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569-618)는 실은 아주 업적이 많은 사람이다. 대운하는 만들고, 장성을 다시 복구하였고, 과거제도를 실시하였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였고, 호족세력을 제거하였으며, 서역을 정벌하고, 고구려를 3차례 정벌하였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수양제는 천여년이래로 공인된 중국 최악의 폭군중의 하나이다. 그의 죄상으로 열거되는 것은 동도(東都, 낙양)를 건설하고, 운하를 개통시켰으며, 강도(江都, 양주)를 순행하고, 세번 고구려를 정벌하여 나라와 백성에 화를 미치게 하였고, 이로써 수나라 제국이 망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정관정요, 수서, 자치통감등의 책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전부 당나라때 들어서 편찬된 것이어서 수양제를 추악하게 묘사하고 있고, 후세의 사가나 문학가들이 수양제를 나쁘게 묘사한 것들이 많아, 수양제의 진면목을 파악하는게 쉽지가 않다. 수양제는 사실 중국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의 하나이고, 업적이 가장 많은 황제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공로는 고구려를 3차례 정벌하느라 국력을 낭비하여 수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고, 그가 일대의 폭군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중국의 문인들의 사고방식이 편협하고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들어 한복륭교수의 <<수양제평전>>, 호극교수의 <<수양제신전>>은 이러한 역사의 안개를 걷어내고 수양제의 진면목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대운하나 동도(東都)를 건설한 것을 놓고 보면, 이것은 당시의 경제상황에 맞추기 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경제중심이 남쪽으로 이전하고, 서쪽은 쇠약해지고 동쪽은 흥성해지는 경제상황하에서 동서를 순행하고 정벌하며, 강남을 순유한 것도 어느정도에서는 통일된 제국의 전략을 정확히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극교수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 "진시황이 했던 일은 그도 대다수는 했다. 그러나 그는 분서갱유는 하지 않았다. 수양제가 했던 일을 당태종이 대다수를 했다. 그러나 당태종때는 수나라때만큼 부유하지 안핬다. 그런데, 진시황과 당태종은 위대한 황제로 칭송되면서 수양제는 폭군으로 욕만 얻어먹고 있는 것이다"
수문제가 수양제에게 피살되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모두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문제전>>의 작가인 한승 교수는 수문제의 사망에 대하여 고증을 한 후 수양제의 오명을 씻어주었다. 첫째, 수문제는 7월 10일 백관과 결별하고, 13일에 사망했다. 백관과 결별할 때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문제가 백관과 결별하는 장엄한 순간에 태자신분인 양광이 어찌 별실로 달려가서 선화부인과 놀아날 수 있겠는가. 둘째, 양광은 양소가 도와주어 태자로 되었다. 수문제가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양소를 불러서 양광을 폐하라고 하겠는가. 셋째, 시해수단이 "랍살(拉殺)" 즉, 몽둥이로 때려죽였다는 것인데, 그리고 소리가 사방에 들렸다는 것인데, 수양제가 아무리 그렇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랍살운운하는 글은 순수한 날조라고 보인다. <<수서>>의 기재에 의하면 수문제는 4월에 병이 든 이래로 병이 계속 악화되었고, 한번도 거른 적이 없던 황제탄신일(6월 13일)의 불사도 거르게 된다. 이때부터 7월 13일 사망할 때까지의 수십일간 어의는 최대한 노력해서 그의 명을 연장시켰다. 이 때 태자 양광은 계속하여 선화부인과 수문제를 모셨다. 실제로, 이후 당나라의 여러 신하들 중에서 수나라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어느 한 명 수양제가 부친인 수문제를 죽였다느 내용을 말한 사람이 없다. 당시, 만일 수양제가 수문제를 죽였다는 내용이 있다면,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고, 수양제를 토벌하자는 주장을 하자면 부친을 시해했다는 내용만큼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이 없을 것인데도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로써, 당시에는 수양제가 수문제를 시해했다는 내용의 말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서. 하조전>>에 따르면, 수문제는 죽기 전에 태자양광의 목을 끌어안고 후사에 대하여 일일이 당부를 한 다음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의 임종유언의 내용을 보더라도 피살된 것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운하를 건설한 것은 수나라때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수나라가 들어서면서 천하대일통의 국면은 이미 막을 수 없었고, 사회경제발전의 추세에 맞추고 수나라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리고 산동과 강남의 물자를 관중지방으로 운송하기 위하여 수문제가 광통거를 개통한 기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운하를 건설했던 것이다. 수양제는 남북 3,05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이것은 중국은 물론 세계역사상 가장 긴 운하였다. 대운하는 황하, 장강, 회하, 해하, 전당강의 오대수계에 걸쳐 있다. 남북으로 관통하는 운수 및 관개시스템이었다. 이로써 장안, 낙양의 양도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특히 강남의 인력, 물자에 대하여 유효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운하가 지나는 도시들, 항주, 양주, 개봉등의 도시의 공전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전국의 경제, 사회, 문화의 교류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수양제는 즉위후 변방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수문제가 581년, 585년, 586년 세번에 걸쳐서 장성을 수리한 것을 기초로 두번에 걸쳐 다시 장성을 수리한다. 607년 8월 수양제는 50만대군 10만 마필을 이끌고 돌궐을 정벌하러 간다. 돌궐칸인 계민가한의 왕정에서 3500명의 부락추장을 모아놓고 회의를 진행하며, 고창, 이오, 당항, 토곡혼등이 모두 조공을 바친다. 수양제는 대군의 위력으로 서역을 평정한 것이다.
