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정(悟靜)
황제는 중국봉건왕조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몸은 자연히 온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중 하나이다. 그래서 대신들은 황제를 배알할 때는 항상 "성궁만복(聖躬萬福)"을 외쳤다(TV드리마에서 보는 것과 같이 '만세(萬歲)'를 외치지는 않았다). 황제의 몸이 이렇게 중요하니, 자연히 활화석처럼 조심스럽게 보호했고, 함부로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더더구나 몽둥이를 대는 것과 같은 것은 대불경한 일이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금나라의 두번째 황제인 금태종 완안오걸매(完顔吳乞買)그 바로 그이다. 그는 대신들에 의하여 용상에서 끌려내려와 곤장을 얻어맞고, 스스로 자아비판을 하였다. 이러한 일은 중국2천년역사상 유일한 경우였다.
완안오걸매는 개국황제인 완안아구타(阿骨打)의 동생이다. 이 자는 힘이 남달랐고, 자주 숲속으로 달려들어가, 혼자서 맨 손으로 곰과 싸우곤 했다. 매번 쓰러진 것은 곰이었다. 그는 겨우 피부가 상하는 상처를 입을 뿐이었다. 그는 아구타와 형제간의 우의가 깊었다. 저명한 두어연(頭魚宴)사건때, 아구타는 부락의 대표로 창가했다. 관례에 따르면, 매 두령은 모두 춤츨 추어서 요나라 황제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아구타는 기개가 있는 사람으로, 때려 죽여도 춤을 추지 않겠다고 했다. 요나라의 천조황제는 아주 화가나서, 그 자리에서 아구타를 때려죽이라고 명한다. 덩치가 큰 오걸매가 그 자리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시종의 신분으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즉,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은 것이다. 요나라 천조황제는 이를 보고 가가대소를 하고, 아구타의 죄를 사해주었다.
아구타가 나라를 세운 후 오걸매는 암반발극렬(暗班勃極列, 발극렬은 금나라의 특유한 기구로, 현재의 정치국 상임위원에 해당한다. 그중 암반발극렬은 황제후계자를 의미한다)로써, 형인 아구타를 따라 천하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금태조가 군대를 이끌고 요나라를 정벌할 때, 그는 경도에 남아서, 조정을 총괄했다. 천보7년(1123년) 8월, 금태조가 죽고, 9월에 황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천회(天會)라 한다.
그렇다면, 그가 곤장을 맞은 일은 어떻게 된 것인가? 금나라는 개국초기에 자산이 얼마 없었다. 황궁마저도 거의 산적소굴처럼 지어놓았다. 금태조 완안아구타는 절약하는 혁명전신으로 군신들과의 사이에 맹약을 맺는다. 즉 국고에 있는 재물은 단지 전쟁때에만 꺼내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맹약을 어기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20대의 곤장을 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완안아구타가 죽을 때까지 잘 지켜져 내려왔다. 완안오걸매가 즉위한 초기에도 오걸매는 아주 절약했다. 그의 황궁의 성벽은 버드나무와 유수로 만든 울타이렸다. 전청(前廳)에서 일을 보고, 후원에서 거주했다. 어느 정도 양산박과 비슷했다. 돼지를 기르고 양을 치는 백성들이 전청과 후원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중요한 군사회의를 할 때만 사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집이 좀 엉망인 것은 견딜 수 있다. 의복이 낡은 것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술은 좀 마실 수 있지 않은가? 오래동안 참던 오걸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몰래 창고의 문을 열고 일부 재물을 꺼내서 썼다. 그후 승상이 국고를 점검하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즉시 중신 점한(粘罕)에게 보고한다. 점한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조회때 이를 공개했다. 군신들이 상의를 한 끝에, 이 낭비하고 사치하는 "혼군황제"를 처벌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완안오걸매를 용상에서 내려오게 한 후에 곤장 스무대를 친다. 그리고 그를 다시 용상에 되모셔 놓는다. 그리고는 점한을 위시한 전체 대신은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오걸매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꾹 참고 내시가 가져다주는 압경주(壓驚酒)를 들이키고, 중신들의 죄를 사면해줄 수밖에는 없다. 일평생을 곰과 싸워온 오걸매는 꿈에도 대신들에게 당할줄 몰랐을 것이다. 그후 그는 할 수 없이 요동( 窑洞)에 거주하면서 야채와 두부만 먹고 살았다. 죽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