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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근래 있었던 일들 - 9월 셋째 주. (0) 2021/09/19 AM 07:42


이발

 

 ‘이발을 해야겠다.’라고 마음먹은 지도 두 달 정도가 이미 훌쩍 지나갔다. 매번 가야지 가야지 했는데 비 오고, 구찮아서 나가지 않기가 일쑤. 머리를 자르러 나가지 않은 이유는 머리… 특히 옆머리가 매우 지저분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머리가 내게 주는 만족감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었다. 애매하게 긴 머리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서 자르라는 이야기가 슬슬 나오지만, 나는 이 적당히 긴 머리, 곱슬곱슬하니 쓸어넘기는 맛이 있는 머리를 꽤 좋아한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직업상 깔끔한 머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미 내 머리는 깔끔함과 거리가 많이 멀다.


 내가 가는 미용실…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머리 자르는 곳에 막상 가면 커트 시간은 길게 걸리지 않는다. 자리에 앉고, 머리를 자르고, 머리를 감고, 계산하고 문밖으로 나오는데까지 총 8분 내외. 여간해선 10분을 넘기지 않는다. 머리 자르는 게 귀찮다…기보다는 기다리는 것이 싫다. 장사가 어찌나 잘 되는지. 토요일, 일요일에 가면 30분 대기가 기본이다. 그렇다고 머리 자르러 매번 평일에 올 수도 없고. 오늘은 매우 오랜만에 가는 만큼, 최대한 덜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한 달 만에 갈 때도 덜 기다려야겠다며 눈치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런저런 꾀를 내 본다. 그러나 2011년에 이 동네에 이사 와서 지금까지 쭈욱 다니고 있는 집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방법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방법도 효과가 없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방문할 때마다 나는 매번 실패하고, 매번 30분 언저리를 기다린다. 이미 여러 번 실패한 방법이지만, 오늘은 오픈에 맞춰 가봐야겠다.


 와이프와 아들은 병원으로. 나는 오픈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미용실로. 오늘은 결코 기다리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시로 아무것도 시간을 때울만한 것들도 아무것도 안 들고 갔다. 날이 참 좋았다. 햇살이 기분 좋았다. 아직 열시도 되지 않은 시간. 토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머리 자르러 사람이 올 것 같진 않았다. 제발 사람이 없길. 그러나 미용실 앞에 몇 사람이 서성거리고, 한 사람은 아예 매장 털에 주저앉아있다. 불안하다. 아직 시간은 불과 열시 삼분인데… 허겁지겁 매장에 도착해 안쪽을 보니 이미 만원이다. 나는 오늘도 눈치게임에서 패배했다. 그냥 패배가 아니라 대패. 역대급 패배다. 대기 번호라며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한 주황색의 코팅된 종이를 나에게 내민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받아 들었는지, 코팅이 반쯤 벗겨진 종이에는 17이라는 글자가 크게 인쇄되어 있다. 17번. 나는 오늘 대기 17번이다. 지금 앉은 사람들이 모두 자르고 16명이나 더 잘라야 내 순서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갈까 하는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집에 들어갔다가 저녁에 다시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나는 나를 꽤 잘 알고 있다. 지금 들어가면 저녁에 다시 나올 확률은 없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나 스스로에게 대며 머리를 자르지 않을 핑계를 만들어 낼게 눈에 보인다. 매장 유리창에 나를 비춰본다. 충분히 거지 같다. 여기서 더 거지 같을 순 없다. 다다음 주가 추석이라, 다음 주는 이런저런 일정들 때문에 많이 바쁠게 분명한데 이 머리로 사람들 만나며 돌아다닐 수는 없다. 잠깐… 안될 게 있을까??? 다다음 주부터 연휴인데 그때 잘라도 괜찮지 않을까? 이번 주까진 잘 했는데 다음 주에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후……


