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항상 독후감은 책 사진으로 시작했는데(혹은 사진을 생략하거나), 책 사진이나 내가 쓰는 뻘글을 보는 것보다 이 만화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와닿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사진이 아니라 그리 짧지만은 않은 만화로 글을 시작함.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언젠가 봤던 이 만화를 떠올리게 됐는데, 전체적인 책의 논조 자체가 위 만화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굉장히 사회비판적인 책으로 두 번째 읽은 마이클 샌델의 책(첫 번째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일단 외쿡 사람이 쓴 책이라 구체적인 사례로 드는 것도 우리에겐 낯설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언급하는 대상을 조금만 바꾸면 우리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데 무리가 없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논조는 단순하다. 기회는 얼핏 보면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발선도, 길을 가는 과정도 전혀 공정하지 않다는 것. 소위 능력주의-개인의 능력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어 누구든지 능력만큼 출세할 수 있다는 것-는 일견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보이지만 그 개인의 능력이 과연 공정하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의문과 그 의문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내용이 책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능력주의의 대안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능력주의의 단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라던가 능력주의를 대체할 다른 것은 뭐가 있을까라는 내용은 아주 짧게만 언급이 되는데, 대안 없는 비판... 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조금 고역이었다.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확실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중간에 내려놨을 듯. 책이 얇지도 않고, 페이지 당 글자가 적지도 않으며, 사용하는 단어 자체가 의미가 한 번에 와닿지 않는다. 아래와 같이.
'... 이러한 기술관료적 맹신이 포퓰리즘의 불만에 어떤 식으로 판을 깔아주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도 약화시켰다. 상품과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면서 글로별 경제의 흐름을 탄 사람들은 코스모폴리탄식 정체성을 진보적이고 뛰어나다고 치켜세우면서 보호주의, 종족주의, 갈등 등이 갖는 협소하고 파편적인 정체성과 비교했다.'
처음 읽을 땐 거의 외계어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또 좀 읽을 만하네... 처음 저 부분을 읽을 땐 거의 졸면서 봐서 그런가...
책에서 말하는 능력주의의 폐해에 대한 그의 주장을 따라가보면 그가 말하는 능력주의가 사다리 걷어차기와 꽤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미 사다리를 올라간 사람이 사다리를 걷어차 다른 사람들을 못 올라오게 하는 사다리 걷어차기와, 능력주의로 인해 능력 있는 사람을 골라내는데 그 사람을 고르는 기준이 되는 '능력'자체를 이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정하고, 그 기준이 되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다리가 되어 이미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들에 의해 걷어차여진다. 사다리의 아래쪽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쓰러진 사다리를 다시 세워야 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사다리 자체를 새로 만드는 노력을 더 해야 한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책에서도 몇 번 언급되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설치해놓은 사다리를 올라간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설치해 놓은 사다리로 편하게 올라간 사람들이 그렇게 편하게 올라간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개인의 성취인 양 으스대거나 그 자리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태도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학력자인 소수 엘리트들이 더 관용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은 수준의 대중에 비해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할지 모르나 저 학력자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때?'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럴만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그러나 실제로는 부모가 사다리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낭중지추-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눈에 띄게 뛰어난 사람들만 계층 이동에 성공한다. 아메리칸드림의 환상은 이미 끝난지 오래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할 거리 하나.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일명 '아메리칸드림'이 실제로 '거의' 동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언급하거나 알리는 것이 계층 아래의 사람들이 노력할 동기 자체를 없애는 일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까 모르게 쉬쉬하는 것이 나을까? 개개인이 생각하는 답과는 상관없이, 계층 아래의 사람보다 계층 위의 사람들은 다양한 매체로 훨씬 더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자기들을 변호 중이고, 그것은 꽤 성공적으로 동작하고 있다. 극소수의 부자들만 대상으로 하는 소위 '부자증세'를 대다수인 가난한 사람들이 반대한다. 어린애들 밥 주면 나라 망한다던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각종 직간접적인 지원은 주저 없이 받는다. 기초 노령연금은 계산할 필요도 없이, 노인 무임승차 비용만 2019년 기준 한 해 6455억 원(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20/11/1223959/)의 비용이 발생했고, 2021년 기준 서울의 초, 중 고교생 모두에게 무상급식을 지원하는 비용은 한 해 7271억 원(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2000505)이다. 애들 밥 주면 나라 망한다던 그분,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그분은 기어이 또 나와서 3선 서울 시장이 되었다. 물론 민주당 새끼들이 뭐같이 했지.... 에효...
