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이이잉!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곧 석산의 모래와 먼지가 사방에 비산했다.
석산의 척보기에도 황량한 한 봉우리. 이 봉우리는 무공을 모르는 범인들은 감히 우러러 볼 수 조차 없는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며 인적를 불허했다. 기암괴석들이 꽈리를 틀고 그 흔하다는 잡초 한 뿌리도 자라지 못하는것을 보아 적어도 수 백년 동안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도, 닿을 이유도 없어 보이는 봉우리.
그러나... 오늘!
인낭지약(人囊之約)을 지키고, 자타공인의 천하제이인(天下第二認)이 되기 위해 기라성같은 고수 네 명이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바로 이 곳, 석산의 천창봉에서.
* * *
제일 먼저 나타난 인물은 죽립을 걸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녹색의 피풍의를 뒤집어쓴 장한이었다. 중키에 덩치도 큰 편이 아니었으나, 피풍의 밖으로 비치는 몸의 윤곽을 볼때 상당한 훈련으로 온몸에 근육이 단단이 박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한은 천창봉 일대를 쭉 둘러보더니 느긋한, 그러나 실상은 쾌속한 걸음으로 광장을 한 바퀴 거닐었다. 그러면서 평평한 땅에 요철과 같은 기암괴석들을 향해 멀찌감치 떨어져 주먹을 슬쩍 떨쳐내었다.
퍽!
소리도 없이 날아간 권경에 제법 커다랗던 바위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렇게 수 차례 간단한 동작으로 요철같은 바위들을 모두 정리한 후, 장한은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평평해진 천창봉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넓기도 넓구나. 이 정도라면 오늘 한 바탕 크게 해볼 수 있겠다.'
사실 피풍의의 장한은 천하제이인 따위의 거추장스러운 칭호에 혹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인낭지약을 지키기 위해 왔냐고 물어보면 그것에도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단지 그는 소싯적 어울려 다녔던 인물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들과 비교해 자신은 어느 정도나 성과를 이루어냈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온 것이다. 어쩌면 그 자신의 강호에서의 위치가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자리인 만큼 피풍의 장한은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들인지 어렸을적 스스로 보고 느끼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장한이 청년 시절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가 돌연 질식할 것 같은 안광을 번뜩였다.
'왔구나.'
멀리 광장 끄트머리에 한 사람의 손이 걸리더니 이내 먼지를 뒤집어쓴 우람한 체구의 장한의 몸이 나타났다.
'고북이(高北理)!'
우람한 체구의 청의 장한, 고북이는 천창봉 일대를 한번 훑어보더니 한 곳에 우두커니 서있는 피풍의 장한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이상해(李商海), 오랜만이구나!"
온 산이 쩌렁쩌렁 울리며 진동이 엄습해왔으나, 실린 내력에 응당 뒤따라야하는 귀에 작용하는 압력이 거의 없었다. 공력의 수발이 자유롭다는 뜻이었다.
"북이. 강해졌구나."
- 현음장(現陰掌) 고북이(高北理)!
그는 친형이자 스승인 냉마권(冷魔拳) 고북왕(高北王)을 뛰어넘은 당금 무림에서 냉공부분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고수였으며 능히 금강불괴지신(金强不壞之身)이라 불릴만한 강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당금 강호의 최정상의 인물중 한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만한 인물이 인세가 드문 이 곳, 천창봉에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피풍의의 장한이 그 정도의 고수에게 서슴없이 평대를 쓰며 '강해졌다'라는 간단한 말로 평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상해라는 장한의 말이 듣기 거북했는지 고북이의 눈에서 숨을 조이는듯한 안광이 폭발해 나왔으나, 이상해가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흥, 네가 언제까지고 나를 무시 할 수 있나 보자.'
고북이는 이상해와 간단히 인사만을 나누고는 대충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 후 혼잣말 하듯 툭 내뱉고는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하기 시작했다.
"녹절신편(綠絶神鞭)이 강호를 횡행하고 신출귀몰한다더니 왜 그런지 알겠군. 오늘은 크게 어울려 볼 수 있겠구나."
이상해는 고북이의 말에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고북이의 말 뜻인즉, 이상해가 주변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의 고수가 되어서 이제는 스스로 상대를 찾아 발품을 팔아야 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이야기였다. 또, 고북이의 호승심이 유달리 강하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나와 충분히 겨루어 볼 수 있는 실력이다'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다.