 시간을 때우러 근처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 들어갔으나 핸드폰밖에 들고 온 게 없어 할 게 없다. 테이크아웃 커피숍에 구색을 갖추기 위한 테이블 세 개가 구석에 작게 있는 커피숍. 이천 원 짜리 커피에 커피 맛을 기대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커피를 입에 대자마자 조리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어느 과정에서였든 간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고서는 이런 텁텁하게 쓴 탄 맛이 나올 수가 없다. 커피를 시켜놓고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며 인터넷 기사를 들춰보지만 그나마도 잠깐, 작은 화면에 이내 흥미를 잃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 먹을만하지도 않은 커피를 들고. 시간은 겨우 15분 지났다. 잠깐 정처 없이 걷다가 코노가 보여 들어갔으나 그나마도 문을 닫았다. 잠시 걷다가 그냥 가게 앞에서 정처 없이 서서, 혹은 매장의 턱에 앉아 기다리던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볕이 따갑다. 그러나 정처 없이 기다리는 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미용사님과 이미 여러 번 해왔던 길지 않은 익숙한 문답을 주고받는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깔끔하게 잘라주세요.


 


울 뻔했다.

 

 아들과 요즘 책 읽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서로 마주 앉거나 근처에 늘어져서 나는 나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따로 책을 읽는 것이면 굉장히…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그런 좋은 시간은 아니고… 아들의 한글을 정확하게 못 읽어서 소리 내어 읽고 나는 그것을 감독하고 있다. 이제 2주 정도 됐나 보다. 처음엔 그냥 써져있는 대로 정확히 읽는 것에만 신경쓰며 읽게 했으나, 가만히 보다 보니 문자를 읽는 것도 문제지만 이해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인 것 같아서 요즘은 문해력을 기를 수 있도록 생각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문답을 주고받으며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기 전 30분씩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당연히 아들은 일찍 일어나는 것도 빡치는 일인데, 자기가 그렇게 못하고 싫어하는 책을 읽는 것이, 그것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달가운 일일 리 없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지 않도록 당근을 주기도 하지만 여튼 아들에게는 즐거운 시간만은 아닐 거고, 나 또한 그렇게 느낀다. 정말 시키기 싫다. 그러나 이걸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다.


 와이프 운전 연수는 남편이 시키는 거 아니라는 말을 많이들 들어봤을 텐데, 나는 그 비슷한 이유로 자식 공부도 부모가 시키는 거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이걸 남에게만 맡길 수도 없는 노릇. 특히 지식이 아니라 예의에 관련해서는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에게 맡길 수가 없다. 예의에 관해서는 굉장히 엄하게 가르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잘 컸다고도 생각하지만 이제 열 한살이 되어가는 아들이… 슬슬 머리가 굵어지는지 사춘기가 오고 있는 것인지 가끔 꼴통을 부릴 때가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아들과 책을 읽고 있는데 ‘왔’을 ‘갔’으로 읽는 것이었다. 틀렸다고 연필로 동그라미를 치며 처음부터 다시 읽으라고 하는데도 ‘갔’으로 자꾸 읽는다. 동그라미를 치면 신경 써서 읽느라 다시 틀리지 않지만 집중력을 잃었는지, 실수가 반복된다. 집중력을 잃은 경우는 어떻게 해아 하나. 아직 공부를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끝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하기로 정한 거니까,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마다 그만할 순 없다. 틀리는 게 계속되자, 책을 덮고 그냥 써보라고 한다. ‘왔’과 ‘갔’을.


 이미 입은 삐죽 튀어나와 있고, 하기 싫다는 것을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이용해서 말하고 있다. 연습장 가져오는 몇 걸음을 터덜터덜거리며 한발 한발씩 아주 거북이가 따로 없다. 틀린 게 명백한 그 두 글자를 번갈아가면서 읽고 쓰는데도 계속 툴툴거리고 삐죽거리더니 이거 아니잖아 하는 내 말에 턱을 내밀며 이거 비슷하잖아라고 말한다. 이미 이거 가지고 실랑이한 게 5분을 훌쩍 넘어간다. 자음인 ㅇ과 ㄱ. 밑받침인 ㅗ. 뭘로 봐도 정말 다른 글자인데. 실수는 괜찮다. 실수는 고치면 된다. 모르는 것도 괜찮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그러나 자기가 틀린 걸 알면서도 그것을 우기는 것은 안 된다. 이미 몇 번이나 엄마가 가르칠 때에도, 학원에서 배울 때에도 이런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에게는 처음인 것 같다. 화를 못 이기고 아들에게 손찌검을 한다.


