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거울(Zerkalo, 1975) 2014.06.16 AM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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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는 난해하게 쓰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데....
솔라리스와 거울 두 영화를 모두 보신 분이라면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네요.



솔라리스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감독을 만난 후 두 번째로 보게 된 그의 영화 거울.
거울은 그의 기억 그 자체의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야 솔라리스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부재,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타르코프스키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거울에서는 시인인 아버지가 자신의 시를 낭송한다.'

나는 그저 전율하게 만들었던 온기의 비가 내리는 집 안, 아버지를 바라보고 화해하는 솔라리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집'이라는 형태가 인간 내면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으며, 온기의 비가 내리는 집안을 들여다보는 캘빈의 모습을 서로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서로의 관계가 무너진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아버지의 내면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들이 아버지의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제는 말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당신과 소통하겠다는 자기 고백이요, 그렇게 하리라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자신의 내면과의 화해요, 극복이고, 완성인 것으로 보인다. 거울 역시도 그런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

영화는 주인공의 아들인(주인공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이그나트가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며 시작한다. 마침내 나온 채널에는 말을 더듬는 타르코프 출신의 청년 자라 유리가 나오고, 최면술사는 그의 증상을 치료한다. 마침내 그는 똑똑히 말한다. "나는 말할 수 있다."

영화는 마치 꿈처럼 시간을 유영한다. 주인공의 어머니와 아내는 동일인물이 연기하여 같은 사람처럼 보이고, 흑백과 컬러로 나누어진 장면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관객을 혼란시키며 등장인물들 역시 계속해서 시간을 흐트려놓는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보다는 시간을 관통하는 '무엇'일 것이다.

'거울에서는 어머니가 실제로 영화에 등장한다.'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유년 기억 그 자체이므로 주인공 역시 아버지는 떠나간 상태이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만 남편이 보인다는 대사처럼 따라서 아버지의 이야기는 파편적이고, 교정일을 하던 이야기처럼 어머니의 이야기는 좀 더 구체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부재는 더욱 더 두드러진다. 주인공은 어머니 의존적인 인간이며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주었던 모든 희생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고 보답하고 싶지만, 이 모든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망치고 싶어지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다. 그 것은 아내와 어머니가 닮아 있다는 것으로도 설명된다. 얼마 전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어머니 의존적인 아들은 감성적인 인간으로 자라난다. 이런 경우 대개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주인공 역시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 것은 타르코프스키 본인의 아버지와 어머니, 솔라리스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남자 캘빈과 그의 아내 하리, 영화 속에서 떠나버린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와도 닮아있다. 영화는 동일인인 아내와 어머니 두 사람을 매개로 하여 삼대의 남자들이 실제로 서로 같은 것을 보아왔고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삼대의 남자들이 모두 고통의 가학자이며 피학자 즉, 같은 인간이므로, 시간은 영화 속에서 무시되고 서로 혼합된듯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거울은 다양한 의미로 존재하지만, 주인공 자신이 거울이라면 떠나버린 아버지와 홀로 남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신이 한 쪽, 반대편에는 떠나가는 아버지(자신), 홀로 남은 아내, 그리고 아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데칼코마니가 되어 존재한다. 이 것은 어떻게 보면 또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적인 양상에서, 아들에게서 또 그의 아들에게로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게 되고마는 아버지란 이름의 불멸성이기도 하다. 타르코프스키가 잉마르 베리만을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생각했다는 것에는 영화 산딸기에서 보이는 이런 불멸성과 화해의 제스쳐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개인의 기억과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불멸성을 개인의 것으로만 남겨두려 하지 않고 세계에 확대시키려고 한다. 그 것은 아들과 그 아들에게로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기억이, 세계로 보면 세대가 그 다음 세대에 남겨주는 역사와 같으며 잘못된 것은 극복되어야 하고 그 것은 마음과 마음의 소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이다. 세계 안에서 고통스러운 결과를 되풀이 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가학자이며 다시 피학자이므로 자신에게 가하는 형벌과 다름없다.

거울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 그리고 성찰을 상징해왔다. 타르코프 출신 자라 유리라는 청년은 주인공의 아들 이그나트와 생김새가 닮아있다. 첫 장면, 다양한 거울을 대신하여 브라운관 안쪽에 보이는 것이 이그나트이자 타르코프스키의 또다른 자아라면 이제는 개인의 가장 중요한 기억이 주었던 무력감(말더듬이 상태), 또는 방황하는 인류의 역사에 대한 무력감을 극복하여 이제는 말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은 아닐까.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란 존재의 불멸성, 대항할 수 없었던(말할 수 없었던) 무력감의 극복.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통해 보는 우리가 역사를 위해 남겨주어야 할 소통과 유산
★★★★★


댓글 : 2 개
전 언제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를 보게 될까요.
이런건 진짜 딱 하루 맘잡고 봐야되는데.
저는 얼마 전까지 타르코프스키라는 감독이 있는줄도 몰랐어요. 이 감독에 이르게 된게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였죠. 그리고 솔라리스 한 편 본 것 뿐인데 완전 매료되어 버렸네요. 오늘은 책도 몇 권, 논문도 몇 편 찾아읽어보기도 하고 그랬네요. 어느 날 갑자기 끌리는 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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