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건곰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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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괴담] 의대생과 채팅녀 ~ 2 ~ (0) 2010/06/23 PM 02:03


이대로 시체를 두고 달아나 버리면 되는 일이다. 시체를 발견한다고 해도 같이 투숙했던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잠시 동안 생각한 후 나온 대답은 '찾을 수 있다'였다. 난 빨간 머리에게 주차를 맡겼었다.


자동차 키를 건네주는 나에게 녀석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와우, 저 빨간색 재규어가 정말 손님 차예요? 한 번 꼭 몰아보고 싶었는데.'


'조심해서 다뤄 줘요.'


'마음 푹 놓으세요.'


빨간 머리는 내 차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왜 나의 귀중한 애마를 녀석에게 맡겼을까? 정말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이었다.


빨간 색의 재규어를 가지고 있는 20대 후반의 청년은 국내에 몇 명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 시체를 두고 달아난다면 분명 잡히고 말겠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래, 업고 나가면 된다.


어디가 갑자기 아픈 것같이 해서 급하게 업고 나가면... 갑자기 우리 클럽 멤버중의 한 명인 재찬이의 말이 떠올랐다.


작년 겨울인가, 재찬이가 여자를 꼬셔서, 러브호텔에 갔었는데, 그때, 그 여자애가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서 급하게 응급실로 데리고 간적이 있다고 했다.


'와, 말도 마. 진땀 뺐다니까.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히는데, 갑자기 배를 잡고 뒹구는데, 환장하는 줄 알았어.'


'하하, 재미보러 갔다가 그게 웬 봉변이냐.'


'급하게 들쳐업고 모텔을 빠져 나오는데, 프런트에서 나를 막 붙잡는거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말이야. 나더러 주민등록증을 내 놓으라고.'


'아니, 왜?'


'생각해봐라. 그 여자애가 죽기라도 하면, 내가 죽였는지, 아니면 진짜 아파서 죽었는지 모르잖아.


모텔 같은 숙박업소에선 살인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도피중인 수배자들도 많아서 그런지 그런 경우엔 되게 민감하더라.'


재찬이를 곤경에 빠뜨렸던 여자는 분명, 재찬이의 등에서 신음도 하고, 꿈틀거렸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프런트는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꼼짝도 하지 않는 여자를 업고 나가면 빨간 머리는 어떻게 할까?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남자의 등에 업혀 나가는 여자... 이것만큼 이상한 광경도 없을 것이다.


희미하게 보이던 빛이 사라져 버렸다. 이대로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난 욕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영화나 소설에서 보니까, 마법사들이나 주술사들이 시체를 소생시키는 마법을 쓰던데, 내게 지금 그런 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이 시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면 되는데...


가만, 가만... 이거 흥미로운걸...


데리고는 못 나가지만, 가지고 나갈 순 있다.


그래, 어차피 이 여자는 지금 시체가 되어 있고, 시체란 건 결국 고깃덩어리하고 마찬가지다.


그럼, 가지고 나가면 된다. 난 시체의 허벅지와 팔을 만져 보았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근육과 같은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목욕을 한다고 욕탕 안에 온수를 받아 놓아서 욕실의 온도가 따뜻해, 아직 체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워 있는 시체를 돌려 등을 살펴보았다. 혈액응고가 시작되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반(屍班)도 보이지 않았다.


사후경직도, 혈액응고도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에겐 정말 큰 행운이다. 그리고, 나의 해부학 성적이 A+라는 것도. 열심히 공부하길 잘했다니까.


이 시체를 분해한 다음, 큰 가방에 담아 가지고 천연덕스럽게 나가면 된다.


혹시 프런트에서 빨간 머리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여자 분은요?'


이렇게 되면 곤란해진다. 이 모텔의 프런트는 현관의 정면에 위치해 있고, 프런트의 눈을 피해 현관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가지고 나간다는 것도 방법이 안 되었다. 결국, 이 큰 키의 시체가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 나가주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이다.


큰 키... 큰 키...


난 거울을 한 번 보았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룸으로 들어가 모텔의 뒤쪽으로 나 있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상가들만 좀 있을 뿐, 주택은 거의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예상 대로다.


모텔이란 곳은 건물의 디자인에 많은 신경을 쓴다. 이 '파라다이스' 모텔도 마치 궁전같이 보이게 짓느라 벽돌을 돌출 시키게 하는 형식으로 지어져 있다.


내 머리 속은 퍼즐을 끼워 맞추듯 작전에 필요한 여러 조건을 검토하고 있었고, 결론은 이 시체를 걸어나가게 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 그러자면 일단 수술도구들이 필요한데... 어떤 것들이 필요하지?


톱과 여러 크기의 칼들, 남자용 가방과 여자용 쌕 몇 개, 그리고, 쓰레기 봉지와 청테이프와 모자. 자, 그럼 모텔 탈출 작전을 시작하자.


준비는 끝났다. 상점들이 서서히 문이 닫기 시작하는 시내를 정신 없이 돌아다녀, 겨우 장만할 수 있었다.


난 정말 천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기쁨보다도 더 나를 휘감고 있는 건 이대로 달아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저 모텔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약해지는 의지를 붙잡았던건, 해부학 첫 시간, 교수님이 해 주셨던 이야기였다.


'의사는 인간이 아니다. 의사는 강철이다.'


그래, 나에게는 강철과 같은 의지가 있다. 이대로 달아난다면 난 평생 파렴치한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할 것이다.


고작 이런 일로 핑크빛 미래를 어둡게 할 수는 없다. 난 당당하게 파라다이스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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