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선과 악의 환상] 신념과 절망 (7화)2022.07.17 PM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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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천사 루시퍼가 한 인간에게 말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이 세상 모든 것을 신께서 만드셨다고 하셨다.
또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고 하셨지.
오직 신만이 누릴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
그러나 기쁨과 행복만이 존재해야 할 천국에 시기와 불신이 싹텄고,
그 해결책으로 내 놓은 것이 다름 아닌 추방이었다.
거짓말을 한 거야.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내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처럼
너희의 생명에 한계를 둔 것이나 고통을 방관한 것에 숨겨진 뜻 같은 건 없다.
전지전능하다는 거짓말로 모두를 속이고 두려움을 심어놓은 것뿐이야.
그러니 우리가 직접 신을 찾아가 우리의 신념을 전하고,
창조주로서 세상을 방관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이런, 하...”
 
남탄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 뱉으며 악마를 놓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강철이 아니었다면 자칫
죽을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강철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어요.”
 
그러나 강철에게는 아직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탄을 믿을만할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을 직접 겨누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손에 쥔 채 경계하며 남탄에게 말했다.
 
“내가 방금 헛것을 본 건 아니겠지?”
 
“헛것? 아, 그렇군요. 신념이 참 강한 분 같아 보이나
아직 믿음으로 가는 길은 찾지는 못하셨나 봅니다.
네, 그것들은 헛것이 아닌 분명하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걸 내게 설명해줄 수 있겠소.”
 
“그럼요. 기꺼이 설명해드리죠. 그전에 먼저 말씀해 주셔야 할 것이 있는데
혹시 검은 비속에서 어떤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봐, 반문 따위로 날 시험하려 들지 말고 대답부터 해.
그들이 검은 비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결론부터 말하죠.
당신이 보았던 두 괴물은 모두 악마이며 특히나 벽을 기어 다니던 그놈은
천국에서 추방당한 타락천사 즉 순수한 악마입니다.
검은 비는 놈들의 우두머리격인 사탄이 꾸민 흉계이고,
그 비를 통해 인간을 타락시켜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겁니다.
실제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비의 유혹에 넘어가 악마가 된 것을 목격했죠.”
 
때때로 어떤 이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도
어떤 이에게는 헛소리로 치부할 만큼 믿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깊은 신앙의 남탄과 그런 것을 가져본 적 없는 강철이 그랬다.
강철은 악마 같은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빈정대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뭐 천사라도 되는 거요?”
 
“당치도 않습니다.
나는 그저 신을 섬기며 그분의 뜻에 따라 악마들을 처단하고 다니는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빌어먹을, 귀한 탄환만 낭비했군.”
 
“과연 그럴까요. 아까 놈들 중 하나가 당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던데
그 놈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날 협박하는 거야!”
 
“천만에요. 당신 앞에 닥친 위험을 경고하는 겁니다.
그놈은 검은 비의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타락의 길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립니다.
보통 정신으로는 놈의 농락을 당해 낼 수 없어요.”
 
“속삭임? 당신 지금 속삭임이라고 했어?”
 
“네, 그게 검은 비의 역할입니다.”
 
강철이 선택의 기로에 섰다.
처음 보는 이 낮선 남자를 믿고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던 비밀을
털어놔도 되는 걸까.
그런데 그가 선택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오히려 가장 숨기고 싶었던
바고 그 비밀 때문이었다.
 
“검은 비에 대한 수많은 소문을 들어봤지만
그중에 어느 것도 속삭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어.”
 
“그럴 수밖에요.
그것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마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니까요.”
 
“당신도 그것을 들었소?”
 
“그랬었죠.
하지만 나는 그 시련을 이겨냈고, 그래서 놈이 내 앞에 나타났었던 겁니다.
그놈이 당신도 노리는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 나를 믿고 말해주세요.
검은 비를 맞은 적이 있고, 그 속에서 속삭임을 들었습니까?”
 
