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종이의 기분좋은 질감이잘 표현된 것 같다.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종이. 명함을 이런 종이로 만들수 있을까?
한참 동안이나 사무실 책상 위에 던져져있듯이 올려져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무슨 만화책처럼 겉면이 비닐로 둘러쌓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책 포장할 때 으레 하는 그런 고급진 빳빳한 비닐이 아니라 이건 정말 만화책 포장하는 비닐이다. 예전에 마블 만화책에 환장해서 모을 때 자주 만지던 그런 비닐. 왜 이렇게 포장을 했을까… 싶었는데 비닐을 벗기고 책을 집어 들자마자 의문은 꽤 해소된다. 책 표지의 느낌이 매우 예스럽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까지 서예학원 다녔을 때 만지던 그런 화선지 같은 촉감. 서예를 잘 하던 건 아니지만 서예학원을 다니는 것이 싫지 않아 참 오래도 다녔었다. 종이에서 왠지 그리운 따뜻함이 느껴진다. 책을 만졌을 때 느낌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아니라 공자 익스프레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그런 가벼운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 은은하게 따스한 촉감이 기분 좋다. 계속 만지고 싶지만 그냥 만지다간 닳을 것 같아 책을 손으로 만지며 읽는 동안에는 겉표지를 분리해 놨다가, 책을 만지지 않을 때에 다시 끼워 놓기로 했다. 이렇게 만지는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책 표지는 처음인 것 같다. 아주 호감이 가는 겉표지를 벗기고 나니 읽을 욕구가 전혀 들지 않는 속표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까지 느낌이 달라도 되는 건가. 겉표지와 속표지의 이 갭은… 페레로 로쉐의 껍데기를 까니 똥 덩어리가 들어있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속표지도 신경좀 써 주지.
매우 만족스러운 겉표지와 굉장히 대비되는 속표지.
책의 영어 제목이 한글과 같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소크라테스는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철학자임이 틀림없다. 데카르트도, 니체도 모를 수 있지만 대부분 소크라테스는 안다.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등의 명언을 남겼고(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했냐 안 했냐는 논쟁의 소지가 있지만 그런 톤의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이긴 함. 개인적으론 이 말을 독재나 잘못된 법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는 것으로 보여 좋아하지 않음) 최근엔 테스형이라는 짧고 강렬한 이름으로 다시 우리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졌었다. 그러나 철학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말로도 이 책을 정당하게 포장하기는 쉽지 않다. 좀 더 널리 아우르는 말이 필요할것 같은데, 좀 더 멋진 표현 없나 하고 짱구를 굴려보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이 책은 How to에 관한 책이다. 삶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어떻게 하면 더 풍요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즐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책. 작가에게 영감을 준 철학자들의 삶을 소개하고, 그들의 생각과 각각의 인물들에게 영감을 받은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작가들의 책이나 삶에 대한 감상문 같기도. 그래서 각 주제가 이런 식이다.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How to wonder like Socrates),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How to have no regret like Nietzche), 루소처럼 걷는 법(How to walk like Rousseau). 당연히, 이런 책이 으레 그렇듯이 이차방정식 푸는 법이나 다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방법처럼 딱 잘라지는 답은 없다. 굳이 문제에 비유하자면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책 후반부에 내가 집중력이 흐려진 건지 이야기 자체에 힘이 빠진 건지는 모르겠으나 후반부에 고유명사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글쓴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며 책에 집중하는데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 바로 앞부분의 내용을 생각하며 상상이 상상의 꼬리를 물기도 했고. 그러나 번역에 큰 문제도 없고(‘큰’ 문제는 없다) 문체 자체가 읽기 편하다. 철학 책이지만 철학 책 답지 않게 편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랬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이라는 접미사가 붙은 거의 모든 학문은 질문에 답을 내린다. 그러나 철학은 질문을 한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면 철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코끼리는 무엇인가’ 에서부터 질문이 시작될 수 있겠다. 우문이 아닌 현문을, 적절한 질문을 하기 위한 학문. 다른 거의 모든 학문은 지식에 관련된, 아는 것, 사실에 관련된 학문이지만 철학, 인문학은 지혜에 관련된 학문이다. 정답이 없다. 고뇌, 고민, 모든 것에 대한 의심만 있다. 그래서 어렵다. 그렇지만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책 한 권을 보면서 마음에 박히는 문장 하나만 있어도 책 읽는 보람 있었다, 읽을만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엔 그런 부분이 꽤 많았다. 굉장히 오랜만에 책의 몇몇 부분을 접으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전자책으로 봤다면 그냥 표시해놓으면 돼서 편할 텐데, 페이지를 접어놓고도 차마 어디였는지 표시하지는 못해 어떤 부분인지 기억을 할 수가 없어 접어놓은 페이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어떤 부분이었지 하면서 다시 읽기도 했다. 물론 앞뒤를 모두 읽어야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옮겨 적은 짧은 부분으로는 그런 느낌을 받기 어렵겠지만, 내가 느낀 지적 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여튼 그런 ‘띵’함을 읽는 분들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옮겨 적은 부분은 말 그대로 일부일 뿐, 그 외에도 좋은 문장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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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4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한 창문은 눈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중략> “모든 철학은 궁금해하는 데서 시작된다”라고 말했을 때 소크라테스도 그런 마법을 떠올렸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궁금해하는 능력이 금발머리나 주근깨처럼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궁금해하는 능력은 기술이며, 모두가 그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그 방법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궁금하다’는 멋진 단어다. 미소 지지 않고서 그 단어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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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3
제이컵은 이런 ‘궁극적인 질문’이 왜 이렇게 작은 관심밖에 받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니들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문화에는 궁극적인 질문이 질문으로 존중받는 공간이 없어요. 우리가 가진 모든 제도와 사회 양식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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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4
롭의 태도는 에피쿠로스 철학 그 자체다. 좋은 것이 주어지면 즐긴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 나타나길 기대하지 않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 롭은 이런 값싼 물건을 찾아다니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 물건들은 그저 우연히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물건이 생기면 롭은 감사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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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0
종류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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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페이지의 문장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톤이 매우 낯익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었나. 내가 가진 물건은 내 손에서 사라지는 그런 역설적인 수고를 통해서만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톤이었던 것 같은데, 메시지 자체는 이런 뜻이었던 것 같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든 자리에서도 충분히 알아야 할 텐데..
또 어느 페이지인지는 접어놓지 않아 정확한 텍스트를 옮겨 적을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인식되는 곳에 있다는 톤의 말도 굉장히 와닿았다. 그렇다. 아름다움은 어떤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사물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이 매우 결여되어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이 매우 한정적이다. 그런 내가 아쉬워 굉장히 여러 번에 걸쳐 여러 대상에 대해 아름다움을 알아보려 노력했었지만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아름다움, 회화나 조형… 등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다.
다른 거의 모든,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이, 이 책 한 권 읽는다고 인생에 뭔가 극적인 변화가 생긴다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책을 여러 권 읽고, 곱씹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벼리는 것이 인생 사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거다.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든 없는 분이든, 인생에 방향을 잃었든 그냥 흥미 위주로 책을 보는 분이든, 아직 읽어보지 않은 모든 분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