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라는 충격적이고 흥미로운 도입부의 ‘마션’을 쓴 앤디 위어의 세 번째 책이다. 도입부에서 저런 임팩트를 가진 책이 또 나올 수 있을까 모르겠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보실만한 분은 다 보셨을 테니 마음 놓고 첫 부분을 갖다 씀. 보통은 책을 두 번 보지 않는 편이나 마션은 세 번이나 읽었다. 한 번 읽자마자 바로 또 읽고… 나중에 한번 더 읽었다. 이 작가의 두 번째 책 ‘아르테미스’도 읽었으나 내게 그리 강렬한 기억을 주지는 못했었다. 달에서 사람이 살게 된 이후의 이야기라던가… 주인공의 성격이라던가 하는 큰 설정만 파편적으로 기억이 날뿐 이야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렇게 읽고 나서 이야기가 줄줄줄 기억나는 책이 책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아르테미스의 이야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읽으면서 내내 형만 한 아우 없네… 하면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은 이 책에는 맞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은 마션의 주인공 맷 데이먼보다(주인공 이름이 기억이 안 남) 훨씬 더 좆됐고 주인공이 좆된것과 재미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 자체도 굉장히 재미있다.
참고로 마션의 도입부의 원문은 이렇다. 항상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찾아본다.
I’m pretty much fucked.
That’s my considered opinion
Fucked .
거리두기 전문가. 좆된 맷 데이먼 선생.
이 이야기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에 영상화가 결정되었고, 좋아하는 배우인(나 말고도 많이들 좋아하시겠지만) 라이언 고슬링이 주연으로 결정되었다.‘라라랜드’의 그 라이언 고슬링이 이 소설의 주인공 그레이스를 연기하여 좆될 예정이다. 전반부 대사에 독백이 많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정들로 영상화하기 어려울 것 같은 부분이 책에서 많이 그려지는데, 영상으로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하다.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의 경우 대부분 그런 듯하다. 소설의 세밀한 묘사를 영화가 따라가기가 어렵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부족해 세밀한 감정들을 그려내지 못할 수도 있고, 배우들이 그려냈다고 해도 관객이 그런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읽어낼 수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될 때까지 다시 읽을 수 있는 반면에 영화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마션은 영화로 꽤 잘 만들어진 편인데도 그런 부분이 꽤 있었고, 내가 본 다른 소설 원작의 영화들도 많이 그랬다. 영화를 즐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을 읽는 것처럼 명확하게 대상의 감정을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 라이언 고슬링 주연으로 아폴로 13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퍼스트 맨’을 잔잔하지만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그가 그려낼 그레이스 박사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책에서 상상했던 이미지와도 아주 잘 맞는다.
우쭐대지 않도록 좋은 영화가 나와 주길.
평소와 같이 리디셀렉트에 뭐 볼 만한 책 있나.. 하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리디포인트의 일부가 소멸될 거라는 안내 메시지를 받고 뭘 보지.. 하면서 고민하다가 구매했다. 매우 오랜만에 전자책으로 구매한 책. 책을 펴자마자 페이지 수에 놀란다. 전자책을 보는 화면이 크냐 작냐 기기를 세로로 들고 보냐 가로로 들고 보냐, 책 폰트는 어떻게 하고 보느냐…에 따라 페이지
수가 많이 다르지만, 아이패드로 내가 보는 방식 기준 천 페이지가 넘는다. 정확히 1054페이지. 바로 전에 읽은 책 수학의 쓸모가 528페이지였다. 수학의 쓸모는 종이책으로 384쪽… 수학의 쓸모도 얇은 책이 아니었으나 페이지 수가 거의 두 배다. 그러나 페이지에 지레 쫄 필요는 없다. 겁나 두꺼운데도 술술 넘어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처럼 이 책도 술술 넘어간다.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울 지경. 책을 읽는데 이틀이 채 안 걸렸다. 이틀 중에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헤일메리라는 단어는 원래 미식축구에서 쓰는 말로 지고 있는 팀에서 마지막 도박을 거는 작전을 말하는데, 그렇게 쓰다 보니 어느새 하나의 관용구처럼 쓴다고 한다. 마지막 도박이라는 의미로. 미식축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모르지만) 뒤가 없는 작전. 미식축구가 아니라 그냥 축구로 비교해보면… 후반 로스타임도 거의 끝나가는 시간의 마지막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키퍼까지 공격에 참여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감도, 상황도 많이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주 쓰는 말로 보면 배수의 진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태양이 점점 어두워지는 상황에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출발했다고 생각한 과학자의 여정을 아주 흥미롭게 그려 냈다. 과학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많이 다루어지는 책이지만 책을 즐기는데 그리 많은 과학적 지식은 필요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대략적인 내용을 글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고, 상대성이론의 대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더라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 더 많이 알면 좋겠으나… 난 그리 과학에 조예가 깊은 편이 아닌데도 재미있게 잘 읽었다. 물론, 더 잘 아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굳이 이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라는 것이 원래 큰 줄기를 따라가며 문제 발생-해결 문제 발생-해결의 루트를 따라가게 되는데 이 책은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원패턴이라 책에서 대략 10% 남은 부분부터는 조금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쭉- 보긴 했다. 여튼 이런 거에 예민한 사람은 좀 쉽게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을 듯. 생각해 보니 마션도 이런 식이었다. 문제 발생 - 해결, 또 다른 문제 발생 - 해결. 이런 비슷한 패턴의 긴장이 반복되다 보면 이야기의 후반엔 이야기의 긴장이 필요한 시점에 긴장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읽는 사람이 조금 지친다. 이런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나는 후반부.. 거의 10% 남겨놓은 시점에서 부침을 겪었다. 이야기가 지루한 건 아닌데… 각각의 모든 위기 상황들이 흥미롭고 개연성 충만하지만 (종이책 기준) 7백 페이지에 걸쳐 반복이 되면 읽는 사람이 지친다. 적어도 나는 지쳤다. 매우 즐겁게 재미있게 읽었지만 조금 분량이 짧았다면, 7백 페이지가 아니라 6백 페이지짜리 이야기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사소한 단점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즐겁고 재미있게 잘 읽었다. 변역도 매끄러워 거슬리는 부분도 없었다. 아마 가까운 시간 안에 한 번 더 읽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두 번 더 볼지도. 책이라는 매체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