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마이피

네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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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행복이 시작되었다. (0) 2018/02/17 PM 08:10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A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뚜둑 뚝 뚜둑. 짧게 끊어지는 소리에 쓴 웃음을 짓는다.

전동차가 도착하고 A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인데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지하철에 있었다. A는 한발짝 물러서 기다렸다가 전동차에 올라탔다.

A가 손잡이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전동차 안에 따뜻함이 흘러나왔다. 손을 꼬옥 잡고 웃고 있는 연인, 아이들과 놀러 가는 가족,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통화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얼굴에서 행복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요새 중국에서 미세 먼지가 몰려온 탓에 며칠째 해를 보지 못했다. 덕분에 주중에 출근할 때면 잿빛 도시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주중과 확연히 달랐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화창한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둥싱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보니 그 안에 몸을 맡긴 듯 서서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A가 핸드폰을 꺼내 카카오톡을 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여전히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잘 자라는 달콤한 인사가 끝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B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느긋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침대에서 자고 있을 B가 떠올랐다.

핸드폰 화면이 꺼지면서 A의 얼굴이 비쳤다. 잠시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슬며시 미소를 지은 모습이 전동차 내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역에서 나온 A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날씨가 맑아졌지만, 여전히 겨울이었다. 하아. 숨을 내뱉자 하얀 김이 길게 늘어졌다. 몸을 웅크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하얀 핫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살며시 흔들고 얼굴에 비비자 따스한 온기가 얼굴을 감쌌다.

A가 곧장 길 건너 편의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추위에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펭귄 같았다. 그렇게 힘겹게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원이 웃으며 반겨줬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날이 많이 춥죠?”

점원의 인사에 맞춰 A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게요. 역시 겨울은 겨울이에요. 날이 맑아서 따뜻해졌나 싶었는데.”

호호 웃는 소리에 A가 점원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티를 버리지 못한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항상 사던 거 선반 뒤쪽에 놔뒀어요.”

매번 고마워요.”

점원의 손길을 따라 A가 샌드위치가 있는 선반으로 갔다. 다양한 샌드위치가 있지만, 선반 구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스윽 훑어보다 잡히는 두 개의 샌드위치를 꺼냈다. 베이컨 토마토 샌드위치, 야채 샐러드 샌드위치. 두 개 다 B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다.

계산대로 가서 A가 핸드폰을 꺼냈다. 잠금 버튼을 누르자 화면 위로 알림 표시가 나타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빠르게 잠금 해제하고 알림줄을 길게 늘였다. 하지만 그 상태줄에 A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A가 점원에게 카드를 건넨 후 카카오톡을 열었다. 숫자 1은 놀리듯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얄미운 엉덩이를 A의 눈앞에서 흔들고 있었다. 아직도 자고 있나? 정말 잠이 많은 사람이니까.

부럽네요.”

?”

A가 카드를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원이 A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샌드위치를 봉투에 담았다.

매번 샌드위치 사는 거 애인한테 주는 거죠?”

. 그건 맞는데……”

어떻게 알았냐고요?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점원의 말에 A는 지하철에서 봤던 자신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구나.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는 구나.

봉투를 받은 A는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한 손에는 봉투를, 나머지 한 손에는 핫팩을 쥐고 B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발걸음은 가벼웠다.

 

띵동.

벨을 누르고 A는 잠시 기다렸다. 예상대로 문 안쪽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루루.

연결음이 이어지더니 B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늘어지는 목소리가 핸드폰을 기어 나와 A를 맞이했다. 뒤이어 하품 소리가 몇 번이나 이어졌다.

아직까지 자고 있었던 거야?”

? 지금 몇 시인데?”

B의 목소리는 여전히 붕 떠 있었다. 비몽사몽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A의 귀를 사로잡았다. A는 살며시 핸드폰을 쥐고 얼굴에 더 가까이 가져갔다.

이제 열한시 넘었어.”

벌써 그렇게 됐나? 미안 어제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으이구. 그럴 줄 알았어. 집 앞이니까 문이나 열어줘.”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B가 나왔다. A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B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입에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B는 서둘러 옷으로 입을 닦았다. 하지만 닦은 침과 다르게 헝클어진 머리는 여전히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밉지 않았다.

얼른 씻고 와. 샌드위치 사왔으니까.”

매번 고마워.”

웃으며 BA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A가 미소 지었다.

