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선과 악의 환상] 두개의 길 (4화)2022.06.21 PM 07:25
타락한 천사 루시퍼가 한 인간에게 말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이 세상 모든 것을 신께서 만드셨다고 하셨다.
또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고 하셨지.
오직 신만이 누릴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
그러나 기쁨과 행복만이 존재해야 할 천국에 시기와 불신이 싹텄고,
그 해결책으로 내 놓은 것이 다름 아닌 추방이었다.
거짓말을 한 거야.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내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처럼 너희의 생명에 한계를 둔 것이나 고통을 방관한 것에 숨겨진 뜻 같은 건 없다.
전지전능하다는 거짓말로 모두를 속이고 두려움을 심어놓은 것뿐이야.
그러니 우리가 직접 신을 찾아가 우리의 신념을 전하고,
창조주로서 세상을 방관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이전 이야기들은 링크를 통해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길
11월 18일 No.80
걱정한다고 뭐 하나 나아질 것도 없는데
걱정거리가 자꾸만 늘고 있다.
하다하다 이젠 검은색 비라니 빌어먹을.
처음엔 다들 농담 삼아 떠들어대던 것이
괴이한 소문에 올라타면서 공포가 되어버렸다.
전쟁 중에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세균 섞은 약품
수백만 톤을 대기 중에 뿌려 검은 색이 된 거라나.
그 비를 맞으면 살이 썩어 들어가고,
정신이 나가 미쳐버린다고들 떠들고 있다.
소문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 비가 내리고 나면 항상 몇 명이 감쪽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가 있다.
대책 없이 도망쳤을 수도 있고,
어쩌면 살해당해 유기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벌써 열 명이 넘게 사라졌는데
그들 중 단 한명도 그 어떤 흔적이나
단서하나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전국에 걸쳐 일어나고 있으니
벌써 꾀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고,
그래서 모두들 실종사건을 검은 비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지더욱이 그 빗속에서
한 술 더 떠 책임지고 조사해야 할 정부 놈들은
방독면과 방호복 몇 벌 던져주면서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니 두려워하지 말란다.
한심한 쪽으로는 참 일관성 있다.
음식이라도 넉넉하게 주면 모를까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을 선심 쓰듯 던져줄 뿐이니
당연하게도 정부를 향한 사람들의 불신이 치솟는 중이고,
그런 이유로 약탈자와 반정부 세력이 많이 늘었다.
지랄 맞은 세상에 걸맞게 참 잘 돌아가는 중이다.
그놈들과 군의 마찰로 종종 총소리가 울릴 때면
사람들은 이제 두려움 보다 분노를 앞세운다.
십년이나 전쟁을 해댔으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노는 증오를 낳기 마련이고,
증오는 언제든 광기로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광기는 딸의 안전에 치명적이다.
딸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젠가
이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기보다
광기에 빠진 자들이 공격해올 것을 대비해
방어선을 철저히 구축하고,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무기를 최대한
모아놓는 것이 중요하며 내가 그 광기에
휘말리지 않도록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한다.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그래, 십년이야.
자그마치 십년동안 매일 총소리를 들으며 많은 것을 잃었는데
나는 무얼 위해 가족 대신 국가에 헌신했던 걸까.
먼저 간 아내에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조차 늘어놓질 못하겠다.
그 어떤 변명도...
기억 났어. 그래, 그때 전투에서 돌아온 뽀빠이 녀석이
일기를 꺼내 적는걸 보고 놀렸었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녀석은 잘살아있을까.
정말이지 오늘처럼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이면
머릿속을 휘젓는 온갖 불길한 생각들로
미쳐버릴녹초가 되곤 했었는데,
그땐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랐었다.
이렇게 뭐라도 적고 있으면 정신을 가다듬고, 안정을 취하는데 도움이 되거든.
다 그 녀석 덕분이야. 언젠가 녀석을 만날 날이 온다면 꼭 사과하고 싶다.
늦은 새벽까지 일기를 쓰던 강철은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방금 누운 것 같았는데 얄미운 알람이 벌써부터
울려대는 중이었고, 가시지 않은 피로를 떠안은 채
한 숨을 내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 밖에 설치한
온갖 종류의 트랩과 안전장치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보통은 생존 교육을 위해 딸과 함께 트랩들을 살피며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그 내용을 복습했으나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난 탓에 혼자 해야 했다.
꼼꼼하게 모든 장치를 살피고 집안에 들어와 보니
통조림 몇 개를 꺼내 아침 식사 준비를 마쳐놓은 딸아이가
식탁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강철은 조금 수다스러울 정도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십년전쟁동안 말수가 극히 적어졌고,
항상 어두운 집안 분위기와 맞물려 두 사람의 식사시간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 보였다.
그래도 딸에겐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행복한 시간은 항상 금방 지나기 마련.
어느새 통조림 을 깨끗이 비운 강철이 먼저 일어나
일터로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딸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아무리 바쁠지라도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딸에게 전하는 주의사항은 결코 거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믿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누구지?”
“저요.”
“하나가 믿을 수 있고, 하나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빠요.”
“밖에서 누가 비명을 지르고,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절대로 문을 열지 말고 조용히 숨어서 아빠가 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래, 답답하겠지만 아빠가 올 때 까지는
절대로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갑자기 내리는 검은 비가 얼마나 무서운지 더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네, 그런데 아빠.”
“응?”
“전에 말씀하신 케이크 재료가 오늘 나오나요?”
“글쎄, 실은 아빠도 그걸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러니 오늘 꼭 나왔으면 좋겠구나.
일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 올 테니 잘 기다릴 수 있겠지?”
“네!”