 체벌도 아니고 이런 손찌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강짜를 놓고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것은 체벌의 영역이 아니다. 체벌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 본인이 맞다고 우기는 대상에게 체벌을 하는 것은 의미 없다. 그런 사람은 맞아봐야, 처벌을 받아 봐야 본인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그럼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쳐 줘야 하나? 이미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걸 그냥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인데, 이것을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미 입은 삐죽거리고 툴툴거리는 상대에게. 그럼 손찌검은 맞는 것인가? 그냥 눌러버려야 하나? 아들에게 손찌검을 할 때마다 깊은 자기혐오를 느끼고, 뭔가 내가 망가져가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정말 하기 싫다. 그러나 나는 체벌을 당하며 맞아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렇게 그냥 쳐 맞아야 하는 일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건 쳐 맞아야 하는 일이다.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은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컨트롤해야 한다.


 아들을 때리고 나서 이건 네가 모를 리 없다. 모르는 건, 실수는 괜찮다. 다음엔 하지 않고 모르면 배우면 된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우기는 건 안 된다. 그건 정말 잘못된 행동이고 창피한 일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 본인이 맞다고 우기는 것보다 훨씬 더 멋있는 일이다. 너 학원에서 이딴 식으로 우기는 거 한 번만 더 들리면 모든 학원 하나도 못 다니게 하고 전 과목 아빠랑 다 공부할거다라는 반 협박을 끝으로 그대로 그날의 공부는 끝났다. 아들에게 손찌검을 한 행동 때문에 우울한 마음으로 씻으러 가고, 출근을 했는데 아들은 삐져서 인사도 안 한다. 너도 맞아서 화가 났겠지만 나도 네 행동에, 심지어 내 행동에도 많이 마음이 상했다. 나는 네게도 실망했지만, 나 자신에게도 실망했다.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나도 굳이 받으려 하지 않았다. 아들을 때린 행동은 회사 일을 하며 금세 잊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날 보자마자 다녀오셨냐는 말을 하며 말을 더 보탠다.


‘아빠 아침에 싸운 거 내가 미안해’


 알았다고 내가 더 미안하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짧게 말하고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데 눈물이 올라오는 간신히 삼켰다. 나중에 와이프가 아들의 행동을 보며 놀랐다고 하는데, 나는 훨씬 더 많이 놀랐다. 여러모로 망한 내 인생이지만 아들은 잘 낳았구나. 나보다 아들이 훨씬 더 잘났구나.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에게 배운다는 말에 반박하며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통해 배우는 거겠지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아이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배우기도 하는구나. 글을 쓰는 지금이 다들 자는 새벽이라 다행이다.



조기퇴근

 

 우리 회사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회사는 설이나 추석 연휴 전의 업무 날에는 항상 회식 비슷하게 점심에 맛난 거 먹고 일찍 들어가는 전통…이라고 하기엔 사소한 그런 것이 있다. 직장인의 점심이 맛있는 거라고 해봐야 비슷한 그런 것이겠지만 그런 날엔 보통 중국집에 가서 평소 먹지 않는 메뉴들… 깐쇼새우라거나 라조기, 팔보채 같은 것들을 주문해서 평소보다는 조금 화려한 그런 식사를 하고 한두시경엔 퇴근하는 것. 귀경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시작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귀경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만 여튼 유지되고 있다. 사실 많은 회사에서 이렇게 하겠지만, 여튼 이것은 회사의 배려이고 선의이다.


