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러 리뷰] 곡성 리뷰 - 현혹되어 혼돈 속으로 빠지다. 2016.05.24 AM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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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哭聲, THE WAILING, 2016) - 현혹되어 혼돈 속으로 빠지다.


*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6년 만에 나홍진 감독의 신작이 개봉했습니다. 나홍진 감독 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관객에게 특유의 불편함을 선사하는 점입니다. <추격자>와 <황해>는 추격 스릴러로서 형용할 수 없는 서스펜스를 제공했고 우리는 그 이상의 불편함을 목도했죠. 과도한 폭력과 주어진 비극 앞에 관객은 무력감을 느끼고 정신소모를 겪었습니다. 치밀하고 뛰어나게 연출된 영화에 평론가나 마니아는 환호성을 보냈죠. 그는 2편의 영화로 스릴러의 장인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곡성>은 그런 나홍진 감독이 6년에 걸쳐 창조해낸 기이한 걸작입니다.

범죄 스릴러 장르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나홍진은 전혀 다른 장르를 선택하게 됩니다. 무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오컬트 호러를 선택한 것입니다. 게다가 직접적인 폭력 묘사가 넘쳐났던 전작들과 달리 15세 등급에 맞춘 연출 방향을 잡았다는 점입니다. <곡성>을 본 상당수의 관객이 SNS 등지에서 이 영화의 등급이 왜 15세냐며 불만을 보였죠.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일단은 영화 내에서 직접적인 폭력 묘사는 확실히 적은 편입니다. 공포나 스릴, 서스펜스 등의 감정은 객관적으로 등급을 매기기는 어려우니까요.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호러 영화의 작법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깜짝 놀라게 만드는 점프 스케어 기법이나 호러 장르의 클리셰 등을 활용하거나 비틀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호러 영화를 많이 본 저 같은 사람도 한치 앞도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나아가죠. 장르 적이면서도 관습적인 연출이나 이야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와 지나치게 높은 디테일로 인한 리얼리즘은 관객을 숨도 못 쉬게 만듭니다. 마치 이런 긴장감은 기존의 호러 영화보다 <허트 로커>같은 전쟁 영화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같은 범죄 영화가 주는 숨이 탁 막히는 현장감에 더 가깝습니다. 이는 영화가 주는 매직 리얼리즘에 근거합니다. 현실감 넘치는 상황에 기묘하게 이질적인 오컬트를 넣음으로서 기괴한 공포에 맞서게 되는 것이죠.

게다가 우리는 누가 귀신인지 누가 악마인지 누가 악인이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는 미스터리 속을 헤맵니다. 공포로 떨어야 하는 대상을 특정할 수가 없으니 그 긴장감은 더욱 배가 되죠. 악마나 적그리스도로 해석되는 외지인이나 신적인 존재로 보이는 무명은 그들이 선인지 악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런 선악개념을 떠나 어찌되었던 무력한 아버지 전종구의 힘으로는 그들을 어쩔 수가 없죠. 전종구는 가족을 살기기 위해 그렇게 처절하게 몸을 내던지지만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합니다. 절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지죠.

관객은 무명의 서늘한 외모나 외지인의 기괴한 모습에도 공포를 느끼겠죠. 하지만 관객이 근본적으로 느끼는 압박감은 좀 더 다른 곳에서 다가옵니다. 저들이 대체 누구며 어떤 존재이며 누가 종구의 가족을 해치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관객도 모르는데 더 정보가 적은 주인공 종구가 알 리가 없죠. 가족을 지킬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상되는 상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내 폭력 묘사가 없다고 나홍진 영화가 주는 희망 없는 처절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더군요. <곡성>또한 보고나면 관객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영화는 이런 면에서 코즈믹 호러로도 분류될 수 있겠죠. 미지에 대한 공포와 절대적 존재에 의해 유린당하는 인간에 대한 플롯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H.P.러브크래프트의 공포 철학인 코스미시즘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컬트의 장르적 클리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정작 호러의 개념을 잘 살려냈다는 점에서 기존의 무의미하게 양산되던 호러 영화들과는 대척점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영화의 또 다른 유니크한 점은 굉장히 한국적이고 민속적인 이미지를 서구식 오컬트로 잘 표현한 점입니다. <엑소시스트>와 비슷한 오컬트 영화는 기본적으로 카톨릭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사탄이라는 기독교의 악마를 기반으로 제작됩니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주류 종교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죠. 신자에게는 사탄은 존재하는 악마니까요. 따라서 유령의 집에 등장하는 귀신들도 일반적으로 기독교적인 해석이 동반되죠. 반면, <전설의 고향>이나 일본의 호러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은 그야말로 원혼입니다. 그러나 <곡성>의 악은 원혼도 아니며 귀신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영화는 성경 구절로 시작하고 영화 종반에 외지인은 부제에게 같은 구절을 읊어대죠. 영화는 노골적으로 기독교적 은유와 지식을 활용합니다. 그것도 곡성이라는 한국의 민속적인 마을에서요. 반면, 영화의 굿판과 살을 날리는 장면은 지극히 한국적입니다. 기독교의 메타포를 사용하면서도 철저히 한국의 토속적 소재와 외지인이 가져온 이질적 요소가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가 주류 종교인 것도 사실이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재래신앙을 찾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혼잡하게 소재가 섞여 있는 것이 묘하게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겠죠.