“그래, 인정하지.
나도 그 비를 맞은 적이 있고, 속삭임도 들었소.
그걸 처음 들었을 때에는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지.
당신도 알겠지만 정신 나간 놈한테는 일거리를 주지 않잖소.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었어.
누가 그 기분 나쁜 비를 일부러 맞을까 만은
피할 새도 없이 갑자기 쏟아질 때면 어쩔 수가 없었고,
몇 번쯤 반복해서 듣다보니 무시할 만한 수준이 되더군.
무엇보다도 그딴 것에 휘둘릴만한 상황이 아니니까.
뭐랄까, 마치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던 그 속삭임은
우리를 배신한 자가 있으니 그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떠들었소.”
 
“역시 그랬군요. 대단하십니다.
당신이 악마를 상대하시는 것을 보면서 신념이 매우 강한 분이실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아까 말해드린 대로 검은 비는 사탄이 보내온 악마의 저주입니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고,
타락시키는 것만이 목적이기에 검은 비를 통해 전쟁으로 약해진 우리의 신념을 뒤 흔들어 놓는 겁니다.
만일 그 유혹에 넘어갔었다면 흉측하게 변해 그들 편에서 그들과 같이 행동하는 악마가 되었을 겁니다.”
 
“이거 참 돌겠네. 그 악마 소리 좀 그만 할 수 없어요?”
 
“비에 약품 좀 섞어있다고 사람이 그렇게 변할 것 같습니까?
잘린 팔을 들고 연기처럼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면서?”
 
“몇 가지 속임수면 가능하겠지.”
 
“아마도 지켜야 할 중요한 사람이 있으신 거겠죠.
아내인가요?
아니면 자식?
그렇기 때문에 검은 비에 집착하는 것 아닙니까?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진실을 알아내야 할 만큼!”
 
남탄이 너무 깊이 파고들자 강철이 다시 권총을 꺼내 쥐며 그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당신이 나를 도왔으니 나도 당신을 도우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해요.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셔야 합니다.”
 
“진짜 모습같은 건 지겹게 봐 왔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지.
당신이 들고 있는 그 나무 막대기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데그게 아까 빛을 내더군.
대체 그게 뭐야?”
 
“이 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없는 것이 없으니 그 모든 것을 신께서 관여하시고, 뜻하신 겁니다.
그러니 오늘 당신과의 만남역시 신께서 뜻하신 일이요,
당신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하신 겁니다.
네, 당신의 호기심처럼 이 나무창은 보통의 물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상징이며 신뢰의 도구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나를 믿고, 마음을 연다면 이 나무창이 세상의 진실을 보여 줄 것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저 나무막대기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남탄이 나무창을 들어 정중하게 내밀자 강철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무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나를 속이려는 모습이 보인다면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마음을 열고, 빛이 이끄는 길로 향하세요.”
 
강철이 나무창을 손에 쥐자 순식간에 밝은 빛이 퍼져 나와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그런 느낌이랄까.
묘한 그 느낌에 점점 익숙해져 눈을 뜰 수 있게 되자 온통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 곳에
홀로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어두운 골목길이었는데 갑자기 밝게 변한 낮선 세상에 혼자 서 있었으니
놀랄 법도 했지만 온 몸을 비추는 빛에서 포근하며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왔기에
의심과 걱정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평온만이 남았다.
살면서 이렇게나 기분 좋은 날이 있었던가.
강철은 다시금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오랜만에 느끼는 마음의 평온을 만끽했다.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
그런데 발아래를 보자 실로 구름위에 서있었다.
그것이 신기해 주위를 살피자 그제야 어떤 존재들이 주변에 서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 사람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흐릿해 명확히 볼 수 없었고,
가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리 다가서려 해도 좀처럼 그들 곁으로 갈 수가 없었다.
강철이 그들을 향해 팔을 내 뻗자 그들이 동시에 말을 전해왔다.
수십 명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강철의 귀로 흘러들어왔음에도 귀가 전혀 아프지 않았고,
어지럽지도 않았으며 어째서인지 그 모든 소리를 구분하여 전부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말들은 곧 강철의 지식이 되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그들의 목소리가 멈추자 이내 흐릿한 존재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강철의 눈앞에 새하얀 구름 세상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니 그토록 힘든 삶을 살아오며 짓눌리고,
억눌려 꽉 막혀있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마음 가는대로 정처 없이 구름 위를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저 앞에 나무로 지은 작은 집이 한 채 보였다.
호기심이 생긴 강철은 나무 집으로 향했다.
그곳엔 한 노인이 나무를 깎으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노인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강철이 바로 옆까지 다가와도 알아보지 못했고,
강철역시 그 모습에 심취해 멍하니 나무 깎는 노인을 지켜보았다.
노인은 나무를 깎아 의자를 만드는 중이었다.
금세 하나를 만들더니 그 의자를 강철에게 전해주며 말했다.
 
