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상황의 글이 아님. 꽤 예전 상황의 글.
입찰이라는 것을 몇 년 만에 다시 해봤다. 15년? 16년 정도에 한 것 이후로 처음 한 건이었다. 그때엔 어느 정도 가격 가이드가 있어서 편하긴 했었는데, 이번에는 가격 가이드랄 것도 전혀 없이 어찌 보면 느닷없이 입찰을 맞이하게 됐다. 많지도 않은 영업 건에서 입찰로 나올지 수의계약으로 진행이 될지 미리 확인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웠으나 여튼 그렇게 됐다. 나는 솔직히 입찰로 갈 거라고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작년 말부터 나와 컨택을 이리저리 하기도 했었고, 개발 라이센스를 받아 가서 적용도 하고, 이런저런 이슈가 있다며 우리 쪽으로 기술 지원 문의도 몇 번 왔었다. 보통 개발 라이선스라는 것이… 적용하고 수정하고 하는 데에도 공수가 들어가기 때문에 영업적으로 어느 정도 결정된 후에야 개발 라이센스가 나가게 되는데 개발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심지어 한번 연장까지 해 줬다. 그러나 사업 예산 단계에서부터 담당자와 컨택은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시국 핑계를 대기도 무색할 만큼 라포 형성을 하지도 못한 것도 사실이다. 업무적인 연락 외엔 딱히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상대 업체가 대기업이기도 했고, 밥 먹자 커피 먹자 해도 코로나 핑계… 참 일하기 쉽지 않은 요즘이다. 지난주 금요일 공고가 뜨고, 오늘 입찰하고 결과를 받아보았는데 결과적으로… 결과가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스트레스를 참 많이도 받았다.
첫 번째 입찰은 가이드 금액이 거의 정해져 있었다. 입찰이지만 입찰이 아닌 그런 느낌. 입찰 전에 이미 가격이 정해져있었다. 가격 협의가 이미 끝나 있었고 협의가 끝난 금액대로 마지막에 가격만 입력하면 되는 수준의 입찰. 어려울 게 없었다. 몇 천 단위의 계약이었는데 나는 담당자와의 협의를 통해 상대 업체가 얼마를 쓸지도 대략 알고 있었고, 그 금액 밑으로 쓰지 않을 것도, 쓰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다. 입찰 담당자는 상대 업체로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할당된 예산이 있었고, 경쟁사에서는 그 금액을 맞출 수 없었다. 어려울 게 없었다. 나는 경쟁사 담당자에 비해 가격 재량권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상대방이 원하는 가격 미만으로 맞추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 사업은 처음부터 내겐 거의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16년…? 15년쯤인 걸로 기억하는데, 연말이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전화를 받았다. 해당 부서에서 사용해야 하는 예산의 일부를 사용하지 못해서 내년이나 후년으로 예정되어 있는 내가 취급하는 제품의 업그레이드를 미리 해야겠다는 것.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지출을 본인들의 부서에 할당된 예산이 남아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상황. 그러니까… 요즘은 거의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 흔하게 보던 멀쩡한 보도블록 갈아없는 수준의 지출. 그 해 내가 맞춰야 할 숫자가 부족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담당자 입장에서 이런 눈먼 지출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오늘도 제게 일용할 매출을 주셔서 그저 감사하옵니다… 라포…라고 할만한 것 까진 없었지만 고객의 니드 덕분에 나온 입찰에서 긴장감이랄 것도 없이 이미 협의가 끝난 금액으로 입찰하고 이미 정해진 결과를 받았다. 낙찰.
한해 매출 십억 언저리 해 내는 회사에서 어렵지 않게 몇천만 원단위의 꽤 큰 매출을 따냈다. 회사의 한 해 매출로 봐도 적지 않은 금액이고, ‘경쟁’입찰이라는 것에서 이겼지만 딱히 기쁠 것도 없었다. 이미 낙찰받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회사에 돈을 벌어다 준다고 해도 그 돈이 내 통장에 꽂히는 것도 아니니 회사에 돈 벌어다 줬다고 특별히 기분이 좋을 이유도 없었거니와 나는 결과를 이미 너무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것을 따 내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결과를 알고 있는 경쟁은 재미가 있을 수가 없다. 졌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투쟁심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런 이유들로 이번 입찰은 두 번째 입찰이지만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한 상황이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알 수 없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깜깜이 입찰. 우리 제품을 비롯해서, 경쟁 제품들이 제품 품질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기는 하지만, 제품 품질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냥 무조건 최저가만 써서 내면 그만인 최저가 입찰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최저가 입찰을 했을 때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내는 꼴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시스템 구축이 아니라 솔루션만을 납품한다. 이런 개별 솔루션은 보통 입찰이 아니라 수의계약 혹은 마더사에 묻어가는 형태로 납품이 되는데, 이번 건은 매우 독특하게 이런 솔루션을 경쟁입찰 공고를 냈다. 우리 솔루션이 사업비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여튼 뭐 그렇게 됐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최저가 입찰로. 이 주째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 사장님께 전화를 건다.
