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건곰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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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괴담] 껌 ~ 35 ~ (0) 2010/06/22 PM 06:57


“자 이제 선택은 자네가 하는 거네. 세상을 구하고 영웅이 될 지, 당장 가족만 구하고 말 건지 말이야.”


......


......


-끼이이익.


택시가 급정거를 했다.

몸이 앞으로 크게 휘청했지만 다행히 쥐고 있던 유리병은 놓치지 않았다.


“야 이 개새끼야! 운전 좆같이 할래!?”


기사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씨발. 끼어들기를 할 거면 깜빡이라도 키던가.”


“시속 100킬로가 넘는데 끼어들기를 했다고요?”


기사가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고 다시 기어를 넣으며 말했다.


“요즘 정신 나간 놈들 많아요. 간 떨어질 뻔 했네 진짜.”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 끼어들기를 했다는 차량의 뒷 꽁무니가 확실히 보였다.


“5..7..7..8 이네요.”


“예?”


“차량번호 말이에요.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자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꼼꼼하시네요. 자 그럼 다시 달려봅시다.”


말을 마친 기사가 다시 엑셀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


......


“먼저 숙주에 대해서 말을 허디. 나는 여기로 도망 오면서 내 전 숙주를 만나게 됐어. 그리고 나도 그 껌을 삼켰다. 온 몸이 근지럽고, 열이 나는디. 미칠 것 같더라고. 그 때 그 사람이 말 했디, 숙주의 거래를 하지 않겠냐고. 숙주의 거래를 하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난 무조건 그러겠다고 했디. 끌끌. 그런데 대가로 내 딸을 요구하더라고.”


......


......


“저 죄송한데요.”


기사가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혹시 뭐, 껌 같은 거 있나요?”


“예?"


순간 흠칫 놀라 되묻고 말았다.

껌이라면 아주 덩어리째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없어요. 저는 껌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기사가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에이. 지금 씹고 있는 건 뭐에요 그럼.”


아차.

껌을 씹고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비슷한 상황에 애를 먹은 적이 있던 것 같다.

아마 그 때도 택시 안이었지.


“아아. 이건 껌이랑은 좀 다릅니다. 그냥 고무 같은 거예요. 제가 턱이 좀 약해서요.”


아무리 지어냈다고 하지만 이렇게 조악한 변명을 하다니.

민망한 나머지 껌을 씹는 움직임이 더욱 빨라진다.

역시나 기사는 영 시덥지않다는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눈을 감아버리는 게 최고지.


......


......


“씨벌 내 딸을 다 늙어빠진 새끼한테 갖다 주려니 야마가 돌디 않겠어? 처음엔 거절했디. 차라리 듁겠다고.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건 정말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씨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그래서 내 딸이 뭐냐고? 내 딸은 숙주의 씨를 만들디. 숙주가 되려면 내 딸의 살을 먹어야 한다.”


......


......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HBS 자정 뉴스입니다. 첫 소식입니다. 오늘 저녁 서울 강동구에서 택시기사 박모씨가 가족 모두를 죽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박씨의 종적은 묘연한 상태이고, 피해 가족은 아내와 아들 두 명, 그리고 생모까지 총 네 명인 걸로 밝혀졌습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박씨는 아내 유모씨와 생모를 살해한 후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아들 두 명에 대해서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토막을 내어 집안에 방치한 것으로 알려져, 수법의 잔혹성을 짐작케 하는 상황입니다. 경찰은 현재 긴급 수배령을 내리고 전국의 고속도로 및 톨게이트에서 집중 검문을 실시하고 있으니, 청취자 여러분들도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


......


“이제 젊은 놈이 숙주가 됐으니 내 딸도 팔자가 핀 거디. 끌끌. 으음. 이제 나도 가야할 시간이 되었네. 이제 나는 숙주도 뭣도 아닌 죽어가는 영감탱이일 뿐이다. 전쟁만 안 터졌어도 이런데 쳐 박혀 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으으음. 똑같이 껌을 삼켰는데 왜 누구는 숙주가 되고, 누구는 괴물이 됐냐고? 간단허디. 잘 생각해봐. 모르겠니? 너희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을?”


