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온글] 당나라의 굴욕2011.08.04 PM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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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maria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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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당나라는 성립당초부터 치욕으로 충만했다. 이연(李淵)은 정권을 빼앗기 위하여 나라의 이익을 팔아먹고, 후안무치하게 돌궐(突厥)에 신하로 자칭했다. "...정벌로 얻은 자녀, 옥과 비단은 모두 가한(可汗, 칸)의 것입니다" 이연 시대의 당나라는 돌궐에 계속 조공을 바쳤고, 돌궐인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와서 약탈해가곤 하면서 지냈다. "고조가 즉위하면서 전후로 상사(賞賜)를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시필(始畢)칸은 스스로 공이 크다고 생각하여 더욱 오만해졌다. 매번 사자를 장안으로 보낼 때마다, 매우 무례하였다. 고조는 중원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매번 용인해주었다" "상사"라는 말은 참으로 절묘하게 썼다. 원래 아랫나라가 윗나라에 바치는 것은 "진공" "조공"이고, 윗나라가 아랫나라에 내리는 것은 "상사"이다. 이연은 스스로 신하로 칭하였으면, 돌궐의 시필칸은 군왕이다. 비록 당서에서는 흑백을 뒤집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연이 조공을 바치면서 신하를 자처한 내용 자체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였다.



돌궐의 대군이 장안성에 다가오자, 이세민은 어쩔 수 없이 위수 변교에서 치욕적인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당나라는 금은보화(수나라 조정에서 물려받은 것)를 돌궐에 진공으로 바쳤다. 이세민은 스스로 당나라가 돌궐에 진공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나는 너희 칸과 화친을 맺기로 하였고, 금과 비단을 보낸다" 이세민도 스스로 이를 "위수의 치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고종시기인 670년(함향원년)에는 토번이 병사를 일으켜 당나라 서역의 4개 진, 귀자, 우전, 언기, 소륵을 빼앗아 간 바 있다. 그 후에 당나라는 두번에 걸쳐서 대군을 보내어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하였다. 당나라는 대장군 설인귀로 하여금 10만대군을 이끌고 토번으로 진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해호의 남쪽에 있는 대비천에서 토번대군에게 대패하였다. 698년(의풍3년)에는 당나라의 중서령 이경현이 18만군대를 이끌고 토번군대와 다시 청해에서 싸웠는데, 당나라는 다시 참패했다. 당나라 군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무측천시대에 돌궐은 다시 강대해졌다. 이 때의 당나라는 전혀 돌궐의 적수가 못되었다. "돌궐이 조, 정 지역에서 당나라의 남녀8,9만을 약탈하여 모두 묻어버리고, 지나는 길의 사람과 가축, 금은화폐, 자녀를 모두 빼았았다. 당나라의 장수는 쳐다만 볼 뿐 감히 싸우려고 하지 못했다" 당나라 중종때에도 "돌궐이 명사를 공격했다. 영무군의 대총관은 싸워서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수만명이었다."



무측천시기에는 원시적인 단계에 불과한 거란족에게도 당했다. 696년, 조인사등 28장수는 거란을 공격했으나 전멸하였고, 대장군은 포로가 되었다. 696년-697년에 거란수령인 이진충은 스스로 무상칸(無上可汗)으로 칭하며, 만영을 대장으로 병사를 일으켜 하북에 대규모로 진격했다. 당나라국경을 넘어 여러 큰 도시를 점령하였고, 당나라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697년 3월, 당나라는 상서 왕효걸, 우림위장군 소굉휘에게 17만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고, 동협석에서 전투를 벌였다. 거란은 왕효걸의 군사를 낭떠러지로 유인한 후 병사를 돌려 맹공을 가하였고, 왕효걸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고, 소굉휘는 도망쳤으며, 병사들은 거의 죽었다. 만영은 승리후 유주에 들어갔으며 유주성을 도살했다. 당나라는 다시 하내군왕 무의종을 신병도대총관으로 하고 우숙정태어사대부 누사덕을 청변도대총관으로 하고, 우위위장군 사탁충의를 전군총관으로 하여 20만병사를 이끌고 거란을 쳤다. 무의종의 군대가 조주(하북성 조주)에 이른 후 감히 나가지 못하고 상주(하남성 안양)로 후퇴했다. 만영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니 그 기세가 날카로웠다. 거란인들이 하북의 요지를 침입하여 북경을 포함한 수개의 성을 약탈하는데도 당나라군대는 그저 하남으로 도망쳐 갈 뿐이었다.



710년 당중종은 문성공주를 토번에 진공으로 바쳤을 뿐아니라, 당예종은 1년후에 황하의 하서구곡의 땅을 토번에 할양하였다. 이때부터 토번은 전략적인 요충지를 장악하여 지리상의 우세를 점하게 된다. 이것은 당나라화친역사상의 가장 치욕적인 화친일 것이며, 할양의 시작이었다. "토번은 구곡을 얻었고, 그 땅이 비옥하여, 병사를 주둔시키고 목축을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국경과 가까워, 이 때부터 병사를 이끌고 자주 침입하였다" 토번인들은 당나라 황실의 미녀를 가져갔을 뿐아니라 당나라의 좋은 전략요충지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여전히 당나라를 약탈했다. 이런 좋은 일들만 있었던 토번인들은 정말 행운아들이다. 마침 가장 유약한 중원의 중앙정부가 있었으니까.