 사장님은 애초에 회사에 거의 관심이 없고, 이사님도 회사 업무를 놓으신지 몇 년, 회사에 있었더라도 별 상관이 없었을 것 같긴 하지만 나보다 윗 연차 개발자(동갑) 하나는 재택근무. 그러다 보니 회사에 잡일이나 이런저런 관리 등을 자연스럽게 내가 맡게 된 지 몇 년이 지났다. 가끔 업무가 몰려 바쁠 때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된 데 별로 불만은 없다. 나름 편리한 점이 있기도 하고. 그런데 조기퇴근 관련해서 이번에 아주 불쾌한 일이 있었다. 연휴 시작 전날 목요일에 (구)막내가 밥을 안 먹고 가겠다는 것. 이때부터 기분이 살짝 안 좋았다. 뭐지? 하는 느낌.


 사실 회사 입장에서는 밥을 먹고가나 안 먹고 가나 별 차이는 없다. 어차피 우리 회사의 점심시간은 열한시 반에서 한시. 밥 먹고 와서 한두시에 퇴근한다고 해도 어차피 업무시간은 아니고, 업무시간이 시작한다고 해도 어떤 일을 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러니까… 점심 먹고 이후에 앉아있는 시간은 그냥 덤. 사무실에 있는다고 해 봐야 전화 대기 정도의 시간일 뿐이다. 그냥 내가 꼽다. 마인드가 잘못되었다. 근데 금요일 오전, (구)막내가 내 자리로 와서 뉴막내도 밥을 안 먹고 가겠다고 한다며 사람들이 곤란할 때 짓는 웃음을 지으며 와서 이야기한다. 아마 그때쯤부턴 구막내도 자기 행동이 잘못된 걸 알지 않았을까 싶다.


 뉴막내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이 몇 번 있어서 굳이 내 글에 거의 등장시키지 않았지만, 정말… 신세대의 극강. 당연하겠지만 칼퇴 하는 정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나는 꼰대지만 그 정도로 꼰대는 아니다. 여튼 이 친구는 평소의 내 기준에서라면 애초에 뽑지도 않았겠지만, 누군가는 당장 뽑아야 할 이유가 있었고, 뽑고 나서도 그냥 내 보낼까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짜증이 확 났다. 구막내가 이야기할 때에도 기분은 나빴지만 그러라고 했는데, 뉴막내 너도? 뉴막내라는 말이 왠지 귀여운 어감이라 이 친구에 대한 호칭으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 마음속의 호칭을 글로 남길 순 없을 것 같다. 누군가 보게 되면 잡혀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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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개발실로 가서 내 빡침을 쏟아낸다. 니들 뭔 동호회 다니냐? 점심 먹고 집에 가라는 건 회사의 선의이고 배려인데 너네들 지금 뭐 동호회 다니는 거냐? 반차도 다른 회사 한시 두시에 가는 거 점심시간 끼니까 열한시 반에 가라고 하는 건데 너네들 오냐오냐하니까 회사가 뭘로 보이냐? 동호회도 활동 끝나고 밥 안 먹고 집 간다고 하려면 눈치 보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너네들은 뭐 한다고 집에 일찍 간다는 거냐? 따위의 말들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장황하게 이야기한다. 말을 하다 보니 중간에 다른 개발자가 ‘그래 너희들 생각 잘못했어’라는 말을 보태는데, 아니 그걸 네가 알았으면 나한테 말이 올라오기 전에 네가 잘랐어야지 그걸 내 귀에 들어오게 하나? 평소라면 빡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저놈(막내들은 여자, 쟤는 남자)도 왠지 ‘말리는 시누이’ 같은 느낌이다. 저 말도 빡친다. 구막내 뉴막내가 그제서야 죄송하다며 밥을 먹고 가겠다고 하지만 이것들과 밥을 같이 먹기도 싫다. ‘그냥 가라 니들이랑 밥 먹기 싫으니까’