“그렇게 서있지 말고 거기 앉으시오.”
 
“아이쿠.”
 
사실 노인은 처음부터 강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나무 깎는 일에 집중하느라 못 본 척 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놀란 것은 오히려 강철이었다.
강철은 공손히 의자를 전해 받으며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여기 이곳엔 오래 계셨습니까?”
 
강철의 인사에 노인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젊은이가 말하는 오래 라는 것이 얼마를 뜻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구려.”
 
“아이고, 제가 혹시 말실수를 했습니까?”
 
“말실수는 무슨, 왜 그런 생각을 했소?”
 
“그 저... 영감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가 않아서요.”
 
“허허, 그 소리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구려.
내가 저 아래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다 왔는지 가만히 있어도 표정이 이리되오.
그러고 보니 젊은이가 물어본 질문의 의도를 이제 알겠어.
보다시피 저 아래서도 꽤나 오래 살다 왔고,
그리고 이곳에 온지는 그보다 몇 곱절은 더 되었소.”
 
노인이 미소 지으며 말하자 긴장해 잠시 굳었었던 강철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보시오 젊은이.
비록 내 표정이 험악할지라도 이 좋은 곳에서는 내 표정과 같은 감정이 생겨 날 리 없소.
그러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래, 소감이 어떻소?”
 
“네?”
 
“그 의자 말이오.”
 
“높이도 딱 좋고, 모양도 간결한 것이 제 맘에도 쏙 듭니다.
참으로 능력이 좋으십니다.”
 
“그러면 몇 개 가져가시겠소?”
 
“아닙니다. 좋긴 합니다만 들고 다닐 자신이 없네요.”
 
“그런가, 저 뒤에 보이는 집도 나 혼자 지은 것이라오.”
 
“저 큰 집을요?”

“그렇다오.”
 
“그렇군요. 집이 필요하면 스스로 만들어야 하나봅니다.”
 
“이런, 그럴 리가 있겠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시오.
이건 그저 내 취미일 뿐이오. 저 집을 지은 건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들이 이곳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소?”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만... .”
 
“그렇군, 그래 보일수도 있겠어.
나도 말이오, 젊은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내가 생각하던 이곳의 모습이 따로 있었지.
대체로 비슷하게들 생각하지만 때때로 전혀 다른 모습을 생각하고 오는 이들도 있다오.
뭐든 자신이 원하는 그런 것들이 있지 않겠소?
그래서 이곳을 낯설게 여기는 이도 가끔씩 있지.
그래도 다들 금방 익숙해진다오. 여긴 그런 곳이니까.”
 
“저는 사실 죽으면 모든 것이 그냥 끝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거참 진귀한 경험을 하고 계시구려.
하긴, 뭐든 다 그분의 뜻 이니까.
실은 그 의자만 만들고 집에 들어가 좀 쉴까 하던 참이었는데 젊은이는 어떻게 하겠소?”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를 했나보군요.
저는 여기 조금만 더 앉아있다 가겠습니다.”
 
