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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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기] Hello, World! (0) 2016/05/03 AM 06:02
처음에 빛이 있었다.

소녀가 깨어났다. 캡슐이 서서히 열린다. 무서운 주삿바늘이 가득 담긴 은빛 손수레, 속이 비어있는 비커가 가득 들어있는 투명한 캐비닛, 하얀 천장. 방 안에서 색이 있는 건 옷걸이에 걸려 있는 녹빛 의사 가운뿐.
다시 깨어났지만 와준 사람도, 변해있는 것조차도 없었다. 소녀는 착하게 가만히 있으면 여기 올 거라던 엄마아빠를 원망한다. 골몰히 앉아있던 소녀는 이제 가만히 있지 않기로 한다.
소녀는 크레파스를 들고 하얀 벽이란 벽에는 죄다 자기 흔적을 남긴다. 알록달록 소녀가 상상하던 바깥세상을 그려본다. 양팔로도 안을 수 없는 커다란 갈색 기둥에는 위에 뻗어 나가면서 잘기잘게 나누어진 여러 개의 팔에 초록색 털이 무수히 붙어있다. 그 밑에는 둥근 분홍 울타리를 얼굴에 두르고 활짝 웃은 아이가 있다. 소녀는 낑낑대며 사다리를 가져와서 벽에 세우고 올라탄다. 그리고 빨간색 크레파스로 달팽이 하나를 그린다. 소녀가 태어나서 실제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 엄마가 소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것들이었다.

소녀는 복도를 달리다가 어느 문 앞에 선다. 굳게 닫혀있는 철문. 아빠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곳이지만, 소녀는 마음대로 하기로 다짐하지 않았는가. 먼저 아빠가 했던 대로 문 옆에 달린 돋보기에 눈을 대 보았다. 날카로운 소리가 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돋보기 밑에 있는 숫자 버튼들을 막 눌러본다. 돋보기는 소녀를 내쫓으려는 듯이 큰 소리를 연달아서 낸다. 뾰로통해진 소녀는 바닥에 앉아서 떼쓰듯이 데굴데굴 구른다. 이내, 스케치북을 넘기고 크레용으로 숫자를 있는 대로 적는다. 하얀 도화지에 빽빽하게 검은 숫자를 다 채운 소녀는 돋보기에게 자랑하듯이 그것을 보여준다. 돋보기는 신기한 듯이 자신의 렌즈를 조절하면서 바라보다가 철문을 연다. 소녀는 위풍당당하게 발을 허리 높이까지 올리며 터벅터벅 방에 입성한다.

그곳에는 소녀가 좋아하는 것이 잔뜩 있었다. 수많은 로봇이 독에 늘어져 서 있거나, 바닥에 누워있었다. 정비공 아저씨들이 열심히 나사 돌리는 데에 쓰던 멍키스패너, 로봇들 밥 주는 기름통, 실뜨기하고 싶도록 엉켜있는 전선들…. 소녀는 신나서 방방 뛰다가, 시무룩한 듯 덩그러니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로봇 하나를 본다. 오토바이 바이저같은 머리에 두 갈래로 갈라진 뿔을 단 파란색 로봇. 몸은 아빠와 비슷한 거구지만, 바위처럼 각져있어서 넘어져도 전혀 아프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매끈한 파란 장갑판을 자랑하던 이 로봇 역시 다시 깨어나고 보니 먼지들의 안식처가 되어있었다. 소녀는 이 로봇을 깨우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소녀는 로봇을 흔들어 깨워보려고 한다. 있는 힘을 다해 낑낑대며 어깨를 밀어보지만, 로봇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로봇 주변에 있는 단말기들을 살펴본다. 하나씩 거기 붙어있는 버튼들을 눌러보았지만, 로봇은 역시 반응하지 않는다. 소녀는 스케치북을 넘겨서 다시 빽빽하게 숫자들을 써내려간다. 검게 변한 스케치북을 반대로 들어서 로봇에게 보여준다. 로봇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소녀는 고개를 내밀어서 자기가 스케치북을 반대로 들었는지 확인해보려다 앞으로 넘어진다. 울상이 된 소녀가 고개를 들다가 드디어 고개를 푹 숙이던 로봇과 눈-바이저 안에 눈이 있다면…-이 마주치게 된다. 소녀는 엎드린 채로 다시 스케치북을 로봇에게 보여준다. 소녀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로봇은 계속 침묵한다. 소녀는 벌떡 일어나서 종이를 뜯고 로봇의 이마에 팍 붙여버린다. 종이가 힘아리 없이 떨어지자, 소녀는 얼른 스카치 테이프를 이어붙였다. 강시의 부적처럼 소스코드를 붙인 로봇이 벌떡 일어나서 콩콩 소녀 옆으로 뛰어갈까?

아니었다. 소녀가 침울해져서 로봇처럼 주저앉으려던 찰나, 커다랗고 검은 로봇팔이 소녀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간다. 깜짝 놀란 소녀가 고개를 치켜들지만, 천장이 까마득해서 팔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불가사의한 로봇팔은 소녀가 붙인 종이를 뗀다. 그리고 손에 눈이라도 달린 듯이 그걸 계속 들고 있다가, 종이를 소녀에게 건네준다. 로봇팔은 손목을 꺾어서 자기 팔뚝에서 케이블 하나를 꺼내고 파란 로봇 뒷목에 있는 작은 구멍에 자기의 것을 꽂는다. 투명해 보이는 케이블 속에서 무수한 반딧불들이 파란 로봇을 향해 날아간다.
그러자 파란 로봇이 무서운 주사라도 맞은 듯이 벌떡 일어난다. 소녀의 얼굴이 아까 그린 꽃처럼 환해진다. 파란 로봇은 고개 숙여서 소녀를 바라보다가 무릎을 바닥으로 굽혀 자세를 낮춘다.
[ ^_^ ]
파란 로봇의 바이저에 나타난 빛나는 표정. 소녀에게 말동무가 생긴 첫 순간.

“세상에 어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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