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계의 이슈는 영화 [곡성]의 퍼즐같은 스토리를 맞추는 것이다. 반응들만 보면 [곡성]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 [황해]와 같이 난해한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영화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영화의 이야기는 매우 명확하다. 외지인(쿠니무라 준)과 일광(황정민)은 사건의 흑막이었으며, 무명(천우희)는 그들과 대척점에 있다. 그 사이에 종구(곽도원)만 누굴 믿어야 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는 성경의 누가복음 한 구절을 보여줌으로서 시작한다. 나홍진 감독이 기독교인라는 사실과 이전 인터뷰에서 밝힌 고민들 - "이런 일들이 도대체 왜 이 사람에게 일어나야 했을까? 세상에 어떤 불행이든 피해를 당한 사람의 처지에서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며 이를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제가 홀로 담을 수 있는 주제나 소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각계각층의 종교인을 만나고 다녔다. 그들에게 듣는 가르침을 통해 느낀 점이 있었다." -을 생각할 때, 감독 나름의 종교관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본 영화의 서사에서 기독교의 구원 인식론과 유사한 장치를 보았고, 감독의 성향과 인터뷰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이러한 해석이 유효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본 리뷰에서 기독교의 구원 인식론을 바탕으로 영화 [곡성]을 해석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보니 그리스 비극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한 인간의 공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코즈믹 호러 장르와 맞닿아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1. 영화 해석을 위한 접근법
영화는 비록 우리나라의 토속 신앙과 영적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지만, 또 기독교를 믿거나 성경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는 성경적인 상징들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 틀 때 닭이 세 번 우는 장면이라던가... 그런 부분에서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 영화가 성경의 메타포를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물론 닭이 세 번 우는 장면은 감독 스스로가 성경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했지만, 실상 그 의미는 형의 것과 매칭되는 식이 아니라 오히려 대칭되는 식이다. 영화 [곡성]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의 텍스트들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들을 비틀어버린다. 이것은 비유라기보다는 대치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들이 비유든 혹은 대치든 패러디의 원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속에 숨겨진 메세지를 읽어내는 것은 힘든 작업이다. 때문에 영화 시작에 나왔던 누가복음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아주 밀접한 관계의 텍스트지만, 감독은 이것을 곧이곧대로 가져오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저 기독교 교리의 논리 구조만 빌려온 것이다. 감독은 놀랍게도 구원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이 논리 구조를 빌어 신의 세계가 아닌 절망이 가득한 지옥도로 인도하고 있다.
따라서 본 리뷰는 먼저 중심이 되는 누가복음 텍스트를 먼저 분석하고 거기에 대한 논리 구조를 도출하여, 이를 영화 후반부의 주요 두 장면 - 외지인과 부제와의 대화, 무명과 종구의 대화 ? 에 대입하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왜 부제와 종구를 파멸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을 시사하고 있는지 해석한다.
2. 선행적으로 알아둬야 할 것 : 기독교의 구원 인식론
- 기독교의 구원 인식론
영화의 시작은 누가복음 24:36~37 을 인용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본 리뷰에서는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을 인용하였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상황은 이렇다. 십자가에 달려죽은 예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그의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였다. 그 때,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믿지 못하고 그가 귀신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그런 제자들을 보고 꾸짖어 육신과 함께 부활했음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인용된 누가복음의 텍스트-즉, 예수의 부활 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 증언하는 핵심 정수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부활함'을 '믿는 것'은 '구원'을 얻게 한다." 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4:6)
이것의 각 개념들을 일반화시켜 논리 구조를 만들어보면...
"((무엇))을 '믿는다'면 ((결과))를 초래한다."
로 말할 수 있다.
-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
위의 논리 구조를 좀 더 설명하기 위해서 대괄호로 묶여진 각 개념들의 속성을 분석하기로 한다.
구원은 믿음의 ((결과))로 나타난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또한, 에베소서 2:8~9의 구절을 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인 즉슨 구원은 스스로 쟁취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즉, 어떤 것을 믿음으로서 초래되는 ((결과))는 현상(phenomena)의 속성을 가진다.
-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
성경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바라는 것의 실상'은 ((무엇))에 해당한다. 믿음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말은 결국 믿음의 대상이 결과와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무엇))과 ((결과))는 '믿는다' 라는 행위를 매개로 비례의 관계이다.
(또한, '바라는 것'이란 말에 함의성을 생각해볼 때, assume의 뉘앙스가 강하다.)