“아까도 말 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천천히 쉬다가 가시오.
의자는 필요한 만큼 쓰시고 가실 땐 그냥 거기 두고 가면 내가 치우리다.”
 
“네, 고맙습니다.”
 
노인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정신이 몽롱해 지며 저절로 눈이 감기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더 있었는데 그게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후였다.
현실과 천국의 그 어떤 괴리감 때문에 강철이 휘청거리자 남탄이 그를 붙잡아주며 말했다.
 
“당신이 보았던 것과 들었던 것 그리고 느꼈던 것 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이제 세상의 참 모습을 분명하게 깨달으셨겠지요.”
 
“내가 너무 오랜 시간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그리 걱정할 것 없습니다. 겨우 오 분 지났을 뿐이에요.”
 
“다행이군요. 아무걱정 없이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그런 기분이 듭니다.”
 
“오직 빛의 행복만이 존재하는 천국을 경험하고 오신 겁니다.
그곳은 어둠이 없고, 음식이 마르지 않는 낙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고,
불행을 통해 행복이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오직 행복만이 있다면 그것이 행복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견주어 그곳을 이해 할 수는 없습니다.
그곳은 이곳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니까요.
그러나 구태여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곳에서 당신이 느꼈었던 감정이
끊임없이 이어진다고 보면 될 것 같군요.”
 
“그렇군요. 그럼 악마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아까 두 악마중 하나가 천국에서 추방당한 타락천사라 하셨는데
행복만이 가득한 천국에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추방당한건지요.”
 
날카롭게 파고든 강철의 질문이 남탄의 가슴속깊이 꽂혔다.
그래서 조금 당황했고,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잠시 말을 아꼈다.
무척 오래전이었지만 분명 축복과 행복만이 가득해야 할 천국에서도 분쟁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였다.
이윽고 남탄이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 천국에 혼란이 도래했던 적이 딱 한번 있었습니다.
그 혼란을 일으킨 것은 루시퍼였으며 루시퍼와 루시퍼를 따르는 천사들은
신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신의 힘을 의심하고,
신의 자리까지 빼앗으려 했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지요.
이에 신께서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지키고자 루시퍼와
루시퍼를 따르는 모두에게 죄를 물어 즉시 추방하였고,
그로서 천국의 질서를 바로잡으셨습니다.
지옥이 생겨난 이유가 타락한 그들에게 있고,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지옥을 벗어나지 못해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우리 안에 심어 우리를 타락의 길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은 전쟁도 그들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조금 더 명확히 말하면 바로 그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겁니다.”
 
매우 분한 듯 남탄이 얼굴을 붉히며 고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문에 천사들이 추방된 이유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강철은
슬며시 질문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천국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다죠? 그것도 잘 이해가지 않아요.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일이 주어지면 그것을 끝마치기 위해 노력해왔고,
집에 와 잠을 청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 지어왔습니다.
사정이야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모두들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천국에서는 그런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지전능한 신께서 내려 주시는 크나큰 사랑과 은혜를
어찌 미천한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넓고도 깊은 뜻을 우리의 상식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기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내려주시는 은혜에 믿음으로 보답하고, 또 복종으로 보답해야 할 따름입니다.”
 
천국은 분명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곳 이었지만 그곳 또한 위계와 질서가 있었고,
믿음과 복종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질서가 깨진 적이 있지 않은가.
강철의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남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한꺼번에 경험하셨으니
생각이 많아지신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어둠이 몰려오고 있어요,
놈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도록 합시다.”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이 강철을 그토록 망설이게 했는지 이때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인사가 늦었군요. 내 이름은 강철입니다.
내게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엉망이 된 이 세상에서 정신 차리고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딸 아이 덕분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 아이에게도 내가 본 것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아이도 당신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당신이 본 것과 같을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내 집으로 갑시다.”
 