수양제는 남, 북, 서부를 개척하기 위한 일련의 활동을 벌인다. 남방을 개척함에 있어서는 임읍(林邑, 월남 매콩강의 동쪽, 하노이의 이남 사이공의 북쪽)에 보내여 연전연승하고 수만의 포로를 잡는다. 그리고는 비경, 해음, 임읍의 삼군을 둔다. 두번째는 대만에 세번 군사를 보내어 대만과의 연계를 강황한다. 세번째는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대업7년부터 대업10년까지 세번에 걸쳐 전쟁을 일으킨다.
수양제 이전까지는 서역과 통하지 못했었는데, 서양제에 이르러 사절이 왕래하기 시작했다.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마노환, 불경, 십무녀, 사자피, 화서모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대업연간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한 나라가 40여개국에 이르렀다. 대업오년에는 수양제가 하우지방을 순시하였고, 같은 해에 토곡혼을 친히 정벌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청해성이 중국의 판도내에 들어오고, 하원군을 설치한다. 서역에는 서해, 선선, 차말등의 군을 두었다.
한복륭교수에 따르면 "수양제의 일생을 보면, 그가 20세때 수문제의 영을 받아 가장 젊은 지휘관으로 진(陳)을 멸망시킨 때로부터 618년 우문화급에게 강도에서 피살될 때까지 수양제는 30년간 정치를 했다. 이 30년은 바로 수나라가 극성에 도달하고 다시 멸망에 이르는 30년이다. 589년부터 611년 왕박의 반란이전까지의 전 22년을 제1단계로 보면 공로가 많다" 그가 꼽은 수양제의 공로는 남으로 진나라를 멸하고, 북으로 돌궐을 축출하였으며, 동궁의 자리를 얻고, 동남을 순시하였고, 부친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본 것등등이다. 수양제즉위후에는 개혁을 진행하고 기구를 간소화하고, 과거제도에서 진사과를 두어 인재를 뽑고, 동도 낙양을 건설하고, 운하를 팠으며, 장성을 수리하였다. 두번 강도를 순유하고, 지중해에 이르는 비단길을 다시 열었고, 학교를 회복하고, 처음으로 외국인 유학생을 받았으며, 사방관을 두어 주변국가의 언어를 배우게 하고, 소수민족에게 화친, 우호, 우대, 은총, 봉작, 구속등의 정책을 취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화이를 구분하지 않는 개방정책을 썼다. 이것들은 모두 긍정적인 것들이다. 수나라가 극성시기에 이르면서 강역이 넓어지고 인구가 4600만에 달하였으며 진, 한을 훨씬 초과했다. 국고도 충실하였고, 그 때 집적한 재부로 당나라는 이후 수십년간 쓰게 된다. 수양제가 전쟁을 하기는 했지만,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에 비하면 아주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수양제가 대공사를 벌일 때, 백성의 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등극하자마자 부인, 노비, 부곡의 부담을 면제했고, 이후 여러차례 대사면을 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은 수양제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당태종은 수양제가 매우 사치스러웠고, 그것으로 인하여 멸망했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당태종도 즉위초기에는 매우 근검을 중시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경제가 어렵고 돌궐에 많은 재물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후기에 들어 나라경제가 풍족해지자 상당히 화려하게 생활한 것으로 나타난다. 모두 국가의 경제상황이 뒷받침되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만으로 한 사람은 폭군이고 한 사람은 명군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호극교수는 '수양제가 몇년 먼저 죽고, 진시황, 당태종이 몇년 더 살았더라면, 아마도 그들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반대로 되지 않았을까'라는 가설까지 제시했다.
그래도 전쟁에 113만이나 데려와서 패했으면
폭군이라 불려도 말 못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