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나구리와 서 씨
================
그날, 광고회사 ‘파랑새’의 직원인 나구리는 심심했다.
늘어져 있는 게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자, 동기였던 서 씨가 슬쩍 고개를 빼서 물었다.
“구리 씨. 벌써 오늘 일 끝낸 거야?”
“아니.”
그녀의 질문에 돌아온 건 시원할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무책임한 답변이었다.
“해야 할 일이 의욕보다 많으면 뭔가 거꾸로 일이 안 되진 않아?”
“등신같은 소리지만 이상하게 공감이 되는 소리네.”
“그러니까 마감 직전까지 버티다 일을 시작하는 거야.”
“…대체 왜?”
“스릴이 있으니까. 제시간에 일을 끝낼지. 아니면 시간을 넘겨서 부장한테 머리를 붙들릴지! 그정도의 긴장감이 있어야 직장 생활이 즐겁지 않겠어?”
“오호라. 이제야 좀 이해가 가는군.”
“이해 해준다니 기쁘네. 그런데 서 씨. 복화술 익혔어? 어쩐지 목소리도 뒤에서 들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이해한 나구리는 이마 위로 식은땀을 흘렸다.
“저기 서 씨. 솔직하게 답해주면 좋겠는데.”
“질문도 답변도 예상은 되지만, 한번 말해봐.”
“최근에 복화술을 익히신 적은?”
“없지요.”
“엄청 허스키한 느낌의 남자 성대모사에 자신있으신가요?”
“장기자랑 대회에서 굳이 해야 한다면, 그딴 장기는 떼를 써서라도 거절할 거야. 요즘 시대가 어느때인데.”
“혹시 제3의 팔이나 초능력을 익힌 적이 있나요?”
“그런 능력이 있으면 광고회사에 취직하는 게 아니라 영화사에 취직했겠지. 아, 친구가 그런 능력자긴 해.”
“있긴 했구나. 그런 사람.”
“운석이 떨어지다가 멈춘 동네인데 뭔들 없을가.”
“즉.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손은 서 씨의 손이 아니란 거지?”
“덧붙이자면 뭔가 장난감 같은 것도 아니야.”
“그야 그렇겠지. 털이 북슬북슬하고 열기까지 있는데, 세상의 어떤 애들이 이런 손을 좋아하겠어.”
“헐크 팬이라든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구만. 어. 음. 그리고…….”
나구리는 함박웃음을 입에 억지로 걸어놓은 채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를 썼다.
“서 씨. 오늘 날씨 좋지?”
“점심 지나서 써먹을 화제는 아닌 거 같은데.”
“화제 좀 맞춰주면 안 돼? 이왕이면 세 시간 정도. 그래. 퇴근 직전까지 말이야.”
“그냥 지금이라도 모르는 척 하는 거 그만두고 뒤를 돌아보는 게 어때?”
“굳이 답변을 하자면 ‘싫어’가 내 답이야. 나, 나구리는 담을 타고 소리 없이 넘어가는 능구렁이처럼 아무말 듣지 않고 하루를 넘기면서 월급일까지 버티고 싶다, 이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나구리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현실을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은 임기응변에 불과했다.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린 장본인은 사회인 답게 분노를 절제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슬슬 그 잘난 언변이 떨어질 때도 됐군.”
“히끅.”
“어쩐지 보고서가 요즘 퇴근 5분 전에 칼같이 맞춰서 올라온다 싶었는데. 그런 마음이었다 그거지?”
“그, 늦지는 않았잖아요?”
“그래. 너는 안 늦었지. 확실히 너는 안 늦었어.”
나구리의 머리뼈에서 나서는 안 될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아얏. 아. 아야얏. 아이에에에. 아얏. 그/아/아/악.”
“그런데 나구리. 왜 니 보고서 보느라 내 퇴근 시간이 늦어져야 하는지 설명해 볼까?”
“시, 시간과 예산을 아주 많이 주신다면야…….”
“두 가지 선택지를 제안하지.”
나구리가 눈살 위에서 안구 위로 가해지는 압력을 느끼고 신음을 흘리든 말든. 부장은 담담하게 거절해선 안 되는 제안을 입으로 읊었다.
“하나. 경찰이 빠를지 네 두개골이 박살나는 게 빠른지 실험한다. 둘. 이번 주 화장실 청소 당번을 전담하고, 일은 빠릿하게 끝낸다. 어느쪽이 현명할까?”
“세번째. 싸게 협상할 수 있는 청소업체를 찾아온다……. 같은 선택지는 어떠세요?”
“사장은 설득할 수 있겠나? 그 짠돌이 이기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최적의 예산안과 프리젠테이션을 약속드리죠.”
“4시간 준다. 다녀와.”
***
나구리가 가방과 명함만 챙겨서 총알처럼 튀어나가고 나서 열흘 뒤.
청소업체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돼 나흘 정도 파랑새에 왔던 나라는 다른 동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는 그걸 무심코 입에 올렸다.
“저 아저씨. 상사한테 저렇게 구박받으면서 용케 안짤리네…….”
“그렇지?”
“히익?”
“아, 미안.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라가 까치발까지 들며 놀라는 모습에 거꾸로 당황한 서 씨는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사과했다. 나라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미르와 관련된 일만 아니면 그녀는 뭐든 낯을 가리고 소극적으로 대하는 아웃사이더였으니까. 친한 친구가 조금이라도 있는 학교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는 경우 자체가 적었던 것이다.
“아, 아녜요. 제가 과, 과하게 반응한 건데데데요.”
“응. 일단 진정 좀 할까? 여기, 물 좀 마셔.”
“죄송해요……. 후, 원래 이런 성격이어서…….”
서 씨는 숨을 돌리는 나라의 모습이 겁 많은 고양이와 겹쳐보인다는 것을 깨닿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용케 그런 성격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구나.”
“돈 없는 척 하면서 남자친구 한테 얻어먹으면서 사귀고 싶지는 않아서요.”
“어머나. 그런 부분은 묘하게 똑부러지네.”
“그보다 저 아저씨……. 정말로 괜찮은 거죠?”
잠깐 사이 나구리가 또 부장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이번엔 목을 붙들린 채 허공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동료 직원들은 부장을 말리기는커녕 ‘초크슬램이다! 이번엔 분명 초크슬램이야!’라며 열광하고 있었다.
“괜찮겠지. 죽지는 않을 거야. 늘 그랬으니까. 저 사람은 자기가 급할 때는 어떻게든 해내니까. 정말 웃기다니까.”
그 말은 대책 없는 동료 직원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말만으로는 전부 알 수 없는 법.
“어라라.”
나라는 서 씨의 눈에 깃들어 있는 것이 냉랭한 말과 속성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 감정의 무게를 아는 사람으로서 서 씨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 초크슬램 자세로 붙들려 있던 나구리는 기어코 회의용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 쳐졌다.
나구리는 일어나지 못했고, 심판은 링 대신 컵을 두들기며 그가 완전히 뻗었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동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몇몇은 “쳇, 돈만 날렸네. 피니시는 파워밤이라고 생각했는데”라며 투덜거렸다.
***
이곳은 K국의 S시.
거대 운석이 낙하하다 허공에서 멈춘 기묘한 도시.
이것은 S시에 사는 사람들의 혼돈과, 혼돈의 이야기다.
세계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9,9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