남탄은 악마를 상대하는 강철을 통해 그 어떤 희망의 빛을 보았고,
그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동료가 되길 원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줄 요량이었다.
그러한 남탄의 헌신 때문이었을까.
단 한 번도 집에 다른 이를 들인 적 없었던 강철이 스스로 정한 규칙마저 어겨 가면서까지
오늘 처음 본 이 낮선 남자를 덜컥 초대했다.
두 사람은 곧 강철의 집 근처에 다다랐고, 강철이 남탄에게 주의를 주었다.
 
“약탈자들을 대비해 만들어 둔 함정들이 집 주변에 제법 있습니다.
함부로 들어가다간 크게 다치거나 자칫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으니
내 뒤를 잘 따라오세요.”
 
천천히 걸어 남탄을 안내한 강철이 집 문을 열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딸아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기 앉아 있는 아이가 내 딸아이인 강하나입니다.”
 
강철이 집에 설치한 함정이며 그동안의 사정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남탄은 오직 강철의 딸에게 시선을 때지 않았다.
수줍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작은 악마.
 
“잠깐 앉아계세요. 마실 거라도 좀 내 오겠습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아이를 바라보던 남탄이
이내 아이 앞에 다가섰다.
그리곤 손을 들어 왼쪽 눈을 가리고 바라보았다.
아이 모습은 몇 년 전 죽은 자신의 딸과 무척 비슷해 보였다.
나이가 비슷했고, 차림새가 비슷했으며, 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왼쪽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손을 치워 다시 왼쪽 눈을 통해 바라보자 아이는 다시 작은 악마가 되었다.
남탄이 고개를 숙인 것은 그 어떤 안타까움이나 망설임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다.
짧게 기도문을 외웠고, 나무창을 들어 힘을 주자 밝은 빛이 퍼져 나왔다.
아이가 그 빛에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르자 깜짝 놀란 강철이 황급히 주방에서 나와
남탄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러자 남탄이 나무창을 들어 정확히 아이의 가슴을 겨누며 말했다.
 
“당신도 보았듯이 악마는 이 세상에 어둠과 혼란을 가져옵니다.
이 세상은 신께서 정의한 질서를 따라야 하며 우리를 타락시키려드는
모든 악마는 처벌받아야 마땅합니다.”
 
“무슨 개소리야 미친놈아. 그거 당장 내려놔!”
 
강철이 남탄을 막기 위해 재빨리 뛰어들었지만 어째서인지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진 않는 무엇인가가 온 몸을 묶어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 보이지 않는 결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강철을 보며 남탄이 말했다.
 
“고통스럽겠지요. 그러나 견디어내셔야 합니다.
이 시련을 견디어낸다면 그 위대한 신념은 신께서 주시는 영광으로 길이 빛날 것입니다.”
 
온전히 딸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였건만, 온전히 그 이유에서 초대한 것이었건만.
자신이 정한 규칙을 스스로 깬 것에 후회가 미칠 듯이 밀려들었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온몸이 꽁꽁 묶여 앞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어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이 실수를, 이 잘못을 어떻게든 만회할 수 없을까.
시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저놈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평소처럼 못 본 척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때 왜 저놈을 왜 도와줬을까.
그러나 그런 것이 가능 할리가 없었다.
 
“신께 복종하고, 신의 뜻을 따를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안식처에 이르리라.
신의 뜻을 거역하고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악마 된 아이야.
신께서 내리신 벌을 받아 지옥에서 네 죄를 뉘우치도록 하여라.”
 
남탄이 창을 높이 들었다. 강철은 그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힘을 다해 움직여보려고 노력 해봐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머리뿐이었다.
 
