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영화를 보기 바로 전에 본 SF영화가 21세기 SF영화중 최고의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칠드런 오브 맨>이였습니다. 둘다 근미래에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메세지나 연출에선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칠드런 오브 맨>을 보고나서도 <설국열차>에 실망하지 않을 정도로 봉준호 감독의 신작은 높은 완성도의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설국열차>는 사회계층 사이의 갈등과 하위계층의 혁명이라는, 어찌보면 꽤나 진부한 소재를 굉장히 심도있게 다루어갑니다. 이 영화는 근미래, 살아남은 인류는 전부 쉴세없이 달리는 기차에 탑승하고 있고, 거지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꼬리칸의 하층민들이 칸을 하나씩 점령해가면서 엔진룸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인, 줄거리만 보면 굉장히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진부하고 단순하다는 느낌은 오히려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 반대로, 무조건적으로 상위계층을 악당화 시키고 하위계층을 동정하게 만드는 플롯보다는, 사회계층 사이의 갈등과 존재의의라는 전체적은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합니다.
<설국열차> 연출의 최대 장점은 바로 일직선으로 이어진 기차라는 패쇄된 공간을 정말 알차게 꾸며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연출은 카메라 워킹이나, 극강의 디테일을 자랑하는 미술소품과 배경, 그리고 전체적인 미장센에서 절실히 드러납니다. 열차 안은 분명 패쇄공포증을 유발시킬정도로 좁은 공간이지만, 그와 절묘하게 심벌과 깊이로 그 공간을 채워 "좁다는 느낌"은 들지만 "작다는 느낌"은 들지않게 만듭니다.
게다가 칸이 바뀌면서 바뀌는 환경은 눈도 즐겁지만 칸 자체의 상징적인 의미까지 제대로 내포되어 있어 정말 꽉찬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바뀌는 칸은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영화의 환경을 관객들이 끝까지 흥미를 가지게 페이스를 바꿔주는 역할도 충실히 해냅니다.
카메라 워크나 연출도 굉장히 독창적입니다. 특히 처음 혁명이 시작될때의 그 긴박함과 박력은 최근의 영화중 그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분명 일직선이라는 공간에서 이 만큼의 박력을 구현해낸 것을 보면 "역시 봉준호"라는 느낌이 들정도입니다. 슬로우 모션의 액션 연출도 많이 사용되는데, 상황에 따라 적절히 쓰였다는 생각이 들어 그다지 지루해진다는 느낌이 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대사는 그다지 재밌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엔 대사가 정말 쓸데없이 많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봉준호 감독이라면 충분히 시각적 연출과 절제된 대사들만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부 말로써 알려주려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연출로 봤을때, 전체적으로 영화가 정말 멋지게 시작하다가 후반가서 급격히 흥미가 하락한다는 것이 많이 지적되었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중후반까지는 멋진 장면들과 연출로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영화 극초반부에서 커티스를 소개하는 장면은 짧지만 정말 강렬하게 존재감을 심어주는게 대사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 카메라와 연출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첫부분의 긴박감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중반부의 아스트랄함은 관객들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이 많은 엔딩도 저는 열린 결말과, 엔딩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그자체는 탁월한 선택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마다 엔딩이 무엇을 뜻하느냐 의견이 갈리는 것도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하구요.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스포일러: 윌포드가 마지막에 말이 정말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수준급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말할 것도 없고, 크리스 에반스도 중후한 분위기와 함께 많은 아픔을 끌어안고 있는 커티스를 멋지게 연기해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좋아한 연기는 다름아닌 고아성의 연기였는데요, 특히나 중반에 맛이가버린 연기(...)가 정말 압권이였습니다. 오히려 송강호의 연기는 기억에 남을 정도라곤 생각하지 않는데요, 다른 건 몰라도 영어로된 작품에서 혼자 한국말을 한다는 요소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연기와 괴리감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 이유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제를 쉽게 전한다는 목적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그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장인물들은 주제를 나타내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점입니다. 이런 연출이 오히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전했지만, 등장인물들 그 자체에는 그다지 애정을 가지 않게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마더>나 <괴물>, <살인의 추억>에서도 "살아있는 듯한" 등장인물들을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주제에 걸맞게 절묘하고 자연스럽게 상징화시킨 것에 비하면 <설국열차>의 등장인물들은 오히려 기차의 한 톱니바퀴처럼 자신이 주어진 일만 충실하게 하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안드는 지라 관객들이 한발자국 떨어져서, 제3자의 시점으로 보게 만듭니다.
물론 이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의식에 맞춘, 감독이 의도한 연출일 수도 있지만, 등장인물에 그다지 애착이 가지 않는다는 점은 영화의 전체적인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하락 시킬 수있는 단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제에 목매다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연출의 우아함이 떨어지게 만드는데에 영향을 주어서 장점보단 단점을 더 많이 생산해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완성도로보나, 오락적인 요소로 보나, 굉장히 잘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저기 아쉬운점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긴 해도, 보고나서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알찬 영화를 보고 싶으시다면 <설국열차>를 보셔도 실망하지 않으실거라 생각합니다.
한줄평: "주제에 너무 목매단다는 아쉬운점에도 불구하고 멋진 미장센과 연출로 무장한 알찬 SF영화"
고아성이 와인에 취하면서 걸어가는게 가장 기억에 남네요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