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동사니] 백석 - 국수2010.05.27 AM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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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안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넷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이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넷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넷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하수구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은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둑한 삿방 쩔쩔 끊는 아르굳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이 살던 시절, 이북에서 말하던 이 '국수'는
냉면-그 중에도 평양냉면-을 말하는 것이라 봐야 한다.
단순히 국수로 이해해버리면 백석의 시가 지니고 있는
그 신비로울만한 토속적 색채가 퇴색된다.

평양냉면의 그 슴슴한 육수를 한 모금 들이키듯
조금씩 조금씩 시골에 걸어가는 기분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을 음미하면
나도 모르게 겨울 오후의 초가집에서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찹찹한 냉면을 한 젓가락 하는 기분이 든다.


이 좋은 시를 군사정권 시절에는
빨갱이 시라고 못 보게 했으니...
이제 좀 있으면 다시 그럴 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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