영화 내에서 종구는 2차례에 걸쳐 대체 내 가족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지 질문을 합니다. 일광은 그냥 던져진 낚시질에 효진이 걸려든 것이라고 하며 무명은 종구가 의심해서라고 말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대사가 서로 인과 관계에 맞지 않습니다. 효진에게 이상한 기미가 보인 것은 종구가 외지인을 의심하기 이전이거든요. 영화는 계속 현혹되지 말라고 하죠.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감독은 애초 모든 이야기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게 장치했고 플롯 자체가 매우 인위적입니다. A는 B다 라고 말하지 않아요. A는 B일수도 있고 C일수도 있고 D일수도 있죠. 기획 단계에서부터 관객이 영화의 해석을 놓고 논쟁할 수 있게 짜여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객의 해석이 옳고 이를 지지한다고 말했죠. 물론 감독이 정해둔 설정이 있겠지만요. 영화적 해석에 대한 논쟁에 불은 지펴졌고 이는 영화의 흥행과도 직결되고 있습니다. 영리한 플롯이에요.

감독은 대체 이 영화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인터뷰에서 이 영화로서 피해자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발언했습니다. 종구는 최선을 다했다고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영화의 주제를 표현하는 것에서 악을 행하는 자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왜 곡성의 등장인물에게 그런 해를 가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구도 곡성의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이유 없이 재수 없게 낚시질에 걸려든 생선일 뿐입니다. 악마의 배를 채우기 위함이거나 순전한 취미생활이 되었든 그들은 그냥 희생당한 겁니다. 어제까지 멀쩡한 사람이 오늘 이유 없이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은 비합리적이고 냉정하고 참혹한 곳이죠. 죽음이란 것은 결국 인과관계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마을을 지키는 신이 존재하는 데에도 평범한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합니다.

이 기이한 영화 속에서 배우들은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주연 자리에 걸맞은 연기를 보여준 곽도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황정민, 영화의 중심적인 인물을 연기한 쿠니무라 준, 영화 장인들 사이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은 천우희 그리고 진정한 숨은공신인 아역 김환희 까지 버릴 배우가 없습니다. 쿠니무라 준의 섬뜩한 연기 사이 사이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이나 공포에 떠는 모습은 관객들의 판단을 어지럽게 현혹시키겠다는 감독의 의중에 딱 들어맞았죠.

쿠니무라 준이 공포와 고통 속에서 손으로 입을 막는 장면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던 인간적인 모습과 흡사합니다. 십지어 돌무덤에서 부활하는 것까지 비슷하죠. 예수의 열두 제자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3번 울 때까지 예수를 부인했죠. 곽도원이 무명을 의심한 것처럼!

일광이나 외지인을 무섭게 공격해낸 무명이지만 그는 단 한명의 아버지인 종구를 설득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무력한 소녀처럼 느껴집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많은 인간은 그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신은 인간들을 거대한 재앙에 고통받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는 걸까요? 모든 종교가 가진 기본적인 난제입니다. 곡성의 신으로 보이는 무명은 외지인이라는 재앙에서 곡성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악마든 질병이든 독버섯이든 간에요.

사실 영화의 의심과 현혹이라는 키워드를 가장 관통하는 인물은 일광입니다. 영화 최고 장면 중 하나인 살을 날리는 굿판은 그와 쿠니무라 준의 합작품이죠. 모두가 이 장면에서 가장 많이 현혹되고 속았을 겁니다. 게다가 영화의 최고의 반전 역시 그의 손에 들려져 있었죠. 무명의 신기를 보여주는 계기도 일광이며 곽도원을 현혹시키는 것도 일광입니다. 게다가 그의 모습 전후를 살펴본다면 이렇게 외지인을 도운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소품 하나하나의 디테일에 담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영화의 설정이나 주제를 설명하는 역할도 합니다. 허주라는 개념을 설명시킨 것도 그의 허주가 외지인일 수 있다는 복선이고 당신들의 죽음도 당신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별다른 이유가 없다고 설명하는 역할이기도 한 것이죠. 훈도시같은 노골적인 힌트도 주고 말이죠. 대놓고 스포일러인 영화 포스터도 그렇습니다.