추울 텐데 어서 들어와. 금방 씻고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봉투를 받은 B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A는 그러한 B의 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조금 더 있어도 좋지 않았을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눈길만 주었다.

화장실을 들어가기 전 B가 그런 A를 보았다. 그리고 A의 앞으로 다가갔다. 말없이 양팔을 벌리자 A가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니까. 알았지?”

B의 품 안에서 A가 눈을 깜빡였다. 이럴 때 보면 B가 다르게 느껴졌다. 매번 아이 같았는데 이럴 때면 선수가 따로 없었다. 손을 뻗어 B의 등 뒤를 감싸며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B의 냄새가 느껴졌다.

 

B가 화장실로 가자 A는 홀로 방안에 남겨졌다. 침대에 앉아 A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요일마다 오는 방이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 , . 언젠가 봤던 티브이 프로그램 제목이 떠올랐다. 정말 책밖에 없는 방이었다.

정말 책을 좋아하는구나.’

책이 있는 곳은 책장 만이 아니었다. 이미 책장에는 이중 삼중으로 책을 쌓아 놓았고 그래도 남는 책들은 책상 모서리나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흔한 게임기나 장난 거리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고리타분한 할아버지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게 20대 청춘의 방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A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하지만 그런 B A는 좋아했다. 언젠가 B에게서 받은 단편 소설집은 아직도 가방에 넣어서 들고 다닌다.

-너와 부딪친 순간 행복이 시작되었다.

A가 책 겉표지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솔직히 많이 놀랐다. 물론 B가 주는 선물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책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제목일 줄은 몰랐다.

B는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어려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탓에 사랑 이야기를 읽는 것을 본 적이 드물었다. 더구나 B는 연애 서설이라면 극도로 싫어했다. 단순 소비라면서 그에 관련된 책은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B가 준 이 책은 여느 연애 소설과는 달랐다. 각각의 사랑이 담긴 이야기들은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랑이 담겨있었다. 애절한 사랑 앞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수줍은 사랑 앞에서는 A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빠져버리고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하얗던 책 표지는 너덜너덜해져서 테이프로 고정을 했다.

손을 뻗어 책 표지를 만졌다. 손끝으로 B의 손길이 느껴졌다. 분명 B도 이 책을 봤겠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B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미안. 오래 기다렸어?”

그때 문이 열리면서 B가 들어왔다. A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 좋은 타이밍이야.”

A가 천천히 책을 펼쳤다. 이미 질릴 정도로 봤지만, 오늘도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사락.

방안에서 책을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두 사람은 조용히 책을 읽었다. 이따금 차를 마시거나 샌드위치를 먹었지만, 대화를 하지 않았다.

A가 책을 읽다 고개를 덜었다. 슬며시 A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순간이 좋다. 이렇게 둘이서 책을 읽을 때면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풀었다. 일상에서 매일 치이고 살았던 탓일까? 편안한 침묵이 A의 몸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돌려 B를 보았다.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책을 읽는지 겉표지에 어려워 보이는 단어가 가득했다. 그저 책을 읽는 모습이건만 보기 좋았다. 만일 B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A가 책을 내려놓고 팔을 길게 쭉 뻗었다. 한 자세로 오래 책을 본 탓에 몸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스트레칭을 하자 입에서 하품이 나왔다.

지루해?”

책을 읽던 B가 고개를 들었다. A는 천천히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아냐. 책 읽다가 잠시 쉬는 중이야.”

그래? 그러면 나도 쉬어야겠다.”

B가 책을 내려놓고 A에게 다가왔다. A의 옆에 앉아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 책 기억해?”

그런 B에게 A가 책을 내밀었다. 책을 보고는 B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당연히 기억하지.”

책을 받은 B가 천천히 책을 넘겼다. 스르륵. 책이 넘어가는 소리가 두 사람의 틈을 채웠다.

이 책. 난 많이 좋아해. 연애 소설은 별로인데 이 책은 좀 특별하거든.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니까. 특히 여기 이 부분에서 눈물도 나왔다니까.”

해맑게 웃는 B를 보자 A가 미소 지었다.

너와 부딪친 순간 행복이 시작되었다라. 정말 그렇네.”

A가 고개를 내밀어 B와 입을 맞췄다. 입술이 살짝 닿는 거리에서 두 사람의 숨결이 뒤섞였다.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 위의 서로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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