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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아구타(阿骨打) 금나라의 시조 (3) 2011/07/26 PM 08:39
아구타(完顔阿骨打, 1068-1123)는 여진인이다. 그가 창건한 금(金)나라는 중국역사상 3가지 주요한 흔적을 남겼다: 요(遼)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北宋)을 멸망시키고, 북경(北京)을 처음으로 수도로 삼았다. 이중 첫번째 일은 아구타 자신이 친히 완성했고, 두번째 일은 그이 유명에 따라 조카가 완성했으며, 세번째 일은 그의 손자가 완성했다.



그가 태어난 1068년에 북송은 다사다난했다. 개봉의 황궁안에는 대신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왕안석의 신법을 시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송신종은 시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일거에 요나라에 빼앗긴 '유운십육주'를 빼앗아 올 생각이었다. 내부적으로 심하게 싸우느라고 바깥에서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요나라의 심장부인, 동북의 차가운 땅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바로 이 아이의 탄생은 수십년후 직접적으로 북송의 멸망을 불러온다.



여진은 만주족의 조상이다. 옛만주어에서 "여진"은 "해동청(海東靑)"이라는 뜻이다. 해동청은 몸이 작고, 아주 흉맹한 매(鷹)를 말한다. 매의 이름이 부족의 명칭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11세기에 '해동청'은 여진인들에게 영광이 아닌 고난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북방을 통치하고 있던 요나라는 사냥을 즐겼고, 곳곳에서 '해동청'을 가져다가 사냥매로 삼았다. 여진족이라고 하더라도, '해동청'은 귀한 것이었다. 요나라에 인접해 있던 아구타의 부락에서는 해동청이 나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멀리 떨어진 동북변경의 오국(五國)부락에 가야만 '해동청'의 족적을 찾을 수 있었다.



요나라 사람들은 일거양득을 꾀했다. 아구타와 오국부락이 서로 죽임으로써 자신은 앉아서 '해동청'을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아구타는 요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여, 부친과 형을 따라 사방에서 '해동청'을 찾아 사람들을 죽였다. 그가 요나라에 반항할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의 부락은 가난하여 밥지을 솥마저도 없어서, 요나라에서 베풀어주는데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데, 어찌 그의 일을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장터에서 그는 갑옷을 입지도 않고 짧은 옷만을 입었으며, 활을 쏘면 320보의 거리까지 나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에게, 여진부락은 하나 둘 굴복했다.



아구타가 43세가 되던 해, 요나라는 한 여진의 반도(叛徒)를 받아들인다. 이름은 아소(阿疎)였다. 여진인들은 요나라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의 '내정'에 간섭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요나라의 휘황한 전적에 압도되어, 아무도 요나라에 아소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앞장섰다가는 가장 먼저 정을 맞을 것을 두려워했다.



중년이 되어 점차 안정감을 가지게 된 아구타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다음해 음력 2월, 요나라는 전통적인 "춘날발(春捺鉢)"을 거행했고, 모든 소속부락은 대표를 보내어 요나라황제가 주재하는 "두어연(頭魚宴)"에 참석했다. 연회에서 아구타는 일어나서, 아소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요나라의 천조제(天祚帝)는 한번 웃었을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연회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천조제는 명을 내려, "좌정하신 여러분들 모두 같이 노래하고 춤을 추어 흥을 돋웁시다"라고 하였다. 참가한 대표들은 억지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아구타만이 차갑게, "난 못해"라고 하였다.



천조제는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칼을 빼들어 아구타를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그를 따르던 신하인 소사선(蕭嗣先)이 만류했다. "황제께서 가난뱅이 여진인때문에 무기를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를 죽이면 우리 속국들을 교화하는데 문제가 생깁니다"라고 하였다.



이 한마디로 아구타의 목숨을 보전되지만, 요나라는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만다.



