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기] 霧間想念2013.08.02 AM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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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한다.
열 네살, 중학교 시절
어떤 가게 밑에서
비를 피해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던 소녀를.
우리들은 우산이 없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반이었다.
스스럼없이 후둑후둑 내리는 비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그때부터 비를 좋아했나보다.

그애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지만
쉽게 마음을 받아주진 않았다.

다만 입버릇처럼 하던 말
'야이...바보야'

그 말 하나에 많은 뜻을 담던 아이였다.

지 쫓아다닌다고 공부는 뒷전이었던 내가
수능시험을 아무렇게나 보고
부산에 있는 학교에 간댔을 때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야이...바보야'

제발 그만 쫓아다니라는 그 애에게
이것만은 주고 가겠다며
크리스마스 선물로 갖고싶어하던 목도리를 전해주고
힘없이 터덜터덜 뒷모습을 보이고 걸어가던 내게
들릴듯 말듯 힘없는 목소리로
'야이...바보야'

이듬해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렛을 들고 나한테 찾아와서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야이...바보야'

그렇게 술래잡기처럼
서로의 감정을 나눈 그 소녀가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소식을 어딘가에서 들었었다.


미워할것도 나쁠 것도 없었던
후회없던 어린 날의 좋아함이였었다.

무의식적으로 비가 오면 기분이 좋았던 것은
아마 시절에 대한 따뜻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이 박힌
비에 대한 마음이
사람 하나때문에
순식간에 휙휙 바뀌고 그렇진 않다.


다만 날씨는 날씨고
나는 나다.

비오는 날이 내 자신이 될 수는 없는 노릇.
맑아도 나이고
흐려도 나이고
천둥번개가 치고
태풍이 몰아쳐도
그 자리에서 날씨를 보고 있는 건 나이다.

감상은 좋은 것이나
감상에 몸을 내맡길 순 없는 법.


다만 이제 누군가
내 인연을 만난다면

지금 보고 있는 이 포근한 안개처럼
대지를 차분히 적셔주는 비처럼
따뜻하고 오래 머무는 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
거짓없이, 서로를 속여가며
자신을 포장하는 일 없이
비나 안개처럼 있는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여러 위인들보다
그런 남자가 정말 훌륭한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잠깐의 산책과 함께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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