반면 장르적 재미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종구라는 인물의 가족을 지키려는 처절한 부정을 보여준 장면은 좀비 장면입니다. 칸느에서 상영 도중 박수를 받았다는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몇 안 되게 관습적인 소재를 끌어오면서도 전혀 다른 해석과 방식으로 표현해냈습니다. 직접적인 오컬트나 호러 장면이 거의 없는 영화임에도 이 장면만은 노골적입니다. 사실 좀비 영화는 굉장히 SF요소가 많은 장르이기 때문에 오컬트적인 이유로 좀비가 발생했어도 초현실적인 연출보다는 재난 영화나 몬스터 무비에 가까운 맹수 같은 연출을 보이는 경향이 많죠. 그런데 이 시퀀스는 영화 내에 흐르는 주술적 요소와 결합되면서도 묘하게 현실감 있게 표현된 독창적인 연출입니다. 또한 악의 형태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고요. 이 장면과 이어지는 장면을 통해 곽도원도 맘껏 연기를 뽐낼 수 있었죠. 또한 나홍진 특유의 폭력성도 드러나고요.

나홍진 영화입니다. 지나치게 불편하고 보고나면 피곤하고 정서적으로 힘듭니다. 이는 감독의 전작들이나 비슷한 성향의 박찬욱의 영화들과도 비슷하죠. 관객 대부분도 그렇게 느낄 겁니다.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좋은 영화인 것은 다들 인정하겠죠. 인생에 있어 한번은 봐야하는 그런 가치를 가졌다고도 볼 수 있고요. 다만 많은 이들이 여러 차례 관람할 만큼 나홍진의 영화를 사랑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만큼 영혼을 뺏기는 기분이 들 정도로 쉽지 않는 영화들입니다. 마치 우리가 일광이나 쿠니무라 준의 카메라에 담기는 것 같죠. 그럼에도 불과하고 <곡성>은 상업적으로 흥행에 성공할 것 같습니다. 저는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저조차도 곡성은 두 번에 걸쳐 보게 되더라고요. 이는 이 영화의 현혹시키고 의심을 자아내는 치밀한 플롯과 더불어 연출에서 오는 기이한 매력 때문이겠죠. 한동안 이런 호러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잘 만든 호러 영화는 또 나오겠죠. 한국에서도 <장화, 홍련>이 있었고 <불신지옥>도 있었고 <기담> 같은 영화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도 모든 면에서 이렇게 굉장하고 많은 장르를 담으면서도 디테일까지 높은 호러 영화는 오랫동안 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엑소시스트> 이후 오컬트 호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영화가 되지 않을까요?

단평 :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바로 나홍진이라는 이름의 악마. 5/5

댓글 : 8 개
http://m.blog.naver.com/nicemonk/220711216543
꼼수나 감독의 도덕성이라는 하는 표현들이 좀 거슬리는 리뷰군요. 감독의 의도가 맘에 안들 수는 있는데 그게 창작에 제한을 걸어선 안되죠. 의도 자체를 다소 개인적인 가치로 부정하는 것은 창작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아니라고 봐요. 게다가 곡성의 경우는 주제, 즉 메세지의 전달이라는 목적은 명확하게 이루어내고 있거든요.
리뷰가 제가 느끼고 생각한것과는 전혀 상반되는군요 하나하나 다른점을 이야기해보고 싶지만 긴 글 속에 저와 다른점이 너무 많아서 직접 만나서 토의하지 않는이상 답이 안나오겠네요 ㅎㅎ 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다르게 생각이 되니 정말 재밌네요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것만 보고 믿고 싶은것만 믿는다.
의심하기 때문에 불편해지는 영화죠..의심하지 않으면 엄청 친절한 영화가 됩니다....
영화 보기전엔 몰랐는데 보고나서 마지막 포스터 다시보니 소름이 돋더군요

ㅎㄷㄷㄷ
잘 읽었습니다 헌데 무명이 말한 의심해서 그렇다는건 아이에게 이상징조가 나타나기 전에 동료경찰의 이상한 소문을 들은후 의심이 시작되지 않나요? 사건현장에서 외지인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고(그래서 시선을 느낀 외지인이 쳐다보죠) 불탄 현장에서 무명을 만나고 난 후 외지인에 대한 환상도 보고요 이환상? 악몽?은 의심을 하고 있어서 그런것 아닌가요? 본격적인 의심은 아이가 이상징후를 보인 후 지만 그전부터 제느낌엔 계속 의심을 한것으로 보였어요
처음 무명을 만날때 무명이 묻죠. 봤냐고? 그 사람은 이유가 있을때 모습을 나타낸다고. 광범위하게 낚시줄을 던져놓고 반응이 오니까 찾아온것으로도 해석가능하죠. 사실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의심이 먼저냐 해꼬지가 먼저인가는 큰 의미가 없을것 같습니다. 그냥 무의미한 재앙 그자체에 가까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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