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기] 바랄 수 없었기에, 더욱, 그리웠던 - 내 여행 이야기 -2012.07.01 PM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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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이것은 일종의 말하기 어려운 만남이다.
그녀는 항상 수줍음에 고개를 숙였고,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설 용기가 없다.
그녀는 돌아서서 떠났다.

영화 '화양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지나간 것이 아니, 지나간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증오로
또 어떤 이에게는 그리움과 사랑으로.

그것은 사람마다의 문제이므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 말할 수는 없다.

나의 소중한 벗이
내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너는 아직도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지금부터 쓰는 내 여행기는
아마도 집착과 그리움, 후회로 가득한 이야기일 것이다.




1. 집착

* 나는 비행기를 싫어한다.
하늘 위로 지나간다는 그 느낌까지는 좋지만
오래 비행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귀의 통증이 싫어서이다.
한참을 먹먹한 느낌으로 소리도 잘 안들리는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고역이다.

그녀는 비행기를 타 본적이 없다고 했었다.
아무리 귀가 아파도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좋아한다면
이 정도의 짜증은 아무렇지도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시엠립에 내렸다.


* 시엠립은 관광도시라 외국인의 방문이 잦고
한국 교민들도 꽤나 많이 와 있다.
어디를 가나 사업할만한 것이 있을지를 보는 것이 습관이므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이곳에 필요한 것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아니지,나는 다른 곳에 먼저 가게를 열어야지' 하며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접는다.

언제부터인지 머릿속에 항상
그녀가 있는 곳에서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의식적으로 떠올라
다른 구상들을 가로막아 버린다.

애초에 그래야 할 이유도 없는데
아직도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니...
그저 헛웃음만이 나왔다.


*앙코르 왓은 설계 구상과 건축과정, 공기(工期) 등이
그 시대의 기술력이나 동원가능한 인력으로 볼 때
도저히 완공이 불가능한 도시이자 단일 건축물으로
얼핏 보기엔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유적이다.

그녀를 두 번째 봤을 때를 기억했다.
두 번 째 봤을 때의 그녀는
급하게 오느라 별다른 준비조차 없었다고 한다.

얼핏 보기엔 다른 이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그저 한 명의 소녀같은 여성이었겠지만
내게 다가왔던 그 푸르고 신선한 에너지를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때의 뛰었던 가슴은
아직도 내게는 기억 속에 살아숨쉬는 놀라움이다.

그녀를 보면 볼 수록 흔들렸던 내 마음.

그녀를 보기 이전엔
그토록 사람을 깐깐하고 차갑게 보던 나였는데.


*캄보디아는 4~5월이 가장 더운 시기라
다행히 못 움직일 정도로 덥지는 않다만
시기상으로 지금이 우기이다.

돌아다닐 때는 비가 안 왔지만
호텔에 도착하여 해가 지니
타이밍 좋게 비가 내린다.

스콜을 경험해 본 것은 처음이라
자연스럽게 비를 보러 홀로 바깥에 나갔다.

번개와 천둥이 내게 인사를 했다.
담배에 불을 붙여 화답을 했다.

그녀는 천둥을 무서워한다고 했었다.
사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정말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만약 천둥치는 날,
그 사람이 내게 천둥이 무섭다고 했다면
그냥 아무 소리 않고 한 걸음에 그리로 가서
그녀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꼭 안아주었면 좋겠다는
소망만이 머리 한 구석에 남아있다.

여기 천둥은 내리는 비의 스케일답지않게
너무도 소리가 작다.

'이 정도면 그 애도 무서워 않겠지.'
부질없는 바램과 너무도 작은 천둥소리 때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거기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인
말 없이 내뿜은 담배연기만 바라보는 일로 비오는 밤이 점점 지나간다.

* 캄보디아 맛사지가 돈 값을 한다고 해서
전신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맛사지 해 주는 여인네가 손을 풀어주려고 깍지를 꼈다.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손 맛사지를 받고 있었는데
그 깍지에 나도 모르게 또 그녀 생각이 나버렸다.
뭉툭하고 땀 많은 내 손 위로 살포시 깍지를 꼈던
따뜻하고 정 많던 그 손.

이런 때에도 그 사람을 추억하는
내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몹쓸 내 기억력...

차를 마시고 나오며
내내 씁쓸한 기분이었다.



2. 이루지 못함을 씁쓸해하다

*베트남의 하롱 만(灣)은
굳이 세계 최고의 절경임을 모르고 가도 아름답다.
배를 타고 가며 수상시장에서 먹거리를 고르고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바윗조각들을 보며
파도 없는 잔잔한 물길을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왜 이곳이 그리도 인기 많은 곳인지 절로 알게 된다.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하나의 그림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같이 바라보고 싶었지만
나는 혼자다.

그녀는 혼자서 누굴 오랫동안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사랑에 빠질 수록 혼자가 되라.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내가 좋아하는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했던 말이다.
사랑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일과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자신과 연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나는 그것이 참 사랑이라 생각했다.
나를 송두리째 던지고 싶었던 충동을 애써 억제하며.

