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익스프레스에 이은 테러블한 속지. 이쯤되면 노린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읽은 지는 꽤 오래되었으나 읽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생각들은 한참이나 정리되지 않아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은 다 쳐내고 글을 쓰느라 많이 늦었다. 계속 미뤄질 수도 있겠으나 최근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해서 조금은 급하게 글을 마무리했다.
’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굉장히 끌리는 제목이다. 밋밋한 영어 제목 Man seeks god 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누구에게나 아침에 필요한 순간 있을까? 나에게 그런 적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때가 신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인지하지 못했었지만, 그때가 분명히 그랬을 때인 것 같다. 대략 오 년 전부터 이년 전쯤까지. 신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걸 알았었다면 그 상황에서 조금 일찍 빠져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래. 나에게도 그런 순간,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내가 기댈 수 있는 신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그런 시간. 노래 ‘You raise me up’의 그 you 같은 무언가. 물론... 그들이 얘기하는 you와 내가 얘기하는 you는 다르겠지만.
나는 종교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스탠스다. 종교를 직업으로 삼는 자들. 종교를 이용하며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들. 아는 게 성경밖에 없어서 성경으로밖에 예시를 들지 못하지만 요한복음 2장 16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러나 지금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보면 그들이 이런 말씀들을 잘 지키고 있는가 하는지는 참 강한 의문이 든다. 이런 문제는 굳이 기독교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고, 이런 종류의 문제 말고도 문제들은 굳이 하나하나 꼬집지 않아도 많이 알려져 있다. 신의 이름을 팔아 자기 이득을 챙기는 자들은 이런 자들 외에도 충분히 많다. 내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유는 참 많지만 이런 자들도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이 있을까 없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젊을 때와 지금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무신론자에서 불가지론자로 바뀌었다. 젊을 때엔 ’신이 어디 있냐 그런 건 없다‘라고 생각을하는 무신론자였다가 지금은 나는 그것에 대해 논할 만큼 알지 못한다는 스탠스로 바뀌었다. 다만 내가 말하는 신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나님 같은 인격신이 아니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어떤 일을 행하는 인격신은 아직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종교나 그들이 하는 말들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산상수훈은 게티즈버그연설과 함께 지금도 가끔 찾아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 마디인 ‘네가 지금 얼마나 좆됐든 너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은 불교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불교는 어떤 신을 믿는다기보다는 정신 수양에 가까운 종교인데 (굉장히 많은 요약이 있지만 한마디로 줄이면) 개인의 수양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열반에 들 수 있다는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내가 아는 바로는 불교가 내 마음과 가장 가까운 종교이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에 귀의한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사실 나는 종교인들을 굉장히 부러워한다. 종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로 믿음이 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나는 정말 부럽다. 내 친구 중에 ’여호와의 증인‘인 친구가 한 명 있다. 이 종교가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군대 대신 옥살이를 선택한 사람들이 바로 이 ‘증인들’이다. 지금은 대체 복무가 마련된 걸로 알고 있으나 내 친구는 감옥에 갔다 왔다. 그는 믿음을 위해 그렇게까지 했다. 그 친구의 삶이 부러운 것은 그가 나보다 개인적인 능력이나 성취가 뛰어난 것이 아니고, 경제적으로 풍족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 친구는 걱정이 없다. 그야말로 태평의 결정체.
그에게 현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 친구에게 중요한 것은 ‘증인’들의 교리 중 하나인 ‘휴거’ 후의 삶, 내세다. 내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친구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진심으로 믿는 것은 물론, 본인이 현세에서 누리지 못하는 부분들은 내세에서, 천국에서 보상받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천국이, 그런 걱정 없는 삶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 친구는 현세에서 조금이라도 더 누리려 아둥바둥하는것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친구는 나의 끝없는 잔소리의 대상이지만, 소귀에 경 읽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에게는 나의 조언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그는 현재의 넉넉하지 못한 삶에 만족하고 있고, 나에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내세이지만, 그에게는 확실히 존재할 내세의 삶의 만족감은 그가 확실히 높을 것이다. 내세가 있다면 그는 천국이란 파라다이스에서 행복한 영생을 누릴 것이고, 나는 굉장히 다양한 죄목으로 지옥불에서 까맣게 숯이 되고 있을 테니. 나는 그런 그가 부럽다. 존 더 나은 현재를 위해 아둥바둥하지 않아도 되는 그가. 그의 믿음은 어떤 논리적인 말로도 꺾을 수 없다. 그는 그런 내세를 믿는(believe)것이 아니라 아는(know) 것처럼 보인다.
나도 그런 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모든 것을 던져서 믿을 수 있는 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적이나 깨달음이 나에게 와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이런 나의 생각과 많이 비슷한 상황에 있는 작가가 쓴 글이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재미있게 풀어냈던 소크라테스익스프레스를 쓴 작가의 다른 책. 굉장히 다양한 종교들(태반은 사이비 같았지만)을 작가가 직접 겪어보고, 각 종교의 현인들을 만나며 느낀 점을 쓴 여행기에 가까운 책. 진정한 종교, 좋은 종교는 우리를 높여주고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보다는 읽고 난 후의 ‘나‘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종교에 대한 진지한 고찰보다는 농담 섞인 유쾌한 체험기 같은 느낌으로 가볍게 읽기 좋았다. 일독을 권한다.
덧붙여, 코란에 따르면 내세에 우리를 기다리는 처녀의 수는 72명이라고 한다. 72명의 처녀가 아니게 되는 시간은 일주일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 후에는 어떻게 되지? 72명이 다시 리필되나…? 여튼 내세가 있다면 반드시 무슬림으로 태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