......


......


기사가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며 내게 말했다.


“와아. 이거 뭐야. 이러면 택시기사 이미지만 나빠질 거 아니야.”


투덜거리는 기사와 달리, 나는 택시기사 이미지에 대한 염려는 전혀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내 예상이 틀리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침만 꿀꺽 삼키고 있었다.

기사가 내 표정을 힐끗 보고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표정이 왜 그렇게 굳었수? 거 이상한 생각하지는 마쇼. 저런 택시기사는 소수니까.”


“벼, 별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왠지 제가 아는 사람일수도 있어서 그런 거에요.”


“아는 사람? 강동에 사는 택시기사 박모씨가 한 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안답니까.”


껌을 안줘서 삐지기라도 했는지 기사의 말투가 사뭇 거칠게 느껴진다.


“그런 게 있어요. 운전에나 집중하세요. 아까보다 속도가 느려진 것 같네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기사가 입을 몇 번 쩝쩝 거리더니 이내 힘차게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서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


......


“먹었잖아 너희들은. 그러니까 내 딸의 살을 말이디. 끌끌. 그래 맞다. 그 음식 말이야. 끌끌끌, 콜록. 내 딸의 살을 삼키고, 숙주의 살을 삼키면 숙주의 계승자가 될 수 있는 거디. 정자와 난자가 만나듯이 말이디. 너는 그런데 내 딸의 살만 삼킨거디. 씨앗만 안에 품고 있는 거야. 끌끌. 새로운 숙주가 나타나면 그 전 숙주는 숙주 행세를 하면 안 돼. 그래서 새로운 숙주가 온 몸의 살을 뜯어 가는 거야. 이렇게 골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거디.”


......


......


유리병을 보았다.

주인이 만일을 대비해서 지니고 있었다는 샘플,

그러니까 아내를 구할 수 있는 해독약이었다.

자신의 피와 딸의 피를 섞어서 배양한 것이라곤 했는데,

더 많이 만들어놔도 좋았을 것을 하나만 만들어 놓은 주인의 심술이 괘씸했다.


세상을 구할 것인가, 가족을 구할 것인가?

주인이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본인도 장본인 중에 한명이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뭐, 숙주의 의무 따위는 이제 자신이랑 전혀 상관이 없다나, 뭐라나.

나 역시도 세상을 구하는 의무 따위는 나랑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눈앞의 가족을 죽이고 세상을 구해봐야 내게 무슨 이로운 일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우연찮게 언론에 알려주면 얼마간 칭송을 받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은 나를 평생 괴롭게 할 것이 분명하다.

가족을 구한 다음에도 약이 남는다면 생각해 봐야겠다.

세상을 구하는 일을 말이다.


......


......


“지랄 같았던 숙주 인생도 이걸로 끝이다. 끌끌끌. 가족을 구하고 싶디? 방법이 있디. 있고 말고. 끌끌끌. 이걸 받아. 콜록. 뭐냐고? 그냥 해독약이라고 보면 돼. 나도 써 본적은 없다. 그런데 될 거야. 나와 내 딸의 피를 섞은 것이니까. 완전히 정상이 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괴물이 되거나, 터지거나 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도 그렇고, 내 전 숙주도 그렇고. 이렇게 산에 떨어져 살면서 번식을 멀리 했단 말이디. 그런디. 이번 숙주는 그게 아니야. 나는 숙주의 힘을 나와 내 딸을 지키는 데 썻지만, 그 놈은 그보다 더한 곳에 쓸 거란 기분이 든단 말이디. 세상에 아마 큰 위험이 닥칠 것 같아, 나야 뭐 상관할바가 아니지만 콜록, 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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