 수 없다. 국가, 자본, 종교, 도덕 등 인간을 지배하려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기준으로 정당의 행태를 평가하고 지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일방적인 여성특혜나 성 문화검열이라는 남성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여성 혼자서 책임질 확률이 높은 낙태죄라는 여성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장유유서라는 연하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유전자에 영향이 적음에도 인간의 사랑을 죄로 만든 4촌 결혼 금지에 반대할 것이다. 이교도를 처단하자는 종교를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받아드리는 자국민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다문화는 정말 맹목적인 이타주의가 만든 황당한 정책이다. 지배하겠다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차별하겠다는 인간에게 평등을 주다니. 자유국가가 혼란스러운 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지배와 차별을 하겠다는 인간들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천적에게 잡아먹으라고 몸을 대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사상차별주의자다. 그리고 너희들도 사상차별주의자다. 전제주의사상을 차별하지 않나? 인종차별사상을 차별하지 않나? 이건 당연한 거다. 그릇된 사상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한다. 인종차별 말고 사상차별을 하면 된다. 따라서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인정하는 단일문화와 다인종 국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혈통, 인종, 피부색 아무래도 좋다.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면 된다. 그 외 나는 인간을 지배하는 자유롭지 못한 것에 반대할 것이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내가 바라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익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각자 이기적으로 행동할수록 정치가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유의지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어야 맹목적인 지지가 사라질 것이다. 정치가들에게 선동 당하는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단지 착했을 뿐이다.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인간이 있다는 걸 안다. 대중의 어리석은 행위에 실망하며 그런 취급에 은연중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이타주의적 교육에 영향을 받아 남의 말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것은 강제로 세뇌 당해 어리석은 짓을 한 피해자를 비웃는 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일이다. 대부분 가해자며 피해자인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앞으로 모두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올바른 이기주의를 강조해야 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은 집단 이기주의가 강하다. 온갖 비리, 폐단, 악습 등의 것들은 집단 이기주의가 영향을 끼친다. 같은 집단 내에 비리가 발생하면 동참하거나 감싸고 덮으려고 한다. 폐단이 있어도 모른 채 한다. 잘못된 관행도 관행을 만든 선배의 체면을 고려해서 방치한다. 지역의 집단 이기주의자들은 「우리가 남이냐?」라고 말하며 문제가 생겨도 모른 척 해달라고 한다. 왜 그랬겠는가? 자신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집단 구성원들이 이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 이기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지역갈등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지역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갈등에 자신의 일처럼 감정이입하며 싸웠던 것이다. 이타주의가 집단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 배타적이 되어 집단 외부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속이 강한 시골에서 외지인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 기업, 부동산 등도 마찬가지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보다 더 배타적이다. 노사갈등은 서로의 이익을 위하는 이타주의가 더 심한 갈등을 부추겼던 것이다. 마음을 얼게 만드는 비리와 폐단과 잘못된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지역이기주의로 인한 지역갈등도 사라지지 않고 각 계층의 집단이기주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는 이타주의 때문이었다. 만약 이기적이었다면 어땠을까? 비리가 알아차렸을 때 비리를 일으킨 사람의 이익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고발해버렸을 것이다. 폐단을 무시하지 않고 없애버렸을 것이다. 관행을 만든 선배의 체면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우리가 남이냐?」라는 말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행했을 것이다. 집단이 그릇된 이기주의를 주장할 때 집단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집단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배타적이지 않게 되어 외부와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하는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이기주의자들이 공격을 받는다. 집단 구성원 중에 이기적인 이들이 집단 내부의 비리를 고발하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며 이타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는다. 그 집단에 추방되거나 속하더라도 소외를 당했다. 이타주의자들에게 있어 내부고발자들은 집단의 이익을 해친 이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은 이타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야 이런 올바른 일을 자유의지로 이기적으로 행하는 이들이 우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이용자라면 보통 친목질의 폐단을 안다. 친목질은 집단을 배타적으로 만들어 새로운 사람의 유입을 멈추게 한다. 그 친목질이 바로 이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와 비슷하다. 본인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친목을 다지면 결속이 생기게 되고 결속이 생기면 집단에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은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고 집단 외부에 배타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집단에 속해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집단이 쓰는 은어나 손짓이나 그림을 사용한다. 특정 커뮤니티에서만 사용되는 은어를 쓰는 것이 바로 소속감이다. 대표적으로 외계어나 야민정음이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굳이 사투리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에 속해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종교의 이익을 위하는 이타적인 종교인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종교 교리를 말하며 소속감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이들은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타적이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배타적이게 되어 집단 외부와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인지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집단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어 집단을 위해서라는 말에 선동 당하지 않고 집단 외부에 배타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관철하길 바라겠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은 집단 괴롭힘이 많다. 