"두어연"에서 되돌아온 후, 아구타의 형은 병으로 죽는다. 그리하여 아구타가 부족의 수령직을 물려받는다. 그는 천조제가 반드시 자신을 손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책에 고민했다. 조카인 완안종한(完顔宗翰)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껄껄 웃으면서 한마디 내질렀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상대가 준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격이 강인한 완안종한은 아구타와는 숙질간이었지만, 형제처럼 가까웠다. 그의 한마디로 아구타의 우려는 해소되었고, 여진인의 나라를 세우는 길로 들어섰다.



1114년, 아구타는 깃발을 들었다. 출발시에 그의 연설을 아주 선동적이었다. 그러나, 청중은 겨우 2500명에 불과했다. 동북의 눈보라속에서 이 정도의 인원은 개미무리정도에 불과했다.



첫번째로 전투를 한 지점은 발해 녕강주였다. 결과적으로 녕강을 손에 넣고 군대를 3700명으로 늘인다.



갑옷을 벗어던진 요나라 수비군은 황급히 천조제의 앞으로 달려갔다. 여진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천조제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란? 우리 요나라가 누구인가. 불패지국이다. 가난뱅이 3700명? 10만대군을 이끌고 혼내주어야 겠다"



천조제는 소태후시절의 '백전백승'의 신화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100여년의 태평세월동안 요나라의 도검에는 녹이 슬었다는 것을 몰랐다. 10만대군이 출하점으로 가서, 느긋하고 여유있게 병영을 만들고, 얼음을 깨고, 눈을 치웠다. 그러나, 3700명의 여진기병은 아구타가 "꿈을 꾸었는데, 밤을 틈타 출병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하였다"는 격려하에 바람을 맞으며 눈을 헤치고 신병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다.



출하점전투도 아구타가 대승을 거둔다. 1115년 정월, 그는 기세를 타고 금나라를 건립한다. 건국후에 처음으로 한 일은 황룡부(黃龍府)로 병사를 보낸 것이다. 그는 황룡부를 포위만 하고 공격은 하지 않았다. 다만 외부에서 지원군이 오면 모조리 죽여버렸다. 일단 외부를 정리하고 나자,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고 하더라도 고립된 성에 불과했다.



과연 포위가 오래되어 양식과 풀이 끊어지자, 요나라군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황룡부가 함락되자, 천조제는 깜짝 놀랐다. 황룡부는 길림에 위치한 중요도시였고, 튼튼한 성이었다. 그곳은 요나라의 발원지인 황하(潢河)와도 멀지 않았다. 12세기의 동북지방에서는 '황룡부'를 차지하는 사람이 바로 전체 동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곳을 차지하게 되면 심리적인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요나라에 있어서도 그러했고, 금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악비가 금나라에 항거할 때, "직도황룡"이라는 방침을 세운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이다.



천조제는 친정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1115년 20만의 요나라군대는 금나라로 쳐들어간다.



아구타는 압력이 배가되었음을 느낀다. 연이은 대승에도 여진족의 선천적인 부족함은 메우기 힘들었다. 빈곤하고, 인구가 적었다. 당시 그에게는 2만의 병사밖에 없었다.



이미 반백에 가까운 아구타는 다시 장수대에 올랐다. 그는 칼로 얼굴을 긋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 "내가 병사를 일으켜 요나라에 대항하였던 것은 여진인 자신의 국가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며, 더 이상 압박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 이제 요나라 황제가 친히 나섰으니, 우리는 죽는 길밖에 없다. 차라리 너희가 나 한 사람을 죽이고, 나의 일족을 묶어서, 요나라 황제에게 바친다면, 혹시 살 길이 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고육계로 2만의 병사들의 사기는 드높아졌다. 천조제의 20만군대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미치광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투가 교착상태에 처해 있을 때, 천조제는 갑자기 회군을 명한다.