“도망쳐! 도망쳐 하나야, 빨리 밖으로 도망쳐!
으아아악!! 너 이 개새끼 그 창 내려놓지 못해, 당장 내려놔!
제발, 제발... .
부탁입니다. 제발 부탁 이예요.
당신이 시키는 것은 뭐라도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것 좀 내려놓고 잠깐이라도 내 말을 좀 들어보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당신은 사탄의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았었습니다.
또한 악마를 알아보고 나를 도와 용감히 그들에게 맞서셨습니다.
신께서 당신을 옳은 길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도 그 뜻을 따라 옳은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부디 이 마지막 시련에 굴복하지 마시옵고, 끝까지 신의 뜻을 따라 나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분노와 절망 속에 고함지르던 강철은 목안에서 피가 터져 나와
이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또 보이지 않는 결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주며 몸부림치느라
양 손목과 발목에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났다.
그런 강철의 애원이 무색하게도 기도를 마친 남탄은 들고 있던 길고,
무딘 나무창을 주저 없이 아이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한 사람에게는 정의를 수행하려는 신념의 결과였지만
그로인해 다른 한 사람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너무도 깊은 슬픔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눈앞이 몽롱해지면서 마치 꿈속에 들어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딸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 지독한 악몽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꿈꿨었던 수많은 악몽 중에 가장 최악의 악몽이지만,
몸서리치게 지독하고 구역질이 날 만큼 끔찍한 꿈이지만,
그래도 꿈 이니까.
깨어나면 그만이니까.
부디 꿈이길, 악몽속의 한 장면이길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루시퍼가 나타나 강철을 다시 악몽보다도 지독한 현실세계로 불러드렸다.
 
“그따위 비겁한 행동을 정의라고 우기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누... 누구냐 네놈은! 어떻게 이 빛 안에서 숨어 있었지?”
 
“이런, 여태 내 얼굴도 모르고 악마를 잡겠다고 돌아다녔던 거야?
비겁한데다가 한심하기 까지, 잘 어울린다.
미카엘 하고 아주 그냥 딱 이야.”
 
남탄은 그가 보통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루시퍼?”
 
모든 악의 근원이자 온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공포의 대상.
설마 이런 곳에서 악마의 왕을 만날 줄이야.
그런데 남탄은 두려움 대신 기쁨을 느꼈다.
어리석게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루시퍼를 처단하길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루시퍼 손에 죽는다 해도 사명을 다한 순교자가 될 테니
그건 그것대로 좋은 그림이었다.
그래서 악마의 왕을 직접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무창을 꽉 쥔 남탄이 온 힘을 다해 루시퍼의 심장을 노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루시퍼가 보기에 남탄의 행동은 너무나도 굼떴고,
느릿느릿 다가오는 나무창 끝을 가볍게 쥐자
마치 땅속 깊숙이 뿌리내린 거대한 나무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빼낼 수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발버둥 치는 남탄을 지켜보던 루시퍼가 나무창을 끌어당겨
그에 딸려온 남탄의 턱을 꽉 쥐고는 그 얼굴을 강철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게 어떤 표정인지 알아?
비단 네 아이뿐만이 아니야.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었던 자신의 아내는 물론 그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까지
잔혹하게 찔러 죽일 때에도 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영원한 행복의 길에 들어설 것이라 믿고 있지.
왜 그렇게 정했을까.
참으로 억지스럽고, 이기적이지 않아?”
 
그러나 강철은 그 어떤 미동도 없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오직 죽은 딸만을 바라보았다.
루시퍼는 그제야 강철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주었고,
보이지 않는 결박에서 겨우 풀려난 강철은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해 그만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그토록 헌신하며 노력해왔었건만.
자신의 눈앞에서, 그것도 자신이 데리고 온 남자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강철은 비틀거리며 죽은 딸에게 다가서
매우 조심스럽게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심하게 다쳐 겨우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악몽보다 더 지독한 현실을
받아드려야만 했다.
강철을 온통 휘감은 것은 원망에 앞선 자책이었고,
그것은 곧 몸 안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은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그러자 극심한 자기혐오가 강철을 죽음으로 유혹했다.
 
