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러 리뷰] 사바하.2019.02.24 PM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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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하는 대한민국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본격적인 오컬트 영화입니다. 아니, 이런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흔하지 않죠. 감독의 전작 <검은 사제들>과도 궤를 달리합니다.

전작은 엑소시즘을 다룬 영화 문법에 충실한 영화였습니다. <엑소시스트>를 현지화시킨 것 같은 정통적인 장르 영화였죠. 신선함보다는 퇴마의식의 디테일로 승부를 건 영화기도 합니다.

<사바하>는 다릅니다. 정말 보기 드문 영화예요. 희소성이 느껴지는 장르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곡성>처럼 치밀한 플롯을 가진 미스터리 영화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종교 영화의 면모를 보입니다.

극의 주인공은 개신교의 목사입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의 프랭크 스콧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요. 세속에 물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없이 물음을 던지며 길을 찾는 캐릭터입니다.

이정재의 연기가 엄청나다고 볼 순 없지만, 무척 잘 맞는 옷을 입었습니다. 목사인 그에게 신은 물음표입니다. 귀신을 가족으로 둔 소녀, 신흥 종교 단체에 빠진 청년, 설명하는 역의 대승 불교 스님, 사이드킥 역할을 하는 전도사, 티베트 불교의 사제 등 정말 다양한 종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종교적 세계관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어벤져스>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예요. 깊은 철학적 논쟁까지는 아니지만, 목사와 스님들의 신과 악, 삶을 보는 관점에 따른 논쟁도 흥미롭습니다. 종교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른 법이죠. 티베트 불교나 한국의 토착 종교와의 교착지점도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깨알 같은 흥미를 던져줍니다.

주인공 목사가 조사하고 있는 사이비 단체의 우상은 사천왕입니다. 사천왕은 불교에서 말하는 호법신을 뜻합니다. 사천왕은 밀교가 발달했던 일본 서브컬쳐에서는 자주 활용되는 소재기도 하죠.

가끔 전설의 고향 류의 우리나라 귀신, 무속 소재의 영화에서는 징벌을 내리는 존재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 오컬트의 소재로는 희귀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영화 < 리추얼: 숲속에 있다>에서도 우리가 프랜차이즈 영화 등에서 흔히 보던 신화의 신을 공포의 대상으로 사용하기도 하죠. 비슷한 경우지만, 다소 뻔한 문법의 그 영화와 달리 <사바하>의 플롯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영화는 장르적인 연출에도 충실하지만, 작가주의 경향도 보여요. 오히려 후반의 전개는 상업적인 성공을 노린 영화라고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노골적인 퇴마의식이나 등장인물의 갈등 대결 구조, 코즈믹 호러의 요소는 사라집니다. 호러 영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요. 그리고 예언과 타락, 인간의 사악함과 신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데 치중합니다.

마침내 기독교의 신화에 불교적인 색채가 뒤얽히면서 차가운 정서를 내뿜습니다. 종교 영화 색채를 보인다고 기독교 영화거나 불교 영화는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 자체가 커다란 질문입니다. 신과 악은 무엇인가? 초현실적인 존재들을 통해 그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불가지론이나 이신론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면서 오컬트를 다루는 점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하죠.

단점이 없진 않아요. 서사가 돋보이는 영화는 아닙니다. 편집은 길며 촘촘하진 않습니다. 너무 간단히 소비되는 캐릭터도 여럿 있으며, 연출상 아쉬운 점도 여럿 있어요. 후반에 장르적 재미가 약한 것도 약점입니다.

그러나 충실하고 깊은 세계관과 메시지, 디테일이 가진 힘과 한국적인 색채 등은 어느 오컬트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강점입니다. 하루 이틀에 나올 수 있는 각본이 아니에요. 감독이 긴 시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았을까요?

이 영화는 상업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곡성>처럼 치밀한 플롯을 가진 영화도 아닙니다. 개봉 당시 관객, 비평의 다양한 반응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같이 오컬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선물 같은 영화였죠. 이 영화는 연말에 개봉했었는데 그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였거든요.

 

PS. 이 영화가 엑소시즘이 아닌 추리 미스터리의 플롯을 띄고 있어 오컬트 영화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요. 이는 오컬트 장르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엑소시스트 같은 영화 만이 오컬트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마의 씨>나 <오멘> 같은 영화나 최근 작인 <위자: 저주의 시작>, <바바둑>, <제인도우>, <위치> 같은 영화들 역시 퇴마가 없는 오컬트 영화죠. '퇴마'가 오컬트 영화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며, 장르의 기원 시절부터 상당수 오컬트 영화는 추리 미스터리의 형식을 띠었을 뿐 아니라 오컬트 장르 자체가 미스터리와 함께 교류하며 만들어진 장르거든요.

댓글 : 4 개
전 너무 깊지 않은 것이 딱 오컬트 영화 같아서 좋았어요. 너무 철학적이면 그건 오컬트가 아니라 작가 주의 영화가 되니까요. 가뜩이나 아무도 안보는 장르 영화인데 그러면 망하죠. 원래 장르 영화가 적당한 깊이의 메시지 아니겠습니까? 영화라는 것이 결국 메시지 전달의 도구라면 그 점에서 설득력이 있었다고 봐요. 감독이 대중 영화로서의 선을 지킬 줄 아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전 알기 쉽고 얕은 것이 때로는 진리에 더 가깝다고 봐요.
아 그리고 선교사 친구 이야기는 감독이 지인으로부터 실제 들은 이야기라고 하더라고요.
잘 읽었습니다

각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재밌을것 같더군요..

불교적인 관점과 기독교적인 관점이 서로 다르기때문에 이건 진선규도 계속 설명해줬는데 그게 이 영화를 보는 키죠.

불교에서는 선과 악의 확실한 선이 없고 선도 악이 되고 악도 선이 될수 있는것이죠... 이 영화는 검은 사제들과 같은 오컬트가 아니라 상당히 종교적인 물음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신이란 과연 무엇이고 선과 악은 과연 무엇인가
삶과 죽음 선과 악, 종교라는 것이 결국 오컬트(기이한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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