3. 영화 [곡성]에서 변용된 기독교 구원 인식론의 논리
영화 [곡성] 에서는 기독교의 구원을 설명하는 이 논리 구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천국이 아닌 지옥도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영화의 전 장면을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후반부의 두 장면 - 외지인과 부제와의 대화, 무명과 종구의 대화 ? 을 위의 논리 구조에 대입하여 해석해본다.
1) 외지인(쿠니무라 준)과 부제(김도윤)의 대화 장면
부제는 외지인 거처를 찾아간다. 거기에는 이미 교통사고로 죽은 외지인이 멀쩡히 살아있는 채 있다. 분명 외지인의 최후를 부제는 목격했기 때문에 그가 사람이 아닌 귀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귀신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보니, 신부지망생인 그가 외지인을 악마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좋다. 어쨌거나 부제는 외지인에게 묻는다.
"너가 악마인지 아닌지 말해라. 너가 악마가 아니라면 나는 그냥 내려가겠다.“
그 말에 외지인은 대답한다.
"넌 네 의심을 확인하러 왔다. 말해도 믿지 않을 거다. 내려가는 것은 너의 의지가 아니다.“
그리고 외지인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여 영화에서 인용된 누가복음의 말씀을 읊는다. 부제는 절망에 가득차 비명을 지른다.
(혹여 어떤 이들은 외지인이 성흔과 성경구절을 읊는다고 예수가 아니냐는 말을 한다. 예수가 꼭 천사의 모습을 할 필요가 있냐며;;; 그러나 성경에서 나타나는 악마의 장난 중 주된 것들이 예수가 행한 가짜 기적을 보여주는 것과 성경의 왜곡된 인용이다. 진짜 예수인지 악마인지는 해석하는 사람들 마음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외지인은 악마로 생각된다.)
어쨌거나 악마가 읊는 누가복음의 말씀은 텍스트 그대로 부제와 외지인의 상황과 매칭이 된다.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는 외지인으로, '믿음을 행하는 제자'는 부제로 말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외지인은 신이 아닌 악마였다는 점과, 의심하는 제자 대신 그를 악마라고 믿고 있는 부제라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성경의 말을 생각할 때, 부제가 외지인을 악마라고 믿었다는 것은 그가 스스로 외지인을 그렇게 여긴 것이다. 사실 부제의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마침 그는 외지인이 교통사고로 죽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를 둘러싼 수상쩍은 사건과 증거들을 목격했고, 종구를 위시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부제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가사의한 사건들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자연스럽게 그것의 책임은 악마의 장난에 있다라고 확신한 것이다.
"내려가는 것은 너의 의지가 아니다." 란 말은 이미 부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결과))를 초래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구원'이 자기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며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처럼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부제-인간을 비웃는다.
위의 논리 구조를 생각해봤을때, 외지인을 악마라고 믿어버린 부제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어떤 사람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어서 그의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눈 앞에 있는 외지인이 악마라고 믿은 부제는 그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불가항력의 힘으로 악마의 세계에 영혼을 뺏기지 않았을까?
(나홍진 감독은 악마의 형상을 한 외지인이 부제의 사진을 찍는 것은 영혼을 담는다는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즉, 위의 논리 구조로 이 장면을 해석하면 "부제는 '외지인이 악마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악마의 세계에 영혼을 뺏겼다.'"