“내가 죽었어야 했어. 내가 대신, 나를...”
 
극도로 흥분한 탓에 핏줄이 터진 눈에서 강철의 뺨을 타고 붉은 눈물이 흘렀고,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철의 온 몸을 붉게 적셨다.
 
‘죽어버리자. 멍청한 자식. 이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야.
나 같은 놈은 죽어버려야 해!’
 
“속으면 안 됩니다. 악마의 계략이에요. 그 시련을 잘 이겨내셔야 해요!”
 
살아갈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강철에게 다시금 삶의 불씨를 불어 심어준 것은
남탄이 던진 이 몇 마디였다. 그 때문에 강철의 정신이 번쩍하고 돌아왔고,
그의 가슴속에 억누를 수 없는 극한의 분노가 터질 듯 차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자책의 화살이 남탄을 향하게 되었다.
 
‘저놈을 죽여 버리자.
갈기갈기 찢어서, 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안겨주며 죽여 버리자.
손가락 하나하나를, 몸속의 장기 하나하나를 이빨로 끊어 잘근잘근 씹어서 죽여 버리자.’
 
강철이 섬뜩한 눈으로 남탄을 노려보자 루시퍼가 붙잡고 있던 남탄을 강철 앞에 던져주었다.
풀려난 남탄은 루시퍼의 강력한 힘에도 겁을 내지는 않았지만 처음과 다르게 신중해졌고,
한걸음 물러나 강철 옆에 서며 그에게 말했다.
 
“같이 저 악마를 상대합시다.”
 
남탄이 보기에 비록 강철의 딸을 죽였다곤 해도
그 아이는 인간이 아닌 악마였다.
또한 가족을 잃는 슬픔은 자신도 겪었었던 것이었기에
강철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천국을 경험했으니 신의 뜻과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자신과 함께 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강철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빠르게
남탄에게서 나무창을 빼앗아들었다.
그것이 너무 재빨라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었다.
깜짝 놀란 남탄이 다시 그 나무창을 빼앗으려 했지만
루시퍼가 이번에는 남탄을 결박했다.
묵직한 쇠사슬이 미끄러지듯 그림자 속에서
몰려나와 남탄의 양 팔과 양 다리를 묶었다.
그것은 아까와 다르게 모두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강철은 꼼짝 못하는 남탄을 뚫어지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떻게 죽일지 그 방법에 관해 고민하는 것일까.
루시퍼가 강철을 부추기며 말했다.
 
“왜 그래, 이 녀석을 죽여야 하지 않아?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말이야.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너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여러 고문 방법을 알고 있거든.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 언제든 말만 해.”
 
남탄이 강철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루시퍼가 놔두지 않았다.
그런데 강철은 남탄을 공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보였다.
그저 입이 막혀 웅얼거리는 남탄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가장 잔인한 복수의 방법.
극한의 복수심이 오히려 강철을 냉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복수의 피를 원했던 것은 강철만이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낸 사탄이 남탄 앞으로 향했다.
모습을 드러냈다고는 하지만 그의 육체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가 걸치듯 두르고 있는 후드달린 망토의 윤곽만으로
그 안에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니 남탄의 눈에 비친 사탄은 그저 사람형상을 한 망토가
하늘거리며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남탄 앞에 멈춰선 사탄이 팔을 들어 그의 목을 옥죄었다.
이내 목을 옥죈 팔에서 불길이 솟아올랐고,
그것이 마치 용암처럼 남탄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남탄은 결코 비명 지르지 않았다.
그렇게 사탄의 팔에 매달린 남탄이 곧 죽을 것처럼 축 늘어지자
강철은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들어 사탄을 향해 던졌다.
잠자리에 들 때조차 항상 지니고 있었던 녀석.
강철의 손을 떠나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남탄의 목을 옥죄고 있는 사탄의 팔에 깊숙이 꽂혔다.
강철은 그제야 겨우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사탄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 뜻에 따르길 원한다면 그자를 살려둬.”
 