‘이 건 먹고 싶은데 제 판단대로 가격 적어 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라는 답이 어렵지 않게 돌아온다. 당연히 긍정적인 답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신경 쓰지 않아도 잘 돌아가는 회사 업무에 대해서 사장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내 업무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내가 제안할 가격에 대해 허락받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었고, 통상적인 가격을 고집하다가 떨어져도 사실 별문제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통상적인 납품 가격은 아니니 알아는 두시라는 마음으로 사장님에게 통보하듯 이야기를 했다.
내 입장에서도, 최근엔 큰 매출 건도 별로 없는 상황이라 욕심이 났다. 요즘 같은 시대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먹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얼마로? 다른 업체로 당연히 견적을 넣었겠지만 최저가 경쟁입찰에서 견적 금액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변수가 하나 더 있다. 4년 유상 유지보수를 포함해 TCO로 입찰을 하란다. 거기에 액티브-스탠바이 이중화까지. (앞으로 정확한 숫자를 쓸 수 없으니 임의의 숫자를 씀. 이 이하로 나오는 모든 숫자는 실제 숫자가 아님). 최조 견적 단계에서는 견적 자체가 구체적인 목표가가 아닌 예산을 잡는 용도였으므로 통상 납품가보다 20~30% 정도 높게 적었다. 그러나 이건 구매담당자와 협의해서 넣는 상황이 아니라 경쟁 입찰. 무조건 싸게 넣으면 먹는다. 최초 4500에 견적했는데 통상 납품단가는 3500언저리. 그러나 그것은 입찰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통상 납품단가다. 그 정도는 못 먹는다. 확실하다.
그러면 어느 정도를 써 넣어야 할까. 담당자로서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경쟁사의 가격 정책은 줄줄이 꿰고 있다. 경쟁 3사가 모두 참여하는 이번 입찰에서… 통상 납품단가를 써 내서 간단하게 탈락할 생각은 전혀 없다. 통상적 납품 단가가 아닌 핵심 파트너가를 기준으로 이 정도 규모를 대입해보면 2200이 나온다. 2200을 기준으로 제품의 납품 가격을 산정하고, TCO를 산출하여 견적해야 한다. 2200보다 낮게 들어올 건 분명할 것 같다. 그러나 얼마나 낮게 들어올 것인가.
멋졌던 남자 김태랑
통상 입찰은 원가가 있는 회사에서 한다. 이런저런 원가를 산정한 후 자기들의 이익을 거기에 붙여 입찰하는 것. 그러나 꽤 먼 예전에 만화 ‘멋진 남자 김태랑’에서 보던 그런 이 부서 저 부서가 협업하여 멋들어진 원가 산정 단계에서부터의 회사원들의 고뇌와 고민. 경쟁회사와의 그런 불꽃튀는 암투와 회사 정책에 맞서는 불꽃같은 영업사원 등은 이 이야기엔 없다. 여기엔 그저 경쟁회사들을 걱정하며 그냥 확 백만 원 써 내버리고 치워버릴까 라는 고민까지도 진지하게 5분 정도는 했던 쫄보만이 있을 뿐. 도와줄 사람도, 도망칠 곳도 없다. 협업할 부서도 고민을 나눌 사람도 회사 안엔 없다. 내가 적어 내는 금액이 회사 정책이다.
우리 회사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원가가 없다. 우리 회사에서 취급하는 솔루션은 개발자가 개발하고 완성된 것을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 단위가 문제가 아니라 백만 원을 써서 낸다고 해도 우리 회사의 기준으로는 백만 원만큼 이익이다. 원가는 이미 개발 단계에서 인건비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얼마나 만들어서 팔든, 총 매출이 인건비를 넘어가는 순간부터 매출은 모두 이익이다(세금 문제는 경영지원에서 하는 걸로 하자). 물론 그 후에 누군가가 가격을 알게 돼서 그 가격을 기준으로 자기들에게도 달라고 이야기하거나 삔또가 상하면 뒷수습이 매우 곤란해지겠지만 그 걱정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 시점의 내가 하니까 상관없다…며 그냥 지를 수도 있다. 정말 얼마를 써내야 할까 너무 스트레스다. 우리 제품 같은 류의… 원가 산정이 곤란한 품목은 경쟁입찰로 지정해선 안 된다. 프로그램의 적정 가격이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강아지아기들이라며 아무리 투덜거려봐야 이미 공고는 나왔고 이것은 뒤집어지지 않는다.