정치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보자. 그리 좋지 않은 내 머리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 일인데 현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더 열성적으로 부자들을 변호하고 부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에 자기의 표를 주저 없이 던진다. 내 기준에서 생각하면 반대여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걸 심리학적으로 뭐라고 하던데... 여튼, 그들, 능력주의의 혜택을 보는 소수 엘리트들이 가진 언론에서는 백신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훨씬 더 큰 위험 대신 백신의 작은 위험을 더 크게 이야기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에 현혹된다. 실제로 백신이 위험하다고 치자. 정말로 맞으면 정말 희박한 확률로나마 죽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것이 맞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한가?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얘기를 백신을 안 맞은 젊은 사람이 전염시키게 되어서 감염된 다른 사람에게도 할 수 있을까? 그런 저급한 논리의 이야기가 심지어 잘 통하는 걸 보면 참... 아쉬운 생각이 든다. 어떤 목적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겠으나... 이런 일에서까지 그렇게 해야겠냐... 왜 언론에서 하는 숱한 거짓말들을 보면서도 그것들을 거짓말쟁이라고 욕하면서도 다른 건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지 않고 사실로 그저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듯 이야기한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이라고. 그러나 과연 그런가? 매일 운전해서 출퇴근하고, 이동하는 사람들은 개인 기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하루 몇 시간씩을 손해 본다. 가사도우미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에 비해 역시 하루에도 몇 시간씩을 손해 본다. 대학교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은 그 아르바이트 한 시간만큼 공부할 시간을 손해 보고, 이것은 성인이 돼서 공무원이나 임용고시 등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만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손해를 본다. 혼자 사회에 던져져 주경야독하며 공무원이나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책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대입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개인 교습을 집에서 받는 사람들은 이동하는 시간만큼 이득을 보고, 돈 있는 사람들, 이미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는 성공한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그 성공을 대물림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자원(주로 돈)을 쏟아붓는다. 위쪽의 만화에서 폴라의 부모님이 리처드의 부모님보다 폴라를 덜 사랑해서 리처드가 누리고 받은 만큼 해주지 못한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의 수능이라고 할 수 있는 SAT 점수의 경우, 상위 소득자(연 소득 20만 달러 이상)의 가정의 자녀가 1400점(1600점 만점) 이상을 기록할 가능성은 다섯에 하나, 하위 소득자(연 소득 2만 달러 이하)의 가정의 자녀가 1400점 이상을 기록할 확률은 오십에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를 대체할 다른 어떤 방법이 존재할 수 있을까? 능력대로 사람을 뽑거나 성공하지 않는다면, 특정 집단이나 단체에 유리한 가산점 등을 이용하여 기회가 평등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평등하도록 인위적으로 조절해야 하는 걸까? 작가가 말하는 이런 능력주의의 폐해에 기반해 생각해 보면 이런 주장이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가 평등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미 이곳저곳에서 봐서 잘 알고 있다. 그것으로 인한 문제점도 굳이 여기에 적지 않더라도 이미 여러 가지 사례로 잘 알고 있다. 본인의 노력이 아니라 누군가는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할당' 덕분에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책의 작가가 삼백오십여 쪽에 걸쳐 그렇게 비판하는 능력주의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방법으로 내놓는 것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현실적인 대한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고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대안을 내놓는다. 어느 누가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있을까 싶다. 작가의 생각이 아닌 작가가 언급한 다른 사람들이 내놓는 방안은 조금은 더 현실적이다. 작가가 소개한 누군가는 아메리칸드림은 경제적인 성공이라기보다는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지 않은 선에서 자기가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이 중요하다는 논조의 이야기를 하는데, 책 내내 이어지는 비판의 강도나 내용을 고려하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결론이다. 개인적으로는 책 중간 즈음에서 아주 짧게 언급되는(그나마도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설명) 북유럽식 해결책만이 그나마 현실성 있다고 생각하는 대안이다.
작가가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말하는 대부분의 내용에 동의한다. 나는 교육을 넉넉히 받은 편이라고는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아 입에 풀칠하며 살만하다는 알량한 우월감 비슷한 것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엘리트들의 폐해... 같은 생각을 하며 산 적도 있어 뜨끔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는 나 자신이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은 읽어 볼만하겠으나, 불평등에 관한 책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책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을 굉장히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편인데, 이런 불평등 관련한 책을 여러 권 읽은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기 시작할 즈음부터 시작해서, 이런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불평등이 내용이 주가 되는 책을 읽는 것은 평생 이 책이 마지막이 되길, 이런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이 조금은 바뀌길 바란다.
그렇게 착각할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