따돌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주도로 어떤 학생들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왜 그런 걸까? 올바름과 무의식을 떠올려보자. 집단 괴롭힘도 어떤 올바름을 교육받은 결과일 확률이 높다. 한국의 아이들은 어떻게 교육을 받는가? 「부모님 말 잘 들어야 해. 선생님 말 잘 들어야 해. 어른 말 잘 들어야 해.」 아이들을 편하게 돌보기 위해 별생각 없이 아이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은 인간의 의견을 우선시하도록 가르친다. 본인의 생각보다 타인의 생각을 우선시하게 만든다. 이타적으로 만든다. 말 잘 듣는 아이들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선시 하는 타인이 아이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부모, 교사, 어른 다 아이보다 강하다. 아이보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가르친다. 「괴롭히지 말라는 내 말을 우선시하라고!」 그런데 그런 말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행동원리를 만드는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괴롭힘은 나쁘니까 하지 말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들 사이에서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게 되어버린다. 교사가 폭력을 쓰지 못하게 된 시대에 아이들에게 물리적으로 가장 강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같은 또래 중 힘이 강한 아이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은 아이들은 강한 아이의 말을 따르게 되어버린다. 어떤 강한 아이가 어떤 아이를 찍어서 괴롭힘을 하게 되면 강한 인간의 따르도록 교육받은 아이들은 얌전히 괴롭힘을 당하거나 그 아이를 따라 괴롭히거나 외면하게 된다. 집단 괴롭힘은 단순히 누군가 강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인간은 연약하여 칼질 한방으로도 죽는다. 괴롭힘 당하는 아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복수할 수 있다. 다른 아이들도 동조하지 않거나 외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아이들이 교육받은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보다 과중한 억압을 받는다. 「인사해. 절해. 복종해. 기뻐해. 슬퍼해. 좋아해. 싫어해. 공부해. 운동해. 이것도 해. 저것도 해. 다 해. 욕설은 안돼. 폭력은 안돼. 복수는 안돼. 일탈은 안돼. 반항은 안돼. 야한 건 안돼. 폭력적인 건 안돼. 노는 건 안돼.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다 안돼.」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일수록 올바름에 얽매여 자유를 잃어버린다. 정보를 검열하고 바람을 막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은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변해버린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속된 말로 찐따가 되어버린다. 보통 이런 찐따가 되어버린 아이들이 표적이 되어 괴롭힘을 당한다. 이들이 이보다 더 많은 자유를 잃게 되면 마지막 자유는 죽음뿐이다. 모든 선택지가 막힌 아이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헤매다가 죽음이란 선택지에 도달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된 복수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이란 마지막 자유를 누리고 쓸쓸하게 떠나갔다. 절망적이다. 왜 그랬겠는가?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동물들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죽을 각오로 물어뜯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아이들은 죽기직전 죽을 각오로 행동하지 않았는가? 복수가 어렵다면 전학을 가도 되고 가출을 해도 된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아이들에게 있어 어른들이 강요한 올바름의 족쇄는 죽음보다 무거웠기 때문이다. 사무치게 슬프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모를 것이다. 그저 착하게 만들려고 했을 뿐인데. 아이들을 위해서 그랬던 것일 뿐인데. 그런데 그건 착한 아이로 성장을 하게끔 도왔던 걸까 아니면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이로 만들었던 걸까? 시끄러운 아이들을 보고 설득이 아닌 강압으로 시끄럽지 않게 만드는 부모가 있다는 걸 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착한 아이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아이가 되면 착한 아이가 되었다고 기뻐한다. 그런데 그건 시끄러운 개를 짖지 않게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을 위해 짖지 않는 개처럼 타인을 위해 시끄럽지 않은 순종적인 아이로 만든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어른의 말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놓고 아이들 사이에서 제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찐따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잃게 하면 안 된다. 이기적으로 살라고 가르쳐야 한다. 왜 다른 사람의 말을 우선시 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도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다. 올바른 일을 행하게 하고 싶으면 강압이 아닌 설득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고 올바른 일을 가르칠 수 있다. 괴롭힘 주동자에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강한 아이가 어떤 아이를 괴롭히면 동조하거나 외면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자유의지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도록 가르쳤다면 강한 인간이 나쁜 행동을 이기적으로 하는 것을 저지했을 것이다. 힘이 부족해 저지하지 못했을 거라고? 천만에. 소수의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다수가 막으면 막을 수 있다. 다수가 소수에 휘둘리는 것은 강한 사람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왜 지성을 가진 인간이 동물처럼 행동했는지 알겠는가? 아이들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다. 인간처럼 교육을 받은 결과였던 것이다. 아이들을 망가트린 것은 잘못된 올바름이었다. 인간을 도덕의 노예로 만들면 안 된다. 남이 시켜서 올바른 일을 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자유로운 인간이 자유의지로 올바른 일을 이기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방식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선동에 취약하다. 왜 그랬던 걸까? 한국인이 선동 당하기 쉬운 것은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자유의지를 잃고 다른 인간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된다. 진영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진영을 서슴없이 물어뜯는다. 어떤 이기적인 인간이 말하는 주장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가에 선동 당하고 정당에 선동 당하고 기업에 선동 당하고 언론에 선동 당한다. 선동 당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이타주의가 올바르기 때문에 선동을 당해 자신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걸 잘못되었다고 인식하질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이타적인 성향 때문에 심지어는 외국인에게도 선동을 당한다. 이타적인 성질 때문에 다른 국가의 선동에도 쉽게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악의적으로 한국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는 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선동하는 자일 확률이 높다. 