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건곰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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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괴담] 껌 ~ 9 ~ (0) 2010/06/22 PM 05:27


“......”


“......”


“자네......”


“예, 상무님.”


“이걸 지금 기획서라고 가져 온 건가? 이렇게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종이 쪼가리를?”


“아...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나름대로? 나는 그 딴말 하는 놈들이 제일 싫어! 나름 대로라니. 그게 대체 무슨 염병할 놈의 기준이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기껏 회사 돈 들여서 강원도 여행도 시켜줬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김대리?”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러니까 기획부가 쓸모없는 부서라는 소리를 듣지. 과장이란 인간은 여태 시공계획서도 안 보여주고 있고, 부하 직원은 기획서를 이따위로 써 오고. 나 원 참.”


“죄송합니다. 원래는 부장님께 보여드리고 최종적으로 상무님께 보여드려야...”


“그래서 뭐. 부장용으로 썼다 이거야? 말이면 단 줄 아나 이 사람이!”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듣기 싫으니까 나가 봐. 박과장이나 들어오라고 해.”


......


......


-아그작


입에 껌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두 개의 껌이 입안에서 합쳐져 덩치 큰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그것을 난폭하게 씹기 시작했다.


“질겅, 질겅, 질겅, 김상무. 개새끼. 질겅, 질겅, 질겅”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퇴근 하고 한참 지났는데도 기분이 풀리질 않는다.

분을 삭힌답시고 청계천을 거니는 중인데, 꼴불견 연인들의 모습에 오히려 울화통만 더 치미는 것 같다.

한숨만 푹푹 쉬며 걸음을 옮기다가, 아무도 없는 벤치를 발견하고 그 곳에 앉았다.

여러 색의 조명을 이용해 알록달록한 물줄기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은비와 함께 왔다면 어지간히 신기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잠시 그 물줄기를 쳐다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지나간 문자나, 사진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오주임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는데 내가 하면 어떨지 궁금한 마음이 든다.

지체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역시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두 번 만 더 기다려보고 끊어야지.


-뚜우우우우


-뚜우우, 딸칵


받았다.

갑자기 당황스러워져 말문이 막힌다.


-예 대리님.


오주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새벽의 긴박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아닌 평소의 목소리였다.


“어, 어 그래 오주임. 조금 괜찮아?”


-예? 뭐가요?


“어제 술 좀 많이 마신 것 같던데, 괜찮아 진거야?”


-술이라니요. 술 마신 적 없어요.


“뭐? 그런데 너 새벽에 왜... 아니 그보다 과장님 전화를 왜 계속 안 받은거야?”


-아...... 그건, 사정이 조금 있었어요. 단체로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 어디를 좀 다녀와서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단체로 핸드폰을 두고 어딘가를 가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말이었다.


“아니, 왜 핸드폰을 두고 어디를 가? 핸드폰 반입이 금지된 곳이라도 있어?”


-음...... 뭐 그런 비슷한 거예요. 이젠 괜찮아요. 안 그래도 시공계획서 지금 팩스로 넣고 있습니다.


이걸로 과장도 다행히 한시름 놓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정상적인 말투와 목소리라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새벽에는 다른 오주임과 통화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주임, 오늘 새벽에 나한테 전화 했던 거 기억나?”


내가 물었다.

내심 기억나지 않다고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네, 기억나요. 새벽에는 죄송했어요.


순순한 대답이었지만, 오히려 이 대답이 나에겐 더욱 충격적이었다.

한마디로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껌 달라고 때 쓰던 게 다 기억난다는 말이지?”


내가 재 차 물었다.

말 대로라면 나에게 심한 욕설을 했던 것도 기억 날 것이었다.


-네. 하지만 이제 다 해결 됐어요. 대리님의 껌이 없어도 괜찮아요.


오주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마치 ‘껌을 이제 충분히 구했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할 일 없을 거다’ 라는 말로 들렸다.


“껌을 구했다는 거야?”


-구했다기 보다는.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아 대리님,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잠깐만,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있...”


-딸칵


오주임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 동안 멍 한 표정으로 껌만 소리내어 씹었다.

내 귓가에는 오주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계속 맴돌고 있다.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대체 무슨 뜻일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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