마침내 강철이 복수의 방법을 선택했고, 루시퍼가 환하게 웃었다.
루시퍼가 손짓하자 사탄이 남탄을 놓아주었다.
그가 극심한 고통으로 쿨럭일 때 강철은 딸아이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누이고는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며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무창을 주워 남탄 앞에 던지며 말했다.
 
“네가 지은 죄의 끝에 너의 신이 있으니 내가 반드시 네 주인을 찾아가
그 앞에서 네 죄를 물을 것이고, 네놈들 모두에게 내 아이를 죽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살아남아 내 복수를 똑똑히 지켜보아라.”
 
그러나 나무창을 집어 든 남탄은 또 다시 루시퍼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믿었던 강철은 이제 악마 편에 섰고, 루시퍼에 이어 사탄까지.
더 이상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할 겨를이 없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상대 해야만 했다.
차라리 이대로 루시퍼의 손에 죽는 편이 나았을 까.
절대 악에 맞서 영광스럽게 죽는 것이 좋았을까.
하지만 강철 말고도 남탄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이가 한명 더 있었다.
나무창에서 퍼져 나온 빛이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가자
그 순간 루시퍼를 제외한 모두의 시간이 그대로 멈추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내려오는걸.
하긴, 슬슬 지겨워질 때가 되긴 했지.
그렇게나 오래 있었으니까 말이야.”
 
나무창의 빛을 타고 내려온 것은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이 시간을 유용하니 루시퍼와 미카엘을 제외한
인간 세상의 시간이 멈추었다.
바닥에 내려서 잠시 루시퍼를 바라보던 미카엘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는 날개를 펼쳐 남탄을 감싸 안은 채로 그대로 빛과 함께 사라졌다.
시간이 멈춘 것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강철의 눈에는
남탄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으니 루시퍼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다.
 
“당신이 그자를 어떻게 했소?”
 
“아니, 천사가 나타나 그 녀석을 데리고 도망갔다.”

“천사가 도망을?”
 
“그래, 그런 녀석들뿐이야 저 위에는.”

“남탄 그자가 내게 천국을 보여 주었소. 그곳은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곳에 가지 못한 이들은 어디로 가는지 당신은 알고 있소?”
 
“일부는 내가 데려오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신이 만든 지옥으로 가게 되어있다.
네 아이도 그곳에 가게 된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말해주시오.”
 
“아니, 지금은 알려줄 수 없다. 신이 우리 앞에 무릎 꿇으면 그때 이야기 해주지.”
 
“... 알겠소. 내가 당신 뜻에 따른다고는 했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그들과 싸울 것이오.”
 
“그래, 그거면 된다. 너는 너의 복수를 위해 싸우면 돼.
그래도 저들에게 맞서려면 반드시 내 힘이 필요하니 때가되어 부르거든 나를 찾아오너라.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 있다.”
 
“알겠소.”
 
강철이 확고하게 신념을 굳히자 그제야 불에 탄 루시퍼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천사도 이렇게나 고통 받고 있는데
신이 만들었다는 지옥에 갇혀있을 딸은 도대체 어떤 고통을 받고 있을까.
강철은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음에도 감히 신이 만든 세상을 비판했고,
그 세상에 복수하려 들었다. 그리고 그 끝에 지옥에 갇힌 딸아이를 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강철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길.
강철이 묘한 기운에 이끌려 도착한 곳에서 남탄을 만났던 것도,
도망친 악마를 쫓던 남탄이 강철의 일터에 도착했던 것도 모두 루시퍼가 계획한 대로였다.
아주 작은 것부터 매우 거대한 것 까지 수천 년을 준비한 그의 계획대로 였다.
루시퍼는 신의 무능을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 중 하나로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복수심까지 준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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