그 중 외국인이 선동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외국을 다룬 한국뉴스의 유튜브 댓글에서 외국인의 선동으로 추측되는 댓글을 볼 수 있었다. 몇 가지 기억나는 걸 얘기해보겠다. 왕정이나 공산당을 긍정하며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왜 민주주의를 부정하겠는가? 악의적인 문장을 도배하며 특정진영을 공격해 내부갈등을 심화시킨다. 왜 도배를 해가면서까지 공격하겠는가? 외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내부갈등을 부추긴다. 왜 외국을 비판하는데 한국인을 공격하겠는가? 특정 국가의 비판이 발생할 때 한국 내 진영을 흉내 내며 그 비판을 가하는 이를 욕설을 섞어가며 공격한다. 왜 중국 비판하는데 왜구가 나오고 일본 비판하는데 빨갱이가 나오겠는가? 아니 도대체 한국인을 비판한 것도 아닌데 왜 한국인이 발작하는 건가? 물론 이런 일들이 단순히 관심병이나 진영논리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국인일 확률도 있는 것이다. 댓글을 잘 살펴보라. 악의적인 문장을 반복적으로 도배만 한다거나 단어나 문장구조가 이상할 때가 있다. 이런 게 반드시 외국인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행태가 이상할수록 외국인일 확률이 높다. 한국을 실컷 욕했던 사람이 있다. 어느 때엔 한국어린이를 욕하고 어느 때엔 한국노인을 욕한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중국 욕에는 발작하며 화를 냈다.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한국은 욕하면서 중국 욕에는 발작한다. 아마 해외의 중국인이거나 국내 체류 중국인일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과 논쟁 중에 생각이나 문장이 이상해서 외국에서 교육받았냐고 물어보니 그 뒤로는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많다. 이런 일들이. 차라리 이렇게 티가 나는 경우는 알 수라도 있다. 완전 한국인처럼 행세하면서 악의적인 선동을 하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 선동을 조심해야 한다. 누가 언제 선동할지 모른다. 이타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어그로나 자기 진영은커녕 외국인이 그 목줄을 쥐고 있을 수도 있다. 외국인이 이타적인 사람들의 목줄을 쥐고 다른 한국인들을 물어뜯게끔 선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개처럼 물어뜯고 있는데 목줄을 쥐고 있는 인간이 외국인들이면 얼마나 수치스럽겠는가? 꼭두각시보다 부끄럽다. 부디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지 말길 바란다. 자신의 목에 걸린 목줄을 빼서 집어 던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사이비종교는 어떻게 인간을 세뇌했을까? 애초에 이타적인 한국인들은 보다 쉽게 세뇌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라 교육받았기 때문에 사이비종교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세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행동하는 광신도들은 자신의 이익보다 종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보통 종교들이 다 그렇다. 종교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한다.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종교의 모순을 깨닫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았을 것이다. 세뇌 당한 사람들은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를 잃고 종교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다. 교주나 신의 종이 되길 바랐다. 단순히 종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교도 그렇지 않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면서 유교의 나이 차별에는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유를 주장하면서 연하를 지배하려고 한다. 평등을 주장하면서 연하를 차별하려고 한다. 부디 그 모순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유국가의 국민이라면 종교의 이익보다 본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왜 한국인은 의존도가 높을까?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미군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다. 그걸 보고 어떤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냐며 조롱했다. 개 같은 새끼. 함부로 지껄이다니. 하루 빨리 미국과 대등한 관계의 동맹이 되어 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존도가 높은 사람들이 많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외교와 자본과 국군 체계의 문제 등 다양한 것들이 진척 차질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요망했다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미 전환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실리적인 문제 등을 거론하며 반대하고 있다. 정치적 진영논리에 의해 반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현 정권에 대한 불신 때문에 전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째서 전환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본질을 보면 복잡할 것이 없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한국인은 이타적이어서 의존적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착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을 우선시하며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런 의존적인 기질 때문에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거부감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기질로 나타나는 의존적인 심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유를 가져다 붙였을 뿐이다. 나는 미국과 가능한 대등한 동맹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미국 영향권 아래에 놓였기 때문에 미국과 친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미국과 친했으면 좋겠다. 한국인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그런 자유에 대한 애정이 정치권에 영향을 주는 민주적인 국가라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자유국가와 사이 좋게 지낼 거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왜 한국인은 책임지기 싫어하는 것일까? 책임지기 싫은 거야 만국 공통이지만 한국은 보다 심하다. 인사 책임을 거부하며 하청을 늘리고 보안 책임을 거부하며 인증서를 강요한다. 얼마나 책임지기 싫었으면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두나. 인사에 대한 책임 좀 져야 한다. 하청은 책임전가 이외엔 정말 쓸 데가 없다. 불필요한 유통구조로 대다수 국민들이 높은 생활비를 감내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다수에겐 비효율적이다. 보안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이상하게 개인이 보안에 대한 책임을 진다. 외국에선 은행이 보안의 책임을 지기 때문에 인증서가 없다고 한다. 얼마나 책임지기 싫으면 고객한테 책임을 떠넘기나. 이제 보안에 대한 책임 좀 져야 한다. 왜 한국인들은 그런 번거롭게 매번 인증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개인이 보안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무책임함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기질이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들었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책임질 상황이 생기면 그 타인에게 떠넘겨왔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는 잘못 없어! 네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야! 다 네 책임이야!」 