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시간이 끝나기 20분 전, 교수는 갑자기 분필을 멈추었다. 그리고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탁탁 거리는 소리를 음악인 것마냥 몸을 맡기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던 학생들은 교수의 이변에 가까운 돌발행동에 놀라 교수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여러분, 저는 어제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 갔는데 아무도 나에게 인사를 해주지 않았지요. 거실로 가보니 마누라는 세상 모르고 TV를 보고 있었고 아들은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습니다. 뭐... 특별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저 일상일 뿐이죠.
그리고 저도 제 방에 들어가 제 일상, 그러니까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책은 좋아요. ...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책만 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죠. 그렇게 읽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누라의 웃음소리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소파에 앉아서 몸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을 상상하자 화가 치밀었어요.
그래서 전 나가서 마누라한테 좀 조용히 좀 볼 수 없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마누라가 대들더군요. 들어가서 책이나 보라고, 나한테 뭐 보태준 거 있냐고. 그래서 전 말했습니다. '이 여편네가, 돈 꼬박꼬박 받아서 허구언 날 놀기만 하면서!' 예, 해서는 안될 말이었지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옛날부터 제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하고 지금도 한푼이라도 아껴쓰기 위해 청소업자 한명 부르지 않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 때 전 그런 걸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손찌검을 했지요. 충격 받았을 겁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거든요. 저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 실수했구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눈 앞에 있는 TV를 넘어트렸습니다. 그제서야 아들이 거실로 나오더군요.
아들도 이런 제 모습에 놀란 것 같았습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안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 술 마셨냐고 물어보더군요. 더 화났습니다. 아들은 제가 술을 한잔만 마셔도 티가 나는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아들한테 닥치라고 말한 뒤 컴퓨터 좀 작작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더군요. '자기는 허구언날 책만 보면서 뭐가 잘났다고 훈계냐.' 하고 말이죠. 아들은 마누라가 엎드리고 우는 모습을 보더니 더 화를 냈습니다.
그 때의 전 억울했지요. '가족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 뿐인데...' 하고 말이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번엔 아들을 때렸습니다. 서로 말 한마디 없긴 해도 아들은 그래도 날 아버지라고 생각했는지 반항은 안 하더군요. 아니... 못한 거일 수도 있죠. 그리고 저는 아들 방에 있는 컴퓨터를 버렸습니다. 어차피 게임이나 하는 거 왜 갖고 다니냐고 말이죠."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평소 만만한 교수라고 찍혀서 출석부에 체크만 하고 나면 놀거나 도망가기 바빴던 학생들이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처음보는 교수의 모습에 대한 당황과 궁금함이 서린 눈. 교수는 수십명의 학생들을 한명한명 살펴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맹세하건데 이 일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 저지른 폭력입니다. 저는 늘 대화를 중시했지요. 대화를 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화 자체가 안되자 저는 폭력을 사용한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이 이야기가 수업이 도움이 되거나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당장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짜증나고 지루하지만 제게 집은 명예나 권위같은 것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그래서 용기내서 묻습니다... 여러분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수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손을 들고 나서려 하지 않았다. 1분... 2분... 3분... 시간은 흐르고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교수도 학생도 이대로 수업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누군가가 쭈뼛쭈뼛 손을 들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저희 집은요..."
※※※※
학기말 테스트가 끝난 날의 저녁, 몇명의 학생들은 집에 가는 대신 강의실에 남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죠?"
교수였다. 여전히 재미 없고 만만하기로 소문 났지만 요즘은 인상이 밝아진듯한 느낌이 들어 적어도 싫은 교수는 아니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러분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남아달라고 했어요. 음식도 주문했으니 배고파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를 하나 빼서 학생들을 모두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제가 여러분 나이 때, 속으로만 꿈꾸던 미래가 하나 있었어요. 가족들이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즐기고... 그런 가족이 진짜 가족이구나... 서로 같은 취미를 가졌을 때 가족은 하나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죠. 저는 책을 좋아했고 아내는 TV를 좋아했어요. 아들은 요즘 아이들이 그렇듯 하루종일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고요. 그래서 전 어떻게든 책을 보게 하려고 책의 좋은 점을 이야기 했어요. 하지만 십수년이 넘게 실패했죠. 그런데 그것은 강박관념이었어요."