오랜만에 웃으며 배웅하는 딸의 얼굴에
집을 나온 강철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오랜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국가는
도시재건 사업을 펼쳐 활로를 뚫으려 했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거나 기계가 들어가기
힘든 곳에 자재를 나르는 등 무척 위험하고,
고된 일에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일주일에 한두 명씩 크게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폐허가 된
도시에서 유일하게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길이었기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모여 일해야만 했다.
한참을 걸어 재건 현장에 도착한 강철이 곧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이를 눈여겨
지켜보던 클리퍼가 인사하며 그를 맞이했다.
“여, 좋은 아침. 오늘은 좀 늦었네?”
“늦잠을 잤어. 하지만 내 할당량을 채우는 데에는 문제없을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혹시 집이나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아무 문제없어. 못 믿겠다면 피검사 같은 것을 해도 좋아.”
“아니야, 그렇게까지는... 요즘 시도 때도 없이
검은 비가 내리잖아 그래서 조금 걱정돼서 그런 것뿐이야.
특히 당신 같은 능력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가치가 더 높으니까 그러니까...”
“할 말은 그것뿐이야?”
“아...... 응.”
“미안, 늦은걸 만회 하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시종일관 퉁명스럽게 내뱉은 강철이 돌아서
일터로 향하자 클리퍼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해서 꼬실 수 있겠어? 좀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야지.”
“그 입 닥치지 않으면 오늘 네놈 수당은 없을 줄 알아. 알아들어!”
클리퍼의 강경대응에 농담을 던진 인부들이
도망치듯 후다닥 일터로 향했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전력 생산량이 한참 모자라
모든 작업은 해가 떠있는 동안에만 가능 했고,
그래서 전쟁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중 복구가 불가능한 건물들을 폭파해체하는 강철의 업무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데 가뜩이나 부족한 인원과 장비문재로
늘 안전사고가 뒤따랐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쓸 수 없으니 높이가
수백 미터나 되는 부서진 빌딩을 위태롭게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것은 물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계산해 정교하게
폭발물을 설치한다지만 폭발 범위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기 일쑤였고,
건물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 무너져 내리는 일도 빈번했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면 곧 무너질 것처럼 생겨먹은 빌딩들이 즐비해
폭파해체 팀은 다음날 작업할 건물들이 정말로 바람에 무너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
폭발물을 가득 챙겨 목표건물 앞에 도착한 강철과 팀원들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작업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맞은편 빌딩 위에서 누군가 이들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루시퍼와 사탄이었다.
루시퍼는 언제나처럼 인간 모습으로 검은색 정장을 빼입고 있었지만
사탄은 빛을 굴절시켜 모습을 감추고 있었으니
전신에 두른 낡은 망토의 실루엣만으로 키나 덩치를 짐작해야 했다.
그렇게 한동안 인간들을 내려다보던 사탄이 곁에 있던 루시퍼에게 물었다.
“신이... 무릎 꿇는가...”
메마른 듯 갈라져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분노에
가득 찬 것 같기도 했고,
그 어떤 고통에 힘겨워 하는 것 같이 들리기도 했다.
루시퍼는 말없이 한참 더 인간들을 지켜보고 나서야 사탄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저들을 좀 봐.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정점에 달한 저 모습을 말이야.
이제 우리의 기술이 하늘에 닿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해 졌으니
그토록 바래왔던 이상적인 군대를 만들 준비가 되었다.
공격할 때가 된 거야.
모든 인간의 신념이 우리와 하나가 될 때 신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래, 그때가 되면 우리를 외면하고, 거짓으로 일관한 그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우리가 그 책임을 물어 반드시 신을 무릎 꿇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이에 사탄이 망토를 펄럭이며 말했다.
“내 증오가... 산 자들의 분노와... 죽은 자들의 원망을 불러와... 신을 향해 나아간다.”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비가 세차게 몰아쳤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녔지만
어떤 이는 원망스런 얼굴로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퍼붓는 비속에서 주어진 할당량을 채워야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내린 검은 비는 도시 구석구석을 모두 적셔 놓은 후에야
그칠 기미를 보였다.
강철은 이미 폭파 준비를 마쳐놓았지만
그의 팀원들과 함께 비가 완전히 그칠 때 까지 기다렸다가
건물 밖으로 나왔고,
삼분간 발파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고 난 후에 발파 버튼을 눌러 건물을 해체했다.
큰 굉음과 함께 오십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이 주저앉았음에도
도시는 이전과 별 차이가 없어보였다.
그저 부서진 건물 파편이 조금 더 늘어났을 뿐.
강철과 팀원들은 누구도 다치지 않고 한건을 해결했다는 것에
서로 말없이 감사를 전했다.
주어진 할당량을 다 채우고 배급소에 도착 했을 때에는
이미 배급 행렬이 길게 늘어선 후였다.
늘 긴장한 채로 높은 곳을 오르내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어간 강철이 행렬의 마지막에 서자
그 앞에선 이들이 별것 아닌 이야기를 심오한 듯 늘어놓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들이 강철을 힐끗 쳐다보았으나
강철은 다른 사람과 말 섞기를 싫어했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이제 막 배급받을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폭발 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기 때문에
강철은 귀중한 음식을 눈앞에 두고 잔뜩 긴장한 채로 몸을
웅크리며 총소리가 울린 곳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자 저 멀리 자동 소총을 든 두 사람이 나타났다.
군복이 아닌 민간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은 분명 반정부 세력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노동자들이 총격전에 휘말려 들세라
이곳저곳으로 후다닥 숨어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나타난 정규군이 교전 끝에 두 사람을 사살했다.
정규군은 배급현장을 스윽 하고 둘러보고는
별 이상 없다고 판단했는지 사살한 이들의 무기를 챙겨
다시 총소리가 울리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총소리에도 강철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그 방향에 강철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계속...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