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특별할 것 없던 어느 날 미팅을 위해 스타벅스에서 평소같이 커피를 주문하려고 줄을 서다가 늘상 그렇듯이 옆쪽의 굿즈 칸을 봤는데 어떤 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엔 보통 텀블러를 만지작 거리면서 보는데 그날은 컵이 들어왔다. 컵을 뒤집어 가격을 본다. 거의 이만 원 돈. 저렴하지 않다. 40년 동안 살면서 컵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다이소에 가면 완전히 똑같은 기능을 하는 컵이 천원 이천 원에 즐비해 있는데 굳이 이 비싼 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나를 보고 누군가가 ‘부장님 나이 드셔서.. 여성호르몬…’ 임마 내가 지금도 아침에 아주 어? 하… 내가 참 굉장한데.. 표현할 방법이 없네… 여튼 컵 하나 사는데 이만원은 비싸다. 스벅 텀블러를 사면 무료 음료 쿠폰을 주는데, 이건 그것도 없다. 상대적으로 텀블러보다 비싸게 느껴진다. 가격표를 물끄러미 보다가 컵을 제자리에 다시 내려놓는다.
그런데 그 후로 스벅에 갈 때마다 그 컵이 눈에 들어온다. 애플병이라는 치료가 굉장히 어려운 병이 있다. 현대인들에게만 발병하는 병으로 치료법은 갖고 싶은 물건을 사면 되는 병이다. 아이패드든 맥북이든 갖고 싶은 제품을 구매 하면 치료가 되는 난치병이다.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무언가를 갖고 싶어지는 병으로, 사봤자 쓸데없다는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는 병이라 할 수 있다. 머리는 가격 값을 못하는 쓸데없는 지출이라는 것을 알지만 마음은 사라고 소리 지르는 것. 욕망이 쌓이면 필요가 된다는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케이스가 있을까 싶다. 옛날의 상사병도 이런 케이스겠다. 무언가를 바라는 욕망이 해소되지 않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필요가 된다.
나는 이미 애플병에 걸렸다가 치료가 된 적이 있다. 굉장히 고가의 제품을 갖고 싶어서 발병기간이 꽤 길었다. 거의 이백만원이나 되는 맥북을 갖고 싶었다. 맥북으로 뭔가 할 게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갖고 싶었다. 그것을 산다고 해서 내 생활이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시간이 지나도 해소되지 않는 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소비였다. 그런데, 비로소 그 욕망이 해소되고 나서야 거의 한 달 만에 편하게 잠을 잤다. 병은 확실히 고쳐졌다.
예전 파리의 연인이었나.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했던 말이 계속 떠오른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제일 싼 거야. 실제로 그런 것 같다. 나의 다른 욕망은 해소되기 굉장히 어렵고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겠지만, 이 욕망은 해소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돈이라면 어떤 욕망이든 간에 그것으로 해결하는 게 언제나 가장 빠르고 싸다. 이번에 걸린 병을 치료하는 데는 이만원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헛돈썼네 된장남이네 하며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지만 이번의 이 ‘필요’가 해소되는 데는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이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는 알 수 없다. 내 마음이 그런 걸 어쩌겠나.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걸. 거의 한 달이나 고민한 이번 ‘필요’는 이렇게 해소됐다. 그동안 고민한 게 바보 같아질 만큼. 나의 다른 욕망도 언젠가 해소될 수 있길. 욕망 자체가 없어지든, 어렵겠지만 필요가 채워지든.
진짜 이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