책임전가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희생에도 익숙했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한국인들은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익숙해 일방적으로 책임을 떠안게 되는 악습에도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책임을 떠넘기는데 익숙하고 책임을 떠넘겨 받는데 익숙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강자가 책임을 떠넘기고 약자가 책임을 떠안는다. 그런 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IMF. 강자가 책임을 떠넘기면 약자가 책임을 떠안았다.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하여 결과의 책임을 떠안으면 부자들이 그걸로 재산을 불렸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국민의 과소비가 문제였다며 국민에게 원인의 책임을 떠넘긴 적도 있다. 정신이 혼미하다. 이타주의는 결국 어떤 이기적인 인간의 이익을 위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배국가의 국민들은 이타적이어야만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과연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인 한국에 어울린 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그 이기적인 행동이 국가를 살찌우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국가의 올바른 모습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겸손하다. 외국에서도 유명하다. 지나치게 겸손하여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외국에서 아이가 성과를 내면 사방팔방 소문 다 내는 반면 한국에서는 굉장히 조용하게 넘어간다. 상을 타도 겸손하다. 승리를 해도 겸손하다. 우승을 해도 겸손하다. 왜 그랬던 걸까? 자신감을 드러내는 순간 공격받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겸손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졌다고 해보자. 「너의 이익을 위해 자신감을 가지면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수 있잖아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해야지!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정의의 망치로 두들겨 맞게 된다. 이타주의 사회는 결과적으로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미국 전 대통령인 오바마의 기자회견에서 오바마가 한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질 않아 논란이 생겼던 적이 있다. 회견장이 어색한 침묵에 휩싸이자 외국인 기자가 질문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한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한국인 기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실망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서면 이기적이라고 공격받는 한국사회의 특성이 만든 참사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속된 말로 나대면 찍히니까 나서질 못한 것 같다. 설마 능력이 없어서 못했겠는가? 눈치보다 시간이 끝났을 뿐이다. 어떤 사건이 기억난다. 어느 기업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먼저 훈장을 받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스트레스로 자살했다고 한다. 한국에선 겸손하지 않고 나대면 따돌림 당한다. 어느 기업의 문제라기 보다 이것은 이타적인 한국인의 특성일 뿐이다. 이기적으로 변해야 그런 자신감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부디 한국인들이 마음 편하게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줄 모른다. 이타적이다 보니 돈을 버는 것도 돈을 쓰는 것도 타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돈 쓰는 거야 개인 마음이다. 하지만 너무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뭔가 자유롭게 돈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돈을 많아 벌어도 쓰는 곳이 한정되어있다. 이타적인 사람이 많은 한국에서는 자신을 위해 사치를 하면 이기적이라며 비난을 받기 때문에 눈에 띄는 사치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사치를 한다. 모바일 게임과 개인방송에 수백에서 억 단위의 돈을 쏟아 붙는다.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사치하는 방법은 인터넷이 적합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고 싶어도 주위에서 압박이 들어온다. 「가족을 위해 돈을 쓰세요. 어려운 이를 위해 돈을 쓰세요. 이타적으로 돈을 쓰세요.」 본인을 위한 소비가 악이 되었다. 소비가 악이 되자 생산이 선이 된다. 국민들은 생산적인 활동을 위해 부동산과 주식에 투기나 투자를 한다. 부동산 투기는 국가적으로 봤을 때 비생산적인 활동이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엔 무척이나 생산적인 활동이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돈이란 양분을 흡수해 돈이란 열매를 맺게 하는 나무다. 부동산이란 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필요한 돈을 흡수하여 다른 나무들을 말라비틀어지게 하면서까지 돈을 맺게 한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는 비생산적이지만 개인적으로 생산적이다. 부동산이나 주식 과열은 소비가 죄가 된 이타적인 사회가 만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내에서 돈이 돌지 못했던 것은 사치를 향한 이타주의자들의 냉엄한 비판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돈 쓰면 욕먹는 곳에서 마음대로 돈 쓸 수 있겠는가? 만약 이기적인 사회였다면 마음대로 돈을 사용하여 국내에 돈이 돌았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므로 굳이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 돈을 퍼붓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인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서 얻은 만족감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모바일 게임에서 잠깐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큰 돈을 사용하는 것이나 개인방송에서 잠시 관심을 받기 위해 큰 돈을 사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보다 입체적이고 깊이 있는 만족감을 위해 현실에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들이 웃는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노인들이 그렇다. 손주들을 보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모바일 게임에 억 단위의 돈을 쏟아 부으며 얻는 만족감과 고아원을 설립해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얻는 만족감 중 어느 쪽이 더 큰 만족감을 주게 될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에서 만족감을 더 느낄 것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떤 식으로 흘러가겠는가? 사회는 더 많은 비용과 더 많은 투자를 요구할 것이다. 자신에게도 이타적으로 행동해달라며 강압할 것이다.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행동한 것조차 간섭하면서 이타적일 것을 종용할 것이다. 뭔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사치를 하면 눈에 띄어서 간섭을 당한다. 이러니까 마음 편하게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 돈을 쏟아 붙지. 어떤 가수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떤 가수에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부를 바라는 이메일이 온 적이 있다고 한다. 가엾게 여겨 돈을 보내줬더니 더 큰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런 메일이 와도 무시한다고 한다. 이타적인 사회에겐 한번 이타적으로 행동한 인간은 계속 이타적으로 행동하길 강요한다. 성가시다. 한국인은 착하다. 