 자리로 돌아와 생각을 정리해 본다. 빡친걸 표현하기 전에, 애들에게 소리 지르기 전에 해야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자리로 돌아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이건 마인드에 관련한 문제 아닌가? 내가 꼰대인 건 맞지만 이건 좀 지나친 꼰대인 건가? 내가 관리자로서 부족한 것인가? 이것은 선의를 악용하려는 행동이 아닌가? 너무 애들을 풀어준 건가? 지랄할만한 일은 아니었던 게 아닐까. 왜 구막내가 그럴 땐 띠껍지만 그러라고 했고 뉴막내가 그럴 땐 빡이 쳤을까. 순서의 문제인가. 구막내는 막내라지만 그래도 4년이 넘었고 평소 생활이 합격점이고 뉴막내는 그러지 못해서 그랬던 걸까. 관리자가 이런 이유로 사람을 차별해도 되나. 이게 차별인가? 여기저기서 오라는데도 많은데 그냥 때려치우고 다른 데로 옮길까. 같은 생각들이 줄지어 떠오르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남은 직원들과 밥을 먹으러 가는데 아까 그 시누이 같은 친구가 한마디 한다. ‘애들이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내 눈엔 그걸 본인 선에서 커트하지 못하고 내 귀에 들어오게 한 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뒷담 하는 것 같아 말을 보태고 싶지도 않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밥을 먹으러 갔는데 밥 먹는 중에 전화가 온다. 최신 버전을 보내줬는데 자기네 시스템과 충돌이 있어 구 버전으로 다시 보내달라는 라이센스 재발급에 관련한 기술지원 건. 라이센스 관련 건들은 구막내가 하다가 뉴막내에게 인계하여 담당자가 지금 자리에 없다. 더 깊은 빡침이 몰려온다. ‘죄송한데 대표님 저희 엔지니어들이 오늘 오전 근무라… 연휴 지나고 지원 드려도 될까요…?’ 연휴 시작 직전에 지금 보내줘 봐야 그쪽 업체도 연휴에 일할 것도 아니니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도, 라이센스 재발급이 어려운 문제도 아니지만 최신 버전이 자기네 시스템과 충돌한다는 문제는 구 버전을 적용하기 전에 확인을 반드시 해야 하는 건인데, 라이센스조차도 사람이 없다며 지원을 못하는 마당에 원격을 지금 보자고 할 수도 없어서 죄송하다고 하고 끊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갔어도 정말 빡쳤을 텐데, 이런 일까지 터졌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난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이제 너희가 선의를 이용할 일들은 없을 거다. 회사에서 발휘하는 선의란 것이 없을 테니까. 내 선에서 다 자를 거다. 당장 30분씩 당긴 출퇴근 시간도 정시로 바꿔야겠다.


 사무실에 올라오니 뉴막내는 카톡으로 죄송하다는 얘기를 남겼고 구막내는 포스트잇에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남겨놨는데 니들의 미안하다는 말이 전혀 와닿지 않는구나. 그러고 있는데 점심 먹고 올라와서 십분이나 지났을까. 대략 열두시 십분 경. 아까 그 시누이도 가방을 싸고 와서 집에 간다고 한다. 얘는 또 뭐 하는 거지? 밥 먹고 가라는 게 딱 밥만 먹고 가라는 건 줄 알았던 건가? 애초에 선을 애매하게 정해놓으니 그 선이 자꾸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슬금슬금 옮겨지는 느낌이다. 그 친구들만의 문제는 아닐 거다. 내가 너무 풀어준 탓 일 거라고 생각한다. 원래 인간은 그런 거라고. 구막내가 추석 잘 보내라는 카톡에 응답을 안 했더니 전화가 온다. 받기 싫다. 죄송하다는 카톡이 다시 오고, 답 좀 해달라는 카톡이 다시 오지만 응답도, 전화받기도 싫다. 그러다가 연구소에 전화가 울려 내가 당겨 받았는데 구막내다. 그냥 전화 끊어버렸다. 얘는 아직도 평소처럼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상황으로 생각하나 보다. 니들은 선을 많이 넘었고 나는 그것을 평소처럼 웃어넘길 생각이 별로 없다. 나는 선을 넘은 사람들에 대해서 여간해서는 생각을 바꾸는 일이 없기도 하고 굉장히 재수 없게 대하는 편인데, 어떻게 조져야 하지 생각을 하고 있으니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엄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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