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건곰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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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괴담] 껌 ~ 30 ~ (1) 2010/06/22 PM 06:41


- 아. 아. 동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주민 여러분, 안개가 심하게 껴있습니다. 차량 운행은 삼가 주시고, 밤길을 걸으실 때는 각별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


......


“후우우. 김필중... 나쁜 새끼.”


나는 잠시 문앞에 앉아 있었다.

괴물이 문을 열고 나올 확률도 배재한 채 그냥 그렇게 있었다.

아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개새끼. 상사 엿 먹이는 것도 가지가지지. 지가 죽으면, 지가 죽으면. 하. 하. 하.”


웃음이 나오는 가 싶더니.


“큭, 큭, 크흑. 흑흑. 씨발.”


갑자기 울음이 나온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가 된다는 전설은 있다지만, 웃다가 울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따위 썰렁한 생각이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은 진정 될 것 같았다.


“좆같은 새끼. 웃냐?”


핸드폰을 열자마자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필중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화면의 윗부분에는 ‘기다리면 열린다’ 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볼 요양으로 슬라이드를 열었는데 감히 다른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화면을 넘기면 왠지 필중을 두 번 죽이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말 쓸데없이 거룩한 고정관념에 빠진 모양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런 고착은 보기 좋게 깨져버렸다.


- 띠띠리리리 띠띠, 띠띠리리리 띠띠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젊은 놈 핸드폰 벨소리가 ‘잘했군, 잘했어’라니.


- 띠띠리리리 띠띠, 띠띠리리리 띠띠


핸드폰 액정에는 필중의 사진대신, ‘발신자 표시 없음’ 이라는 글자만 크게 나타나 있었다.

선뜻 통화버튼을 누르기가 꺼려졌지만,

혹시라도 가족이라면 나에겐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의무가 있다.

물론 얼마나 믿어줄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딸칵


통화버튼을 누르고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김필중씨 핸드폰입니다.”


- 치이이-


말은 없고 거슬리는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적어도 실내는 아닌 모양이다.


“말씀하세요. 김필중씨 핸드폰입니다.”


- 치이이이ㅡ


- 치이이이ㅡ


“말씀 없으시면 끊겠...”


- 치이이- 누구?


막 핸드폰을 끊으려는 찰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에 묻혀서 또렷하진 않았지만 어딘지 낯이 익은 목소리였다.


“예. 말씀하세요. 김필중씨 직장 동료입니다.”


- 치이이이- 동료? 아, 하, 하하하.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난 영문을 몰라 마냥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치이이이- 하하하. 대리님 오랜만입니다.


그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수화상태는 좋지 않지만, 절대 잊지 못할 그놈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귀에 박혔다.


“너, 너 이 씨발 오주임이지?”


- 치이이이- 큭큭. 다짜고짜 욕을하세요. 그나저나 필중이 핸드폰을 왜 대리님이 가지고 있습니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혔다.

이 인내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모르겠다.


“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 치이이이- 무슨 짓?


“몰라서 물어!? 이 씨팔...”


- 치이이이- 필중이는요?


“필중이 죽었다. 너 때문에 죽었다!”


- 치이이이- 이거 왜 이러시나. 따지고보면 저도 대리님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닌가요?


“뭐, 뭐? 이 개새끼가.”


- 치이이이- 크큭, 뭐 괜찮아요. 저는 나쁘지 않으니까.


“너, 너, 너 어디야!”


- 치이이이- 필중이 불쌍해서 어쩌나.


“어디냐고 이새끼야!”


- 치이이이- 그건 보셨어요, 제 책상에서?


“어디야!”


- 치이이이- 대리님을 저주하겠다고 쓴 글 말이에요.


“봤어. 봤다고. 그러니까 딴 말 하지마. 나하고 얼굴 보면서 얘기하자고. 당장!”


- 치이이이- 큭큭큭. 큰 소리 치기는. 자기 처지도 모르면서.


“뭐라고?”


- 치이이이- 행운을 빕니다.


“뭐? 야. 오주...여보세요? 여보세요? 이 씨발. 여보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오주임은 예전의 오주임이 아니었다.

비꼬는 말투야 예전에도 비슷했지만, 말 하는 내내 흘리는 그 기분 나쁜 조소가 거슬렸다.

오주임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내게 행운을 빈다는 말을 한 걸까.

어쨌든 오주임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다.

이렇게 슬퍼하고 있을 새가 없다.

필중에 이어 아내와 딸까지 잃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굳은 마음을 먹으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수월했다.

막상 걸음을 떼려하자 아까보다 훨씬 짙어진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전등에 의지하면 그럭저럭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안에는 여전히 그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겠지.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

또 다시 필중의 웃는 모습이 나를 괴롭혔지만, 다행히 이번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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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임이 최종보스가 됐구나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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