배운 대로 다 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를 위한 비용지출을 꺼려하는 것은 선의를 강요하는 이타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기적으로 선행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자기 만족감을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을 권장해야 한다. 그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면 더 많은 기부를 요구할 수가 없다. 타인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니까 타인이 이래저래 간섭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이기적으로 선행을 하겠다는데 이래저래 간섭할 수 있겠는가? 위선이란 공격도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겠다는데 위선이 어떻게 나오나? 보답이 없더라도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된다. 자기 만족감을 위해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선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는 한국도 소비가 선이 되어야 한다. 멋대로 돈을 쓴다고 오지랖 피우는 것은 이타주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가 오히려 선행의 첫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마음 편하게 이기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일단 여기까지 하겠다. 「한국인은 이타적이다.」라는 사실 하나로 수많은 현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본질을 알게 되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어떤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걸로 안다. 그래도 대부분 해결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본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단 괴롭힘을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을 보다 더 어른들 말을 잘 따르게 가르친다. 그러면 자신의 의견보다 강자의 의견을 따르는 데에 익숙해져 강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것에 동참하거나 외면하게 된다. 해결하기 위해 했던 행동으로 오히려 더 집단 괴롭힘이 심해진 것이다. 그래도 본질적인 이유를 몰라 더 더 더 착하게 하고 어른 말 따르게 한다. 그러면 더 더 더 심각해질 뿐이다. 불행의 연쇄가 끊어지질 않는다. 끔찍하다. 정말. 이런 끔찍함에서 벗어나라면 마냥 착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원리를 예측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싸우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네 의지로 올바른 행동을 하라고 해야지 잘못된 것을 당하거나 목격했을 때 자신의 의지로 올바른 것을 행할 것이다. 이미 행동원리가 결정되었다면 올바름과 무의식이 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그래야 본질을 찾아 근본적인 원인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맹목적인 이타주의가 사회문제의 원인이었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이기주의로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모두가 이기적인 한국이라. 아마 걱정을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타인을 위하지 않아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져 공동체가 붕괴될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묻겠다. 그런 걱정을 하는 네가 바라는 이익은 무엇인가? 인간불신인가? 공동체붕괴인가? 네가 바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네 이익에는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밖에 없는가? 아니지 않나. 자국민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국가의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종류의 바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명령 받지 않아도 충분히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은 개돼지가 아니다. 하고 싶은 걸 해도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오히려 더 낫다. 왜냐하면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의 바람은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비리를 저질러 부정축재를 하거나 사람들을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인간은 이타주의 사회에도 많다. 그런 종류의 인간이 평범한 이타주의자들을 선동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겨왔던 것이다. 「너는 착하니까 나의 이익을 위해 살아라.」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은 그릇된 이기주의들의 부당한 이익을 위해 살았다. 이타주의 사회에선 그런 것이 일상이다. 정말 속상하다. 왜 착한 사람들이 이용당해야 했는가?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착하다.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천한다. 단지 착하다는 기준이 문제였을 뿐이다. 기준만 바로잡으면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올바른 걸 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것은 현상을 보고 결론을 낸 객관적인 추론이다. 한국인들은 배운 대로 다 했으니까. 꼰대도 낮은 출산율도 높은 자살률도 이성혐오도 이것도 저것도 다 배운 대로 한 결과니까. 제대로 된 방법만 알려주면 그것도 배운 대로 할 것이다. 그러려면 올바른 이기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회의 행복을 바라는 인간도 이기적이어야 사회의 불행을 바라는 인간의 이기심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타적인 사회는 사회의 불행을 바라는 이기주의자의 낙원이었을 뿐이다. 한국이 이기적인 사회가 되면 가장 중요한 인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다.」라는 사실이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해서 자신만 이기적으로 행동하려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기주의가 잘못된 것은 일부만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만 이기적이다 보니 이타적으로 행동하려는 인간들의 이익이 전부 일부 이기주의자로 몰려 마치 이기주의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인식되게 되어버렸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그런 일은 없어진다. 예를 들어보겠다. 부모와 자식이 휴일 여가를 보낼 곳을 찾기로 했다. 이타적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서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말한다. 「어디를 가고 싶니? 거기로 가자.」 자식이 부모에게 말한다. 「어디를 가고 싶으세요? 거기로 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타적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곳으로 여가를 가는 것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었다면 이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네 행복이 내 이익이다.」 남의 이익을 우선시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타적이라 할 수 있는가? 이타적이라는 것은 본인이 바라지 않았지만 타인을 위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할 때 나타난다. 이타적인 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것이다. 가고 싶지 않아도 자식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여가를 간다. 그것은 그들에게 노는 것이 아니었다. 봉사와 희생이었다. 그런 이타적인 것을 받은 측도 불편하다. 그것이 봉사와 희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불편해하면서도 나중을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봉사와 희생을 해야 하겠지. 