이 장면은 영화 속의 사건과 동떨어져서 진행되는 느낌을 많이 주는 씬이다. 나홍진 감독과 이동진 평론가의 대담에서 이 장면을 '신화적인 장면' 이라고 표현한다. 현실적 묘사로 진행된 영화가 이 장면에서만큼은 악마가 나오니, 이 때문에 신화적인 장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수 있다.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 이 장면은 마치 종구(곽도원)가 처한 현실을 설명해주기 위한 우화 같은 내용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치 수학 문제집 앞에 개념을 알려주기 위해서 풀기 쉽게 설정한 예시문제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뒤로 넘기면 예시문제가 아닌 응용문제와 연습문제에 맞부딪치면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 지 막막하다. 바로 그 어려운 응용문제와 연습문제가 종구가 직면한 딜레마이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처하게 되는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
2) 무명(천우희)과 종구(곽도원)의 대화
영화 종반부 무명을 만난 종구 '무명의 말을 믿어야 하나? 일광(황정민)의 말을 믿어야 하나' 로 갈등하고 있다. 종구는 부제와는 달리 딜레마에 빠져있다. 그는 '믿음'의 ((대상))이 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딸을 구하고 가족을 구한다'는 ((결과))만 바라며 달려온 그이지만, 경찰이라는 신분도, 마을친구를 대동한 무력의 사용도 소용이 없다. '딸과 가족의 구원'은 그가 스스로 쟁취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종구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다. 종구나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누굴 믿느냐?'가 아니라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그것이 최선의 ((결과))를 이끌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결국 종구는 같은 함정도 빠지고 만다. 도통 어떤 놈 말을 믿어야할지 발만 동동 구르다가 종구는 이 같잖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스스로 탈출하고 오로지 딸과 가족만 생각해서 집으로 향하기로 한다.(얼핏 보면 일광의 말을 믿은 듯 하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여 행동한 것이다. 당장 가족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깐) 그 순간, 무명은 어느새 종구 곁으로 홀연히 와 그의 손을 잡는다. 동시에 종구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쌔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의 눈에 무명의 옷과 땅에 떨어진 딸의 머리핀이 들어온다.
이 때, 종구는 무명을 ((모든 사건의 책임자))로 믿어버리고 만다.(종구가 무명을 의심했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결국 무명이 모든 사건들의 범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의심했다고 볼 수 있다.) 종구가 착각한 것은 이 모든 시련의 해결책을 누군가를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책임을 돌릴 사건의 원흉을 찾는 것으로 생각해버린 것이다. 실상 그가 원흉을 찾는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에도 말이다.
즉, 위의 논리구조대로 이야기 하면 종구는 ((무명이 살인사건의 책임자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족이 몰살당했다.))
4. 결론
영화를 기독교 구원 인식론의 논리 구조로 해석하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은 '그들이 비극의 원흉'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을 비극의 원흉이라 믿어서' 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에서 부제나 종구나 그들이 '믿는다'라는 행위 전까지 외지인과 무명의 정체는 계속 모호한 스탠스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부제가 외지인을 악마라고 믿고나서야 악마로 변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무명의 경우도 종구가 비극을 맞이하고 나서야 그녀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영화 연출의 한 기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종구의 딜레마가 와 닿는 것은 그 점 때문이다.
종구의 딜레마를 생각하면 영화 [곡성]은 마치 [오이디푸스]같은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킨다. 운명의 힘을 컨트롤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다뤘다는 점이 비슷해서 이다. 또한 스티븐 킹 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미스트]와 정서적으로 유사한 부분도 있다.( 영화 [미스트]는 개독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이성을 까는 영화다.) 이렇게 봤을 때, [곡성]은 오컬트 장르보다는 오히려 '코즈믹 호러' 장르 내에서 가장 궁극의 공포를 성취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인간이라도 때론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행이 지나가고 좋은 결과가 빨리 찾아오길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불행의 원인을 찾아보려 한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땐, 불행의 책임이 분명 어떤 것에 있다고 믿어버리기 쉽다. (영화에선 "이렇게 소문이 나는 건 말이여? 참 말로 이유가 있는 것이여." 라고 누군가 말한다.)
하지만 불행의 책임을 찾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최선의 결과로 이끌어주지 않는다. 인간은 미래를 보지 못하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 이면의 일 또한 파악할 수 없다. 그게 인간 본연의 한계이며, 그것이 고대 그리스 때부터 줄기차게 이야기해왔던 비극이다. 영화 [곡성]은 바로 그런 인간들이 겪고있는 비극에 대한 염세적 우화라고 생각한다.
< 요약 >
? 본 영화는 기독교 구원 교리의 논리만 차용해 지옥도를 그리는데 사용했다고 가정했음.
? 영화에서 인용된 누가복음 : '부활한 예수'를 '믿는다'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내용.
====> 즉, "((무엇))을 '믿는다'면 ((결과))를 초래한다." 라는 논리구조가 성립
---> 부제는 ((외지인이 악마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악마의 세계에 영혼을 뺏김)).
---> 종구는 ((무명이 살인사건의 책임자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족이 몰살당함)).
? 영화를 해석한 필자의 결론 :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겪을 때 어딘가에 원인과 책임을 있다고 믿는 것은 인간의 한계. 영화 [곡성]에서는 이런 점을 미끼로 귀신놀음을 함.
이것도 감독이 의도했을려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