언뜻 생각해보면 광오하다고 할 수있는 말이었으나, 고북이의 명성과 실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이상해의 도발에 가까운 언행을 들은 후에도 평소와는 다르게 감정을 잘 다스렸다고 범인들을 경악케 만들 일 이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이, 고북이는 쌍장으로 내뿜는 현음장과 강철과도 같은 온 몸으로 구사하는 무공으로 서안 일대를 평정한 불같은 성질의 주인공이었다. 서안에서는 천자 행세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였으니 남에게 깔보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 만으로도 그의 감정이 격해질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던가.
'내 적수는 아니다.'
이상해는 운기행공을 하는 고북이의 널찍한 등판을 보고 있다가 다시 추억에 잠겼다. 어렸을 적에 노주의 슬하에서 배웠던 여러 아이들 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가진 서로를 알아보고 뭉쳐다녔던,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아이들.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던 한 아이가 눈에 밟혔던 것이다. 항상 샛노란 금의를 입고 얼굴에 발그레 하게 홍조를 띄었던 삐침머리 소년. 그 공평정대하던 노주인마저도 어쩔 수없이 편애 할 수 밖에 없는 천고의 기재. 그를 앞에 두고는 그 누구도 천재라 불릴 수 없었다.
어렸을 적의 자신의 기억속에서 그는 감히 어깨를 맞대어 볼 수도, 넘 볼 수도 없는 천재였다. 이상해도 노주 슬하의 고르고 골라 모인 영재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최고의 기재였으나, 그 아이를 두고서는 그는 스스로를 언제나 이인자로 밖에는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격차가 마치 하늘과 땅 끝의 차이 같이 느껴져 어린 나이에는 당연 일어날 만한 호승심 마저 부지불식간에 스러지게 할 정도였다.
그 생각이 바뀐 것은 강남 일대를 한 바탕 휘젓고 나서야 인정받은 무패의 신화 덕분이었다.
'나는 무패신화(無敗神話)의 주인공이다.'
나이를 먹고 당시의 기억이 흐릿해졌는가? 이상해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한 기억은 두 눈과 머리에 생생히 박혀있다. 또한 그를 되새길 때마다 그때의 좌절감 마저도 함께 몸을 휘감아왔다.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모습. 당차고 낙천적인, 준수하고 시원시원한 인상. 상대방을 깔보지 않는 겸손함. 그러면서도 결코 손해를 보지않는 합리적인 행동. 그 모든걸 차치하고서라도 그를 인정하게 만드는 천골무재(天骨武材)의 기질.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호인(好人)중의 호인이었으며, 무인으로서는 무골중의 무골이었다.
그 모든것이 기억에 남아있지만, 강남 일대를 평정하고 녹절신편이라는 외호를 얻고 부터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상해는 자신을 믿었다.
상념에 잠긴 이상해와 가부좌를 튼 고북이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갑작스레 온몸에서 엄청난 화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온 몸이 저릿저릿 할 정도의 화기는 순식간에 두 사람의 전신에 엄습해왔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고북이나 이상해 조차도 이렇게 패도적인 열양신공을 느껴본적은 없었을 정도였다.
이상해와 고북이는 무의식적으로 공력을 끌어올리며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열양공의 고수들을 중 괄목할만한 인물들을 손꼽아 보다가 인낭개전의 또 다른 한 사람을 떠올렸다.
여기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북이는 무의식적으로 감탄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파가(巴家) 구나!"
고북이의 말이 여운을 끝내기도 전에 불그스름한 인영이 튀어오르더니 소리도 없이 땅에 착지했다. 그는 피처럼 붉은 혈의를 입고 붉은 수실을 맨 거대한 태산도(太山刀)를 등 뒤에 멘 인물로, 그 차림새가 그의 호리호리한 몸과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혈의장한은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인상에 얼굴도 아주 준수해서 시원시원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의 얼굴이 어찌나 심각하게 굳어있는지 평생 웃어본적이 없던 사람 같았다.
혈의장한의 얼굴이 천천히 고북이를 향했다. 그리고는 굳게닫힌 입이 느릿느릿 열리더니 서릿발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파가가 아니니 귀하는 나를 파가라고 부르지 마시오."