나도 바라지 않는 걸 해야 하겠지.」 답답하다. 그런 일방적인 봉사와 희생이 불편해질 무렵 가족여행을 꺼려하게 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괜히 눈치 보면서 노는 것보다 대등한 관계하고 속 편하게 노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버린다. 보다 더 나쁠 때에는 즐거움을 강요한다. 「너를 위해서 내가 봉사와 희생을 했는데 왜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거야! 즐기라고!」 멋대로 한 봉사와 희생을 통한 즐거움을 강요한다. 이타주의란 마음에도 없는 가식은 서로를 오히려 멀리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어중간한 이타주의는 솔직한 감정을 전하는 것조차 막아버린다. 차라리 이기적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아버지는 A에 가고 싶다. 어머니는 B에 가고 싶다. 자식은 C에 가고 싶다. 그러면 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가고 싶은 곳을 다 말하고 토론을 하면 된다. AB C에서 여가를 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행복과 지출 비용과 거리와 시간과 애정으로 희생할 수 있는 범위 등을 고려해 가장 좋은 곳을 가면 된다. 자신의 가고 싶다는 곳을 간다는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상대를 설득한다. 이 정도는 애정으로 희생할 수 있다고 말을 한다. 토론 끝에 결정된 곳에 가면 대부분 서로 불편한 마음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 납득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아이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토론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고 무조건 부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자기의사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이타주의가 될 것이다.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유롭고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남의 이익을 위해 사는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남의 눈치나 보고 남의 말이나 듣고 남에게 휘둘리는 걸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타주의 사회가 불행한 것은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자신의 의견이 통과해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해야 한다. 모두가 이기적이라면 본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타인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이기심이 존중 받기 위해서는 너의 이기심도 존중해야겠지.」 서로의 이기심을 존중하는 만큼 논리적인 토론과 애정으로 결론을 내리고 수긍할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건전하고 바람직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이다. 이런 이기주의가 가능 하려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자유, 평등, 지성. 따라서 이기주의는 현명한 자유국가에서나 어울리는 방식일 것이다. 달리 말해 자유국가에서는 이기주의가 어울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고생하는 곳은 일부만 이기적이거나 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세 가지에 사랑은 굳이 넣지 않았다. 지성이 있다면 사랑이 필요하다는 건 알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사랑해야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이성을 사랑해야 이성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을 사랑해야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 사랑은커녕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자는 그 누구든 위험한 인간이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인간불신과 공동체붕괴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국가에서는 이타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지배자에게 모든 이익이 몰리려면 사람들이 이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국가의 국민이라면 이기적으로 생각하자. 모두가 이기적이게 되자. 그러면 지금 권력의 충돌이 얼마나 훌륭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은 정쟁의 소용돌이 안에 있다. 권력자들이 각자가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다. 국민들은 그런 싸움에 실망했다.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서는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그리고 절망했다. 그들이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의 약점을 공격해버리는 바람에 온갖 더러운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걸로 선동 당하기 시작했다. 선동 당하는 사람들은 그에 맞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타주의가 선동에 취약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보통 아무런 근거 없이 선동 당하지는 않는다. 공산당의 선동을 당했던 것은 실제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의 선동을 당했던 것은 실제 공산당의 침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선동 당한 사람들을 무조건 나무라기 보다 어째서 선동을 당했는지에 대해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선동 당한 국민들은 10의 잘못을 100의 잘못으로 인지하거나 10의 잘못을 0의 잘못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먼지를 털어서 조금이라도 잘못이 나오면 부풀려서 공격하거나 그에 대응하여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방어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서로를 어리석다며 공격했다. 진영을 나눠 서로를 공격하는 동안 선동을 하는 이들은 그런 진영을 이용해 갈등을 부추겼다. 특히 외국인이 그러는 것 같을 때엔 참 참혹했다. 속상하다. 어째서 선동을 당해야 하는가? 이제는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잘잘못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이기적인 자유국가 국민의 필수소양이다. 10의 잘못은 10만큼만 비판하면 된다. 10의 잘못을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옹호하면 안 된다. 그런 편향적인 사고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만든 것이다. 몇 가지 권력의 이기심이 만든 사건들을 집어보겠다. 조국. 조국이 법무부장관 후보가 될 무렵 자녀의 입시 문제로 공격을 받았다. 이것은 정치적인 공격이었다. 조국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이 점은 부정해선 안 된다. 만약 조국이 법무부 장관 후보가 아니었다면 공격을 받았겠는가? 공격한 이들과 같은 진영이었다면 공격을 받았겠는가? 이후 다른 진영에 공격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이라고 해서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공격이라고 아무 근거가 없는 게 아니지 않나. 단지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잘못을 과장되게 해석하거나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나서는 일이 있었을 뿐이다. 조국에 대한 의혹은 많다. 과장된 것도 있고 축소된 것도 있더라. 일단 여기서는 조국 자녀의 입시문제만 다루겠다. 요점은 내로남불이었다. 쭉 살펴본 결과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권력자가 법의 망을 피해 행할 수 있는 부당한 행위의 나열. 