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온글] 당나라의 인종차별2011.08.04 PM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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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어떤 사람은 당나라때의 중국에는 인종차별도 없고, 사해가 귀순하여, 개방되고 민족대단결을 이룬 시기라고 말한다.



실제로 당나라의 인종차별은 아주 심각한 수준이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중국으로 온 외국인을 호인(胡人)이라고 불렀고, 4등급으로 나누었다. 최상등은 모두 사신(使臣)이었다. 당연히 당나라는 자신의 천조상국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모두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당나라는 남아공과 마찬가지로, 외국인은 특정한 지역에서 생활하도록 제한했다. 만일 점포를 연다면 당인(唐人)들이 사는 지역의 주변에는 열 수가 없다. 당나라는 외국인이 당인들을 모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당인의 의복을 입을 수도 없었고, 스스로를 당인이라고 사칭할 수도 없었다. 일단 발견되면 가벼울 때는 채찍으로 얻어맞고, 무거우면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를 가서나 노예가 되었다. 당나라는 봉건사회였지만, 외국인에 대하여는 노예제도를 시행할 수 있었다. 백노(白奴)와 황노(黃奴)의 구분이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를 노예매매가 아주 성행한 나라로 만들었다.



당나라때, 외국인이 일단 당인과 분쟁이 발생하면 옳고 그르고를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외국인들이 엄격하게 처벌받았다. 만일 당인이 외국인을 죽이면, 외국사절이 아닌 한 벌금 수백전을 내면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나라는 엄격하게 외국인과 당인의 통혼을 금했다. 일단 발견되면 당인의 종족은 아마도 아주 잔인하게 린치를 가할 것이고, 낳은 아이는 왕왕 다른 당인에게 노예로 팔려갈 것이며, 한족여자를 유혹한 외국인은 아마도 몰래 처결당할 것이다. 당나라정부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못본 척 눈감아 주었다.



다만, 당나라여자들의 당시 사회지위는 아주 높았다. 통혼을 할 수 없을 뿐, 외국남자를 '성노예'로 삼는 것은 완전히 허용되었다. 당나라의 여자들은 아주 개방적이어서, 언제든지 남자와 사통할 수 있었다. 낳은 사생아를 아무도 기르려고 하지 않으면, 당나라정부가 돈을 내어 부양했다. 당나라의 유명한 대장들 중에서 많은 수는 사생아이다.



당나라는 표면적으로 민족개화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통제는 아주 엄격했다. 외국인은 당나라때 민간에서의 지위가 낮았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당나라에 비교하면 기껏해야 소아과 수준이다. 당시 당나라는 너무나 강성하고 번영하여, 외국인이 차별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대량의 외국인들이 당나라로 밀입국했다. 당나라의 변경관리는 아주 엄격했다. 일단 밀입국하는 외국인을 체포하면, 현대처럼 그저 가두었다가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끌고가서 고된 일을 시키는데, 힘들어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다.



외국인이 당나라에 장기간 거주하는 것은 그 난이도가 미국의 그린카드를 얻는 것보다 어려웠다. 당나라는 전문적으로 장기간 당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관리하는 부서가 있는데, 행위는 야만적이고 세금은 과다했다.



비록 이러했지만, 당나라때의 외국인 수량은 그래도 백만에 달하였다. 중원과 연해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당나라는 외국인을 오랫동안 차별했으므로 당나라말에는 중국내 호인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란이 일어난다. 안사의 난에서의 안록산이 바로 호인이다.



당나라의 가장 비참한 사정은 바로 당나라황제가 호인을 중용했다는 것이다. 병권을 맡기고, 이들 호인들이 한화되었고 당나라문화를 숭배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호인들은 실제로 차별을 많이 받고 있었다.



호인들이 중원으로 이주한 것은 한편으로는 당시 중국이 강성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들에게 새로운 난제를 던졌다. 어떻게 화이의 차별을 유지할 것인가? 당시의 승리는 한인들의 민족자부심을 높여주었을 뿐아니라, 문화자부심까지 탄생하게 하였다. 심지어 신분의 고귀함을 느끼는 외에 '용하변이(用夏變夷, 중화의 문화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는 전통적인 책임감마저 생각지 않는 것같았다. 더더구나 어떻게 정면으로 호인을 '교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생각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바깥에서 중원으로 밀려온 호인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차별적이고 고압적인 수단을 쓰게 된다. 호인의 민족의식이 아직 뚜렷하지 않았을 대, 바로 이런 차별적인 수단은 그들에게 거대한 심리적압박으로 작용했다. 자비심을 느꼈을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동한, 삼국시대의 한족의 차별과 압박은 별론으로 하고, 서진시기에 중원으로 이주한 호인은 한족의 노예가 된 사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진의 문인인 완부(阮孚)는 부친 완함(阮咸)의 비녀 소생이다. 이 비녀가 호인이어서, 완부는 출생후에 그의 고모가 왕연수의 <<노령광전부>>에 나오는 "호인요집어상영(胡人遙集於上楹)"이라는 구절에서 따서 그의 자를 "요집"으로 지어준다. 진나라때 명장인 조적(祖狄)에게 노예가 하나있는데, 이름이 왕안(王安)이고, 갈족( 羯族)이다. 비록 개인의 수양이 있어, 조적이 이 노예를 잘 대해주었고, 그를 북쪽으로 되돌려 보냈다. 다만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서 왕안은 신분이 낮고 지위도 없고, 자유도 없는 인간이었다.
댓글 : 4 개
으흠... 신라방이 만들어진 것도 당의 저런 외국인지정정책 때문이었을까요?
오 당나라시대로 돌아가서 인권운동을 해야하는지
당나라를 다시 만들어서 인권운동을 해야하는지...
당 중앙 정부에서 조차 북방 민족 출신이 많았고 황제도 북방 민족 출신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 장군들중 상당수가 외인들인데.. 이해할 수 없는 소리군요. 송이라면 모를까 당나라의 정복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융화정책은 필요했을 텐데요..
인종차별은 아시아가 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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