하지만 혼자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기에는
그녀는 너무도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여인이다.
게다가 그녀의 아픔으로 인해 외로움을 견디기가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온 지 하루만에 날 떠났다.
아직도 후회하는 것은
설마 그렇게 그녀가 떠나버리리라 생각치도 못한 내 어리석음이다.

그녀는 나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매일매일 가까이서 그녀의 외로움과 아픔을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치도 않고
그저 그녀가 내게 온다고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덥썩 허락해 버렸다.

난생 처음으로 다가온 놀라운 행운을, 그 대단한 행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도 몰랐다.

조용히 바라보며 조금씩 조금씩
하루하루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정말 사랑했다면
그녀가 뭘 바랬는지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보고 이해했어야 된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기에 더욱 쓸쓸하다.

아직도 못 보여 준 것들,
해주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지금도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는데...

그래, 오히려 그녀가 지금 쓸쓸하지 않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일 아닌가.

나는 조용히 갑판에서
그녀의 이름을 바다에 대고 말했다.
나지막히
몇 번이고.



3. 하노이

*하노이 시내는 무척이나 복잡하고 아기자기하다.
오토바이가 주 교통수단이므로 엄청나게 많은 오토바이의 행렬을 볼 수 있다.
토지분배의 균일화로 인해 성냥갑처럼 가로면적이 좁은 건물들을 지나가고 있자면
마치 내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마저 느껴지는 이국적인 곳이다.

'그 사람이 같이 이걸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텐데...'
그런 생각이 또 내 머릿속에 절로 들게 되어
거리를 걷던 발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나는 그녀에게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것을 해줄수 있으리라 믿었었다.
허나 그런 생각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라도 그러하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키스하고,서로를 맛보고,마음을 나누는 그러한 것들.
그런 것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세상에서 제일 특별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소망하듯 다른 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것이다.

*호치민 묘소가 있는 바딘 광장은
흔히 볼 수 있는 소련식 건축물이라기엔
조금은 더 정감있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은 멋진 사람이었다.
인정있고 어진 사람이었음을 그의 일화에서 항상 느낄 수 있다.

그는 치열한 내전이 끝나고
그와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을 몰살시키지 않았다.

물론 재판 없이 죽어간 남베트남의 권력자 및 유지들에 대해선 할 말이 없지만

6.25와 비교해서 모자람이 없던 그 엄청난 내전에서도
그는 비교적 관용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본다.

나는 과연 미워하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관대할 수 있었는가?

그저 한없이 모자람만을 느꼈다.


4. 그녀, 그리고 여행의 여운

* 노이바이 국제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여러 생각을 했다.
그녀는 언젠가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며 화를 냈다.
당시에는 너무도 야속했다.
나는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도대체 왜 자꾸 하나씩 버려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가 나에게 오기 전처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이후도 계속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욕이었다.
그녀가 했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다시 내가 아닌 다른 자리로 돌아갔는데
나는 그제서야 더욱 그녀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고,
더 알고 싶었고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었다.

허나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부담'이란 단어 하나로 압축되어
그녀에게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내 어리석은 자신감은
설마 그런 것들이 그녀에게
그렇게 비추어질 리가 있는가 하는
교만함에 빠져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스친 인연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저 지켜보는 사람일 뿐인데.

욕심을 버리는 것은 언제나와 같이 어렵다.




◎ 프롤로그

누군가가 말했다.
여행의 여운이 사라질 때가
그 여행의 끝이라고.

나는 알았다.

내 기나긴 집착의 여행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음을.

어떤 종착지가 나를 기다릴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이러한 것들이
그 사람에게 짜증나고 귀찮은 일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연애 경험이 많은 친구는
여자가 얼마나 냉정한 동물인지를 내게 설명하려 애쓴다.
돌아서면 끝이라고.

그 이야기를 모를 리가 있겠나.

하지만 여자는 그래야 새 사랑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의 사랑에 너무도 외롭고 괴로울테니.

여행에서 좋은 것을 가져오고자 했던
내 바램은, 어쩌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나는 또 그렇게 집착하고 괴로워 할지언정
또 내일을 맞이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것이며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할텐데.

화양연화의 주인공이던 양조위의
씁쓸하면서도 아련했던 표정이 떠오른다.

지금 나도 그런 표정을 지으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 않을런지 모르겠다.

누군가 괴로워하는 이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부디 힘을 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 남짓한 시간밖에는 인연이 없었지만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렇게 잊지 못하고 그리는 사람도 있으니
부디 헤어짐의 고통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났으면.

그런 사람도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다음에는 더욱 사랑하기 위해 애씀을.

댓글 : 4 개
뭉툭하고 땀 많은 내 손 위로 살포시 깍지를 꼈던
따뜻하고 정 많던 그 손...

좋은 여행이었군요 ^^
keep_Going // 그런가요? 전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기분이네요.^^
앙코르와트를 갔다니;; ㅠㅠ

호치민 이사람도 참 존경스런 인물이죠

좋은데 갔다왔나봐요 형.. 부럽당..
버섯먹는마리오 // 어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뭘 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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