잘못되었지만 관행이어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어왔던 그 선을 줄타기 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논문 1저자 부당 등재는 관행보다 더한 행위고 무시험 전형은 관행 수준으로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맥의 친분으로 좀 더 과장되게 성과를 포장하거나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해주는 것이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하던 부당한 행위를 사용했을 뿐이었다. 이타적인 사람들이 인맥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잘못을 저지르는 아주 자연스러운 집단 이기주의였다. 이런 부당한 관행이 보다 큰 파장을 부른 것은 평소 하던 말 때문이라고 한다. 앞에서는 입 발린 말을 하면서 뒤에서는 남들과 똑같이 잘못된 관행을 이용했다는 점이 국민들에게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마치 모든 입시 비리의 원흉인 것마냥 공격을 받거나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옹호를 받았다. 나는 여기서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겠다. 이번 주제에서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각자 판단하길 바란다. 그건 개인의 자유다. 단지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편향적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집단의 이익에 맞게끔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이기적으로 판단하길 바란다. 한국인들은 이기적으로 판단해도 될만한 지성을 갖추고 있다. 이는 객관적인 추론이다. 한국보다 학력과 교육열이 높은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안 어리석어 보였던 것들은 이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타주의가 지혜로운 사고를 앗아갔다. 나는 한국인들의 지성을 신뢰하겠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어떤 이의 이기심이 올바른지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입시 비리에 대한 경각심과 공정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권력이 이기적으로 행동하자 암암리에 행해지던 입시에 관한 부정한 어둠들이 밝은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권력의 이기심이 한국에 있던 어둠을 비춘 것이다. 일반적인 국민들은 사회의 발전과 행복과 안녕을 바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면 이 사건을 긍정적인 결말을 낳은 사건이라 판단할 것이다. 앞으로도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서로의 어둠을 비추길 바라겠다. 윤미향. 윤미향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기부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으로 공격을 받았다. 정의기억연대와 관련된 사건은 너무 지저분해서 정리하기가 어렵다. 이 사건의 중심인 위안부는 한국에게 있어 성역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이래저래 다루기가 어렵다. 정리하기 어렵고 다루기가 어렵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크게 키우거나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는 것도 보인다. 사건을 키우기 위한 듯한 언론의 무더기 오보가 있었다. 사건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이들은 이타주의적인 진영논리가 만든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언론은 좀 더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 정보를 다루는 전문가가 그러면 정보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기자를 신뢰하고 싶다. 이 사건은 너무 지저분해서 요점 잡기가 어려운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 또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기부단체의 기업화가 만든 폐해로 보인다. 한국의 기부단체들은 기본적으로 불투명하다. 어떤 신문사와 대학의 공동연구를 통해 45개의 공익법인의 투명성을 평가했는데 90점이 넘는 A급은 단 두 곳이었다. 그런데 A급이라 불리는 대한적십자사조차 부실이 심각했다고 한다. 직원이 공금을 횡령하고 리베이트를 받고 혈액관리도 엉망이라고 한다. 5년 동안 107명의 직원이 각종 비위 행위로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A급이 이러면 나머지는 어떻겠는가? 이런 걸 보면 정의기억연대의 불투명함이나 기부금 유용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업계 평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특별히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 그런 건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내에 있는 기부단체들의 투명성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국민들이 기부단체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할 근거가 생겼다는 것이다. 투명하지 않으면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모른다. 해외를 예로 들자면, 해외의 어떤 기부단체에서는 기부금의 70~80%가 단체 운영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해외의 어떤 기부단체는 기부금의 97%가 자선에 쓰였다고 한다. 불투명하면 그런 걸 모르게 된다. 과연 한국의 불투명한 기부단체들은 기부금의 몇 퍼센트를 자선에 사용했을 것인가? 기부단체들이 불투명하다 보니 차라리 기업이 기부단체를 운영하는 게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품을 구매하면 구매금의 일부가 기부금이 되어 자선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부되는 금액은 소비자들이 알 수 있게 전부 공개한다. 기업 입장에서 어떨지는 모르겠다. 단지 기업형 기부단체보단 기부단체형 기업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면 자연스럽게 기부를 하게 되어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불투명한 기부단체에 기부하여 그들의 배만 불려주는 것보단 낫다고 본다. 기부단체들이 그런 걸 보고 싶지 않다면 투명하게 운영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 또한 권력의 이기심이 어둠을 비춘 꼴이 되었다. 보다 더 많은 어둠이 비춰지길 바란다. 추미애. 추미애가 법무부 장관 후보가 될 무렵 아들의 특혜 휴가 논란으로 공격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건이다. 추미애의 아들이 군복무 도중 휴가를 나가 복귀를 하지 않고 전화를 통해 휴가를 연장했다는 것을 당시 당직사병이었던 병사가 주장했다. 그걸 어떤 신문사가 보도해 논란이 발생했다. 실제로는 병가였다고 한다. 군법상에 하자가 없다고 한다. 병가에는 요양심의가 필요한데 그것은 입원 중인 현역병만 대상이라 한다. 전화로 휴가를 연장한 육군 병사가 4년 동안 삼 천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 중 카투사는 36건이라고 한다. 이외 의혹제기 한 병사가 명예훼손을 당한다거나 보좌관이 대신 전화를 했다거나 국회에서 거짓말을 했다거나 평창올림픽 통역병 파견 청탁 의혹들이 있었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크게 키우거나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게 되었다. 특혜의혹을 제기한 당직 병사가 정정보도를 청구할 정도로 과장되게 보도하거나 추미애 아들을 위인과도 같은 인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과장되게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거나 의혹을 제기한 병사를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위의 두 사건에 비하면 큰 잘못은 아니다. 사건 자체만 보면 쟁점은 보좌관 지시와 외압유무만 남기 때문이다. 명예훼손과 거짓말은 사건 이후 벌어진 것들이다. 보좌관 지시는 부탁이란 말로 모호하게 넘어갔다. 외압은 명확하게 증명하긴 어렵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절차라면 굳이 외압까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부모가 같은 절차를 요구했을 시 허용되지 않는다면 특혜라고 볼 수 있고, 특혜라면 외압을 의심해봐도 좋을 것이다. 사건 자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여론 또한 위의 두 사건에 비해 잠잠한 편이다. 