강의실 문이 열리고 모인 사람들이 아무리 먹어도 다 해치울 수 없을 것 같은 양의 음식들이 도착했다. 교수는 학생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음식을 나누고 입에 음식을 하나씩 집어넣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의 조언은 정말로 충격적이었어요. 모든 취미를 거실에서 하라니... 반신반의했지만 전 그 날 마트에 가서 노트북 한대, 접이식 책상, 거실에 쓸만한 카펫을 샀지요. 이 나이에 혼자 들고가긴 버거웠지만 오늘 전부 다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낑낑거리고 들고가서 아들과 아내와 함께 거실에 앉았습니다. 바닥에요.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사과했습니다. 받아들이더군요. 하지만 말로만 하는 대답이었어요. 그 때 말했습니다. 앞으로 가급적이면 모든 걸 거실에서 하자고요."
학생들은 교수의 말보다는 음식에 집중한 듯 교수의 말이 멈춘지도 모르고 젓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교수는 오히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가볍게 기지개를 핀 뒤 다시 말을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습니다. 아들은 노트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저는 TV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죠. 아내는 아내대로 맘이 불편한지 엉덩이를 들썩거렸고요. 하지만 첫 날부터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서로의 모습이 보이니까 상투적인 말이라도 이어진 것이죠.
'오늘 뭐 했냐.', '그거 재밌니?', '내일은 뭐할거다..', '과일이라도 먹을까요?'... 그렇게 많은 대화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0이었던 대화가 이어진다는 건 정말로 엄청난 것이었지요.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서로 뭘 하는지 알게 됐어요. 아내는 TV라면 마냥 좋은 줄 알았더니 이것저것 가려보고 컴퓨터는 그, 스타크래프트? 그런 것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저런 게임도 하고 숙제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제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더군요. 제 아들도... 제가 읽고 있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빠는 전공책만 보는 줄 알았는데 소설도 읽네? 친구가 재밌다고 하던 책인데.'라면서 책 내용을 물어봤어요."
학생 한명이 콜라를 따라서 교수에게 가져다 주었다. 교수는 마침 목이 말랐는지 단숨에 마시고는 새나오려는 트림을 기침으로 가렸다.
"물론 나쁜 점도 있었어요. 저는 하루에 두세권씩 읽던 책을 한권도 겨우 읽는 수준이 되었고 아들은 인터넷을 하다가 몇번씩 화들짝 놀라서 화면을 가리고... 뭘 보고 있는지는 뻔하지만요. 아내도 가족이 다 모여 있으니 과일이니 뭐니 준비해야 한다고 투덜거리더군요.
하지만 그만두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제가 무서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한번씩은 웃어주니까... 제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교수는 여기까지 말하고 학생 쪽으로 의자를 당긴 뒤 같이 음식을 먹었다. 학생들은 그런 교수를 멋있다고 추켜 세우고 고지식한 충고를 할 때마다 야유를 보내기도 하며 그 시간을 즐겼다.
※※※※
-야, 너 그 수업듣게?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네, 전공이라서요. 다른 선배들도 괜찮다고 하고..
-아서라, 아서. 그 교수 하루종일 칠판만 보다가 끝내는 인간이야. 지루해서 죽을 걸?
-응? 누나. 요즘 교수님 수업 안 들어봤구나? 옛날보다 훨씬 들을만해.
-엥? 말도 안돼. 그 인간은 그렇게 살다 죽을 인간인데.
-아냐아냐. 팔불출이라서 허구언날 자기 가족 얘기를 먼저 하는 건 별로지만 말야.
-끝-
쓰다가 귀찮아서 찍 싼 감이(...) 그러므로 자유창작에~
일하는 양이 전보다 줄은게 함정이지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