원래, 요나라의 후방에서 귀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시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 아구타는 호보답강에서 요나라군사를 추격하여 20만군대를 거의 섬멸시켰다. 호보탑강전투는 "인류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200년간 북방을 종횡하고, 한 세대를 풍미하던 요나라는 이때부터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구타는 그렇다고 숨을 돌릴 수는 없었다. 야율씨가 요나라를 세우고, 이원호가 서하를 세운 것과는 달리 완안씨가 금나라를 세운 것은 전투중에 황급히 이루어진 것이었다. 군대를 만든 것을 제외하고, 아구타는 완비된 중앙관료제도나 적장자승계제도를 마련한 시간조차 없었다. 여진족을 봉건문명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그의 후대들에게 남겨진 사명이었다. 말라죽은 낙타가 말보다 크다. 요나라를 철저히 소멸시키는 것이 그의 시급한 과제였다.



아구타는 동맹이 필요했다. 그는 북송을 떠올린다. 그러나, 새로 생긴 금나라정권은 외교경험이 없었다. 아구타는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 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2년이 흘렀다. 북송의 사신이 생각지도 않게 금나라를 찾아온 것이다.



관문과 산들이 막아서, 오랜 기간동안 금나라와 북송은 상대방이 바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동맹국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북송이 '전연지맹'을 맺고, 요나라가 '유운십육주'를 점거하도록 승인한지 이미 100년이 흘렀다. 그러나, 금석서화에 푹빠진 송휘종도 요나라의 손에서 실지를 회복하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다.



송휘종은 요나라의 후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다. 하루는 요나라의 대신인 마식(馬植)이 북송에 투항해왔고, 송휘종은 그때서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요나라와 금나라가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북송의 사신은 발해를 건너 금나라로 간 것이다.



협상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금나라가 북송의 번속국인지 여부를 놓고 쌍방은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1120년, 유운십육주를 회복할 마음이 조급했던 송휘종은 양보를 결정하고, 외교문서상 금나라와 평등한 예를 하는 것으로 하였다. 쌍방은 "해상지맹"을 체결한다: "1121년 음력 9월, 송나라병사는 연경(북경)으로 군사를 보내고, 금나라는 중경(中京)으로 군사를 보내어 요나라를 협공한다. 서경은 누구든지 먼저 함락시키는 편이 가진다."



일단 희망이 현실로 되자, 송휘종의 성격상 우유부단함이 다시 나타난다. 전투준비명령을 계속 미룬 것이다. 아구타는 9월부터 다음해 정월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결정한다. 하물며 여러해동안 전투경험을 가진 그는 금나라 단독으로도 요나라를 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요나라를 정벌하는 호각을 불고, 바로 중경, 서경을 차지한다.



금나라병사들이 대승을 거두는 것을 보고, 송휘종은 비로소 느긋하게 병사를 보냈다. 송나라군대는 부패하고 송휘종의 지휘능력은 엉망이었다. 그리하여 연경성을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무너뜨리지 못했다. 금나라군사가 지원을 해주고서야 비로소 1122년 음력 12월에 함락시킬 수 있었다.



요나라가 멸망했다. "유운십육주"도 수복했다. 북송 200여년가 최대의 우환이 제거된 것이다. 다만, 좋아할때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슬퍼하여야 할 때였다. 망국의 위기는 한발 한발 다가왔다. 해상지맹을 통해서 금나라는 송나라의 무능과 부패를 한 눈에 알아봤다. 임종 직전에 아구타는 조카인 완안종한에게 유언을 남긴다: "요나라를 멸하는 것은 완성했으니, 송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하라"



그는 웃음을 머금고 죽었다. 아무런 걱정을 남기지 않았다. 3년후, 금나라병사는 남하하여, 휘종,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는다. 북송이 멸망하니, 역사에서 "정강지변"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역사가 여진인에게 부여한 사명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요나라를 멸하고, 북송을 멸한 후, 1151년, 아구타의 손자인 해릉왕 완안량은 연경으로 천도한다. 그리하여 북경이 처음으로 전국의 수도가 된다. 북방에 새로운 정치중심도시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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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조상들은 여진은 정벌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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