여기서도 특별히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 그런 건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군 부대 내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청탁과 특혜가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해본 사람이라면 징병된 인원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친인척이 권력자라면 여러모로 배려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면회나 외출이 가능하거나 보다 편한 곳에서 복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배려가 외압으로 해준 건지 아니면 알아서 해준 건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권력이나 인맥으로 차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을 대부분 알고 있다. 최근에는 어떤 그룹의 임원 아들이 황제 군복무를 하여 논란이 발생한 적이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특혜는 일상적이었다. 아마 그런 보편적인 인식 때문에 추미애의 아들 논란이 더 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사건 또한 권력의 이기심이 어둠을 비추어 세상을 밝게 만드는데 공헌을 한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하겠다.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여당 측 인사를 다뤄보았다. 과거로 돌아가보면 탄핵이나 사립유치원 같은 예가 권력의 이기심이 비춘 어둠일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그들도 결국 이타적으로 행동했다. 권력집단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집단끼리 이익을 공유하며 이타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어둠들을 비출 수 있었던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밀착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아무 어둠도 비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일당 독재와 같은 것이다. 만약 권력자들마저 집단의 이익이 아닌 본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권력집단 내부의 어둠까지 비추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과거나 현재나 정치적인 사건은 과장되거나 축소되었다. 과거 맹목적으로 옹호하던 사람들이 현재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걸 보면 참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인은 이타적이라 그렇다. 이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본인의 진영을 옹호하고 타인의 진영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진영논리가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고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기적으로 생각했다면 진영 관계없이 자신의 기준으로 괜찮다고 판단되는 것은 옹호하고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것은 비판했을 것이다. 잘못된 정도도 명확하게 선을 그어 형평성 있는 비판을 하고 비난을 가했을 것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진영논리에 빠져들고 진영논리에 빠져들기 때문에 감성적이게 되었다. 감성적이기 때문에 편향적으로 잘잘못을 따졌다. 그런 객관성의 상실은 이타주의가 부른 것이다. 욕먹고 있는 걸 굳이 애써서 네가 옹호할 필요가 없다. 욕먹고 있는 걸 굳이 애써서 네가 더 심하게 욕할 필요가 없다. 왜 권력에 이용당하고 있는가? 권력의 이기심이 부른 어둠들을 보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들이 만약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치부를 감췄다면 국민들은 그런 어둠들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더 나쁘다. 현명한 국민들은 이들이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한국에 있는 어둠들을 비추길 바라야 한다. 그럴수록 사회는 건전해지고 올바르게 되며 행복하게 된다. 권력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그 이기심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자. 그것이 바람직한 자유국가의 모습이다.

 

 

 

무엇이 진정 사람을 위하는 것인가? 무엇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길인가? 자유국가에서는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우리가 올바르다 생각했던 것은 진짜 올바른 것이었을까? 보통 인간은 환경에 지배당한다. 교육받은 대로 결과가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있는 사회문제는 거의 다 교육이 원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르쳤던 올바름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그걸 인지했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타적이 아닌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한국인은 학력이 높다. 지식이 많다. 그런 한국인들이 현명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예로 들겠다. 만약 인터넷에서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의견이 나오면 가차없이 반박하길 바라겠다. 자신의 의견을 이기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남이 상처 입을 걸 걱정하여 방치하면 사회수준이 더 낮아지는 것이다. 각자 알고 있는 전문지식들을 사람들에게 이기적으로 알려줘야 사람들이 배우고 사회가 현명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예로 들겠다. 만약 현실 속에서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의견이 나오면 가차없이 반박하길 바라겠다. 똑같이 자신의 의견을 이기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남이 상처 입을 걸 걱정하여 비리든 부패든 잘못된 관행이든 방치하면 사회수준은 더 낮아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발언에 신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주관을 객관으로 만들면 된다. 자신의 주장을 다수가 인정하게 되면 그 주장은 객관화가 된다. 어떤 사람은 주장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을 공격할 때가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상대의 손익을 계산하지 않게 되어 상대의 주장만 가지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각자 올바른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사회가 건전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타주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이타주의라는 이름으로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면 안 된다. 이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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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 한번은 퇴고를 하긴 하는데, 나중에 다시 보면 오타나 오류가 많네요. 분명 당시엔 없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면 많군요. 좀 더 노력해야겠어요.

 

도덕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우선 먼저 이것부터 씁니다.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달린 족쇄를 집어 던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행할 수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잘한 거면 칭찬 받고 못한 거면 비판 받으면 됩니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모두가 이기심을 평가하면 됩니다. 이제는 올바름도 자유롭고 평등하고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부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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