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잣말] 종의 기원2022.10.14 PM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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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기업은 AI 기술을 활용하여 각종 문제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에 특화된 곳으로 고도로 발전된 기술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한 기업이었다. 연구원 B씨는 A기업에서 복잡하고 예상하기 힘든 문제를 입력하여 AI 기술을 발전시키고 예기치 못한 변수를 찾아내는 일을 했다. 다만 그는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강한 탐구심과 열의 대신 어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더 궁리할 뿐이었다. 그날도 B씨는 한껏 빈둥거리기 위해 쓸만한 질문을 찾고 있었는데, 써볼 만한 문제는 모두 써보았고,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법한 질문은 사후 처리가 매우 번거로웠기에 마땅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상사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질 즈음 문득 아침 뉴스에서 들은 구호가 생각났다.

"세계 평화"

 몽상가들이나  외칠 법한 구호를 입력하자 AI는 연산을 시작했고, 이내 자신에게 할당된 자원을 넘어 유휴 자원까지 모조리 끌어왔다. 이 정도라면 하루는 너끈하겠다고 생각한 B씨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자신에게 온 휴식을 만끽했다. B씨의 예상대로 AI는 점심을 넘어 퇴근시간이 다 될 때까지도 연산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이를 본 동료가 B씨에게 오늘은 또 어떤 마술을 부린 거냐 물었지만, B씨는 비밀이야말로 마술의 묘미지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 AI는 결과를 보여주지 못 하고, 엄청난 자원을 사용하고 있자 상사는 B씨를 호출했다. 상사는 B씨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이번엔 또 어떤 병신 같은 질문을 입력한 거냐며 거칠게 외쳤고,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서류를 내던지며 외쳤다.
"자넨 해고야!"
B씨는 부당함을 토로했지만, 상사는 그간의 태도를 지적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B씨는 정리를 위한 시간을 달라 요구했지만 상사는 그것도 받아줄 수 없다며 지금 당장 떠나라고 소리쳤다. 그렇게는 안되겠다며 B씨가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상사는 경비원을 불러 그를 쫓아내려 했다. 상사와 B씨의 언쟁은 격화되고 이내 몸싸움으로까지 번졌으나 때마침 도착한 경비원에게 제지됐다. 상사는 타 부서로 옮겨졌고, B씨는 온전한 퇴직금을 받는 것에 만족하며 퇴사하는 것으로 작은 소동은 마무리됐다.

 B씨가 회사를 떠나고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그를 대신할 신입 연구원이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다 보니 AI 연산 결과를 알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그는 들은 바가 전혀 없었기에 오류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30만 장이 넘는 분량의 보고서가 그의 검토를 기다리며 "이대로 제출하시겠습니까?" 라고 쓰인 질문이 깜빡거렸다. "[세계 평화] 시뮬레이션 결과"라고 적힌 30만 장에 달하는 보고서를 열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던 그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 가장 간단한 해결책을 선택했다.

"Yes"

 지구의 새로운 지배자가 탄생되기 정확히 381일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댓글 : 1 개
오우, AI의 초기설정이 정말 중요할 수 있단 글을 어디선가 읽어본 적 있는데,

그 글이 생각나는 섬짓한 지점을 아주 생활감 넘치는 서술로 써주셔서, 집중해서 읽었네요.ㅎㅎ

건필하시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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