화요일 즈음부터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려 본다. 그러나 그들이 하던 입찰과 내 상황은 너무도 동떨어져있다. 전화를 하는 사람들마다 그저 내 판단대로 하라는데 내가 판단이 섰으면 전화를 안 하지 않았을까요 님들…? 제 판단이 안 서면 어째야 하죠…? 경쟁사 견적은 확인해 봤냐고 라포가 있으면 이야기하면 알려줄 거라고 하는데… 라포도 없고 경쟁사 견적을 알아봐야 나 같은 상황에선 의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만 해도 지금 최초 4500에 보낸 견적을 100으로 그냥 던져버릴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100으로 쓰면 먹긴 하겠지… 먹은 다음이 문제지만. 설상가상 입찰공고 전체도 또이또이 안 보고 위쪽만 보고 준비 서류를 미리 준비해놓지 않았다. 수요일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보고서는 경영지원에 급히 요청을 넣는다. 경영지원에서 준비해 줄 서류만 네 종류. 내가 준비할 공문과 서류가 네 종류. 입찰보증보험도 끊어야 한다. 오랜만에 바쁜 건 기분 좋은데 가장 중요한 고민, 가격을 얼마로 제안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요만큼도 해결되지 않았다. 머리 아프다. 상대들은 어떻게 할까. 경쟁사들은 둘 다 소위 목에 ‘힘이 많이 들어가있는’ 업체들이다. 그네들이 가격을 어떻게 선정할 것인가. 이 건을 낙찰받고 싶지만 상대와 가격 차이가 많이 나게 낙찰받아서 등신 소리를 듣고 싶진 않다. 대략 8년(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쯤 전에 2위 업체와 두 배 넘게 가격을 적어 내 한전 부지를 낙찰받은 현차처럼. 그런 취급은 사절이다(물론 그들이 어떤 계산이나 당사자들 외엔 알수 없는 뭔가 없이 그냥 그렇게 했겠냐만은).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말도 있지만 난 정말 열심히 다해 고민하고 있는데도 야속한 시간은 간다. 입찰이 드디어 열렸다.
일주일 내내 차라리 빨리 오라며 기다린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내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막상 오니 조금만 더 늦게 와 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을까. 이런저런 조언들을 종합해 고려해 본 결과 상대방의 예상가와 내 예상가의 절반에서 백만 원을 빼서 결정하라는 조언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자 그럼 보자… 상대는 2200 정도 쓸 것 같고 나는 100만 원 쓸 거니까 대충 1050… 입찰이 열리고 마감까지 꼴랑 두 시간 남은 상황에서도 이러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모니터와 나 사이에도 나만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흐른다. 의사결정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가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감으로 찍어야 하는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200에서 얼마나 빼야 할까. 상대들은 3500 기준으로 입찰하면 어쩌지…? 고민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 고민을 얼마나 많이 하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2200에서 얼마를 빼야 하나. 그것만 결정하면 된다. 2200에서 10%를 빼고, 100을 다시 빼고, 50을 다시 뺀다. 이것이 나의, 우리 회사의 제품 입찰 가격이다. 그러나… 아직 TCO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입찰을 통해서 진행한 만큼 제품 가격은 충분히 많이 낮아졌다. 그리고 예전엔 IT솔루션들의 교체 주기를 5년으로 잡아서 TCO가 5년 기준으로 만들어졌지만 최근 트렌드는 7년 이상, 10년 넘게 쓰는 업체도 수두룩하다. 이번에도 아마 그럴 것 같다. 이 건이 입찰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여기는 그리 IT 관련해 지출이 많은 회사는 아니다. 충분히 오래 쓸 거다. 어쩌면 10년 이상. 제품 가격을 많이 낮춘 만큼 유지보수 금액은 넉넉하게 잡았다. 도입가의 18%. 이렇게 되면 사용 기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에게 유리할 수 있다. 제품 입찰 가격을 여기에 맞춰 다시 조금 내린다. 유지 보수 금액은 높였지만 제품 가격이 낮아져야 예상한 TCO 총액을 맞출 수 있다. 어려웠다. 고민이 너무 길었다. 이렇게 하자. 영업사원에게 숫자는 하늘이 주신다. 당연히 하늘이 내려주시는 그 숫자를 받기 위해선 내가 열심히 해야겠지만, 이번 건에 대해선 할 만큼 했다. 뭔가가 부족했다거나 뭔가를 덜 했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나는 할 만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