당현종은 거란인에게 화친공주를 보냈으나 모두 살해당하였다. 캠브리지의 중국요서하금원사에 의하면 "745년, 당나라 조정은 통혼연맹정책을 채택하여 거란과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보내어진 황실의 신부는 모두 살해되었다" 당나라는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당현종은 두번이나 남조의 남만오랑캐에게 패하게 된다. 한번은 당나라군대가 6만명이 죽었고, 다른 한번은 7만명이 죽었다. 당나라는 남쪽의 작은 나라인 남조에 대하여도 이긴 경우보다 진 경우가 많았다. 여러번 남조에 참패를 당했다. 중국은 역대로 남방민족에게 대패한 경우는 드물고 북방민족에 패한 경우는 많은데, 이로써도 당나라군대의 무능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다. 안사의 난이후에 성도는 남조에 의하여 함락된다. 831년, 남조는 사천을 침범하여 성도외성을 함락시키고, 자녀, 백공 수만명을 데리고 후퇴한다. 수만명의 당나라 백성들이 남조의 노예가 된 것이다.



당나라의 굴욕은 남만 오랑캐에 그치지 않았고, 서원(西原)의 오랑캐에게도 당한다. 서원오랑캐는 광서의 소수민족이다. 763년(광덕원년), 서원오랑캐는 호남 도주성을 공격하여 도주성을 일개월가량 점령한다. "계묘년에 서원적이 도주에 들어와 불지르고 죽이고 약탈했으며 모두 가지고 가버렸다" '서원오랑캐가 주민 만여명을 데려갔다" 다음해 7월에 서원 오랑캐는 다시 영주(호남 영릉)과 소주(호남 소양)을 격파하였다.



당나라군은 또한 연(燕)나라에도 연전연패하였다. 그래서 할 수없이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회흘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숙종은 회흘에 겨우겨우 사정해서 회흘로부터 병사를 빌린다. 약정에 의하면 "성을 함락한 후, 토지와 선비평민은 당나라에 귀속되나, 금은보화와 비단, 자녀는 회흘에 귀속된다" 당나라는 회흘군대에 매일 양200두, 소20두, 쌀 40곡을 주기로 한다. 동경 낙양이 회흘사람들에 의하여 3일간 노략된 후, 많은 미녀와 재산보물이 회흘인들에게 약탈되었다. "회흘이 동경에 이르자 그들의 행동이 잔인하였다. 선비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하였고, 모두 성선사와 백마사의 두개의 누각에 올라서 난을 피하였다. 회흘은 두 누각을 불질렀으니 다치고 죽은자가 만명이 넘는다. 15일간 불이 계속 탔다. 그리고 관리들을 크게 욕하였다" 나중에 당숙종은 매년 회흘에 진공으로 견2만필을 주기로 한다. 그리고 숙종의 친딸인 녕국공주를 회흘의 60여세된 늙은 칸에게 첩으로 보낸다.



당나라는 자주 토번에게 대패하고, 토번에게 심지어 수도가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763년 10월, 토번대군이 봉천(섬서성 건현)을 점령하였다. 병사들이 장안성의 아래에 이르렀다. 놀란 대종은 황망하게 섬주로 피난갔다.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토번에 함락당하고 토번에서는 새 황제를 세웠다. 그들은 당나라 종실의 광무왕 이승굉을 황제로 앉혀서 자신들의 통치도구로 삼았다. 하서, 농우등 넓은 땅은 토번의 영토가 되었다. 이로부터 수백만의 한인은 토번의 노예로 전락했고, 토번은 난을 틈타서 당나라의 하서와 황산등 50개군, 6개진, 14군을 차지했다. "토번이 허를 틈타 하서, 농우를 취했고, 중국인 100만이 토번인의 노예가 되었다" 당나라는 심리적으로 토번을 무서워했고, 토번과 역사상 첫번째의 영토할양조약을 체결하였다. 783년에 당정부는 토번에 핍박당하여 <<당번청수맹약>>을 체결하였다. 당나라 정부는 토번이 점령한 지역을 토번의 영토로 인정하고, 맹약을 맺었다. 이후로, 농남의 문, 무, 성, 일, 민등의 각주군현은 모두 토번의 영토가 되었다.



중국의 역대왕조중 이민족에게 가장 많이 핍박받고, 핍박받은 범위가 가장 넓고 그 시간도 가장 긴 것이 바로 당나라이다. 당나라는 절반의 기간동안 이민족에게 능욕과 모욕을 당했다. 돌궐, 거란, 토번, 남조, 회흘은 무두 수만 수만씩 당나라 사람을 약탈해갔다. 심지어 서원오랑캐 같은 광서의 야만적인 작은 족속까지도 당나라에 와서 수만명을 약탈해갔다. 이런 일은 정말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당나라의 백성들은 기본적인 안전보장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생활했다. 당나라황조를 중국역사상 가장 강성한 황조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모욕이다.
댓글 : 7 개
그런데 정작 고구려를 멸망시킨건 당나라
이래서 당나라군대 당나라군대 하는 군요
근데 이거 보니까 괜히 대조영 돋네여.. 옛날에 한건데.
.....그런데 고구려가 애네한테 깨지다니 ㅠ.ㅠ
그래도 이세민은 뛰어낫는데...
당나라 시대때 태평성대라고 하지 않았나요.
고구려야....이미 오랜국가의 특성상 내부부패때문에 나라가 기울어있었음 역사가 긴 나라의 특징은 오래된 묵은 문제점이 감당못할정도로 계속 커지고있다는것이죠....그래서 어느시점에 피의혁명이던가 약해져서 침략당해서 사라지느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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