실로 찬바람이 쌩쌩부는 냉혹한 말이었다.
고북이는 그가 그런식으로 말할줄은 몰랐는지 한동안 멍청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아무리 보아도 피처럼 붉은 혈의를 입고 안광을 번득이는 이는 인낭개전의 또 다른 인물인 파이리가 분명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고북이 자신이 알고 있는 파이리는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소심한 면이 있는 청년이었다. 함부로 인상을 쓰거나 남에게 이런식으로 말할 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절대로 이럴리가 없었다.
고북이는 한 동안 그가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제서야 다른 사람 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북이는 강호에 명성이 높은 인물답게 확실히 신분을 알고 있는 이상해에게 대했던 것과는 달리 혈의장한의 말에 성급하게 대처하지 않고 그를 한번 더 자세히 관찰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주저하게 만든 것은 온몸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패도적인 열양신공과 혈의장한이 그가 기척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천창봉에 도착해 있었다는 것이다.
'가만 보니 얼굴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한데... 혹시 이사람은 이아(二兒)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는 혈의장한에게 정중히 물었다.
"귀하가 파이리(巴二利)가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이오?"
혈의장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고북이를 지나 이상해에게로 옮겨갔다. 이상해는 장내에 새 인물이 나타나고 부터 뚫어져라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그제서야 혈의장한이 자신을 응시하자 은근히 공력을 끌어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대항하듯 혈의장한도 무시무시한 안광을 뿜어내며 이상해를 쳐다보았다.
이상해는 처음에는 혈의장한의 화후를 가늠해 보기 위해 약 삼성(三成) 정도의 공력만을 사용했었는데, 혈의장한이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공력을 끌어올리자 오히려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해는 흠칫하며 공력을 점점 끌어올렸으나 전신을 조여오는 압박이 쉽게 줄어들지 않자 결국엔 팔성(八成)의 내공을 끌어올리게 되었다.
'내공이 제법이군. 이러한 자가 이아(二兒)가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두 절정고수가 공력을 끌어 올리며 서로를 주시하는 광경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고북이 마저도 잠시동안은 혈의장한이 이상해에게 원한이 있고, 그 원한을 갚으러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상해는 무림에 출도하자마자 강남에서 비무행을 한다고 천하를 소란스럽게 만들지 않았던가? 무림인끼리의 비무에서 출혈사태가 없을 수는 없고, 비무에 패했던 자들이 순순히 모두 결과에 승복할리는 더 더욱 없었다.
혈의장한은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고북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이상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소. 나는 팔년 전 부터 이자두(李者頭)라 하오."
그제서야 고북이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이다. 헌데 그의 말이 이상했다. 이자두면 이자두지 팔년 전부터 이자두인것은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고북이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짐짓 냉엄한 표정을 지으며 이자두라는 인물을 쳐다보았다.
"귀하의 이름은 알겠소. 허나 이곳은 외인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장소요. 이곳은 태초보(太初堡)의 성지(聖地)이니 귀하는 속히 이 곳을 떠나도록하시오."
- 태초보(太初堡)!
태초보는 당금 무림의 최강의 집단이었다. 다른 수식은 필요없는 전무후무한 당금 최고의 무력집단!
강호의 사마외도들은 태초보의 행사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으며, 명문정파에서도 태초보의 행사는 무조건 한 수 양보를 했다. 더욱 대단한것은, 태초보의 인물들은 엄청난 무공과 세력을 가지고도 인의를 중히 여기고 재물과 권세를 탐하지 않아 그 행동에 있어서 한치 그릇됨이 없었고 무림의 질서니 정의니 하는 고리타분한 것을 구실삼아 강호의 대소사에 함부로 끼어드는 일도 하지않았다.
그들은 모든 강호인들의 우상이었으며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탐하는 것은 오직 무(武)! 그들은 진정한 무도를 추구하기 위해 모인 인물들이었다. 모든 무림인들이 인정하는 대협, 천하제일인인 인낭(人囊) 한지우(韓智優)의 부름에 모여든 태초보의 인물들은 석산(石山) 어딘가에 모여 최고의 무학을 추구하고 있다고 입으로만 전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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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가 연재하는 무협소설을 여기 올려봅니다
원 출처 : http://blog.naver.com/60301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