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의지도, 동기도, 능력도, 실력도, 사회적 인망도 있는 사람이 다친 사람을 살리려는 '시스템'을 만들려다 사회의 벽에 부딪혀 실패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7백여 페이지에 걸친 절규. 그러나 그와 그의 팀원 몇 사람의 희생에 기댄 '시스템'은 2020년 2월 지금까지도 완성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그의 바람대로 될 길은 요원하다. 그가 그토록 만들고 싶어하는 그 '시스템'은 아직까지도 오롯이 그들의 희생으로 돌아가고 있다. 갔었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지난달까진 돌아갔었다. 병원과의 갈등에 팀원들의 고충에 닳다닳다 그는 결국 지난달 사의를 표했고 2월 5일 그의 사표는 수리되었다.
이 책은 내가 왈가왈부 평가해서는 안 되는 책이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십여 년 인생이, 희생이, 번뇌가 모두 녹아있는 책으로 현실에 부딪히고 본인의 고집 때문에 주변인들의 희생되어가는 과정속에서 닳아빠지고 뭉그러지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이런 글을 나 같은 범부가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 문장이 어떻네 구성이 어떻네 얕은 식견과 지식으로 왈가왈부 해서는 안 되는 책.
이국종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어떤 일들을 겪어왔는지 신문기사로나마 접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은 꽤 오래 해왔으나 읽지 않다가, 리디 셀렉트에 있길래 고민 없이 다운로드해서 읽었다. 그리고 두 권을 읽는 데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그리 얇지도 않은 책 두 권을 읽는데. 토요일 잠 들 즈음에 읽기 시작해 월요일 저녁 시간에 다 읽었다.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종이책도 구매했다. 그에게 돌아가는 인세는 뭐 얼마 안 되겠지만 보태 드리고 싶어서.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 알리고 싶어서.
책의 내용을 내가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고, 책에서 그의 좌절을 잘 표현한 부분 몇 군데 그대로 가져와본다. 그냥 몇 구절을 가져왔을 뿐. 책 전체에 걸쳐 그가 느꼈던 좌절, 절망, 그리고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이국종 교수에게 관심이 있던 사람이건 아니건, 중증외상에 관심이 있건 없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간에 그대의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선진국에서라면 살았을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터무니없이 죽어나갔다. (2007년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의 '예방 가능한 사망률'은 대부분 15퍼센트 이하였고, 확률을 한 자릿수로 낮춘 지역도 많았다. 2008년 한국의 수치는 32.6퍼센트였다. 오래전부터 그래왔고 모두가 무관심했으므로 새삼스럽지 않았다. (관련 기사 :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9/12/1031996/)
- 정부에서 밀어붙여주었으면 싶었으나 그 역시 더뎠다. 중증외상과 관련한 정책 추진이 답보 상태인 데 대해 허 위원에게 답답한 속내를 토로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되물었다. ㅡ이 교수님. 대한민국에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만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그것만이 심각하고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문제인가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예술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녹록한 부분이 있는 줄 아세요? 머릿속이 서늘했다. 허 위원의 말은 사실을 짚었을 뿐 비난도 질책도 아니었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진행해나가는 일들은 수없이 많고 중증외상 문제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물음과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 사회가 움직이는 시스템의 근간은 모르는 채 사는 것이 좋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정부나 사회 시스템을 개선해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낫다. 일부 '선수'들만이 그런 시스템을 이용해 개인의 이윤을 극대화할 뿐이다. 나는 이 사회 안에서 평번하게 자영업자로서의 의사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주제넘게 시스템에 접근한 탓에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 북한군이나 해외 망명자들의 인권에 대한 고민 가운데 100분의 1만큼이라도 피다가 속에서 환자와 함께 신음하는 의료진을 생각한다면, 정책이 이따위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잘 자는 사람들의 책상에서 결정되는 정책에 따라 24시간 쉼 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생사여탈이 결정되는 현실에 신물이 났다. 나는 그런 허망한 시스템 아닌 시스템 속에서 최전선에 내몰려 있었다. 진작 종료했었어야 하는 중증외상 센터를 계속 끌고 오면서 어쩌다 정치적 이슈가 되는 환자들을 만났고, 그들이 치료되어 살아날 때마다 무지개처럼 제시되던 헛소리들을 믿어가며 너무 오래 버텨왔다.
이 책에는 몇 번의 사회적 큰 이슈들이 나온다
아덴만 여명 작전의 석 선장 이슈. 세월호 이슈. 판문점을 통해 월남한 북한군 이슈. 특히 석 선장 관련했던 내용이 아주 길게 묘사되는데 상황을 모르던 일반인으로서는 그냥 한 사람이 와서 치료를 받았구나. 정도였으나 물밑에서 일어나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나니 많은 일이 새롭게 보였다. 굳이 그 일뿐만 아니라, 나와 직 간접적으로 상관있는 많은 일들이 그렇게 돌아갔을 터다.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희생과 노고에 의해.
오로지 그와 그의 팀의 능력과 희생으로 고된 환경에서 그들은 너무 오래 버텼다. 한 달 200시간.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꽤 열심히 일했다고 말할 때 일 한 시간일 것이다. 나는 보통... 하루 아홉시간? 그리 열심히 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달 보통 22일 일한다고 치고 200시간이 약간 안된다. 그러나 그의 팀에서 일한 간호사는 한 달에 380시간을 일했다고 한다. 그냥 나같이 펜대나 굴리는 사무직도 아니고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을 핸들링하는 간호사가. 같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그들의 업무 강도는 나 같은 사람들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런 개인들의 희생으로만 돌아갈 시스템은 시스템이라 할 수 없다.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의사가 헬기를 타는 것이 불필요할 수 있다. 의사가 굳이 타지 않아도 살릴 수 있는 환자가 많다. 그러나 백 번에 한 번 두 번이라도 의사가 동승해서 환자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나는 중증외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냥 손쉽게 개인의 희생에 기댄 그런 시스템은 없어지는 게 낫다 고 말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나도 그냥 '쿨'해 보이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증 외상을 겪고 그의 희생으로 인해, 그와 그의 팀의 고된 희생으로 인해 살아난 환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내용은 전적으로 이국종교수 개인의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으로 다른 병원의 현실은 알 수 없다. 그의 개인적인 고충, 그의 팀의 고충은 책에도 여러번 나왔지만 원만하지 못한 성격의 그가, 병원 내 정치에 관심없는 그가 자초한 일일 수도 있다. 그의 성격이 조금 더 원만했다면, 그가 병원 내 정치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다면 그런 고충은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주대병원의 원장이 그의 편의를 더 봐주었다면, 심평원에서 그의 일의 특수성을 인정했다면, 권역외상센터가 그의 바램대로 개수가 아닌 규모에 맞춰 운영되었다면, 이국종 교수가 미운털이 박히지 않고 현실과 조금은 타협할 수 있었다면 현실은 조금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석 선장과 판문점 월남 병사같은 굵직한 이슈를 지나면서도, 꽤 긴 시간동안 그가 그렇게 울부짖었던 광역외상센터의 설립에도 불구하고 바라던 것과는 꽤 거리가 있는 그의 현실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 그저 아쉽다.
정말로 누구든 간에, 어떤 방법으로든 간에 반드시 한 번은 읽어 보길 권한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경험담을 책으로 만든건데 이것도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