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악의 손길 (Touch of Evil)
감독: 오슨 웰스 (Orson Welles)
제작년도: 1958년
장르: 미스테리, 스릴러, 필름 느와르
영화사에서 오슨 웰스만큼 비극적인 천재로 기억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사상 최고의 영화라 불리우는 <시민 케인>에 얽힌 제작비화는 이미 너무나도 유명하고, 말년때도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는 커녕 투자자가 없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타 영화에서 배우로 뛰고 그 돈으로 자신의 영화를 제작하는, 전혀 편하지 않은 생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악의 손길>은 조금 다른 케이스인데요, 사실은 아직 감독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공 역을 제안받은 찰튼 헤스턴이 이미 상대역으로 캐스팅된 웰스가 감독을 한다면 생각하겠다고 하여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영화의 기원이 어쨌든 간에, <악의 손길>은 웰스 감독의 천재성이 스며나오는 작품입니다.
<악의 손길>하면 처음 생각나는 장면은 다름아닌 오프닝 씬입니다. CGI가 보편화되고 촬영기법이 진일보된 지금에 와서도 <악의 손길>의 첫 롱테이크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리허설하는데만 몇주가 걸릴 정도로 철저한 계산을 거쳐서 웰스 감독은 이 장면을 찍었는데요, 연극계 출신 감독답게 철저한 미장센과 웰스 감독 특유의 천재적인 촬영에 대한 이해도가 결합되어 기술적으로도, 내러티브적으로도 완벽한 씬이 탄생합니다. 이 한 장면으로 웰스 감독은 영화의 기본 배경, 미스테리, 서스펜스를 한꺼번에 담아내고, 나아가 멕시코와 미국간의 유동적인 관계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샷은 자동차 폭발 샷과 이어지는 로우앵글 핸드헬드 샷입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샷에서 역동적이고 즉흥적으로 갑자기 바뀌는 카메라 워킹은 웰스 감독이 가지고 있는 천재적인 센스를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의 손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으로 오프닝 씬을 꼽는데요, 사실 <악의 손길>에서 완벽하지 않은 샷은 손꼽을 정도로 적고, 많은 씬이 50년대 영화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파격적인 촬영기법으로 영화가 진행되어 영원한 클래스를 자랑합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중 하나가 만약 <시민 케인>이 똑같은 구도로 촬영되어 리메이크가 되면 전혀 구식이라고 느끼지 못할 거라는 것인데, <악의 손길>은 리메이크조차 할 필요도 없이, 원본만 봐도 구식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웰스 감독이 <시민 케인>에서 자주 사용한 딥 포커스 촬영 기법을 <악의 손길>에서도 자주 사용하긴 합니다. 다만, <악의 손길>에선 마치 "악의 손길"에 유동적으로 마음이 바뀌어가는 인물들을 대변하려는 듯 카메라가 자주 움직이고, 더치앵글/로우앵글 클로즈업이 많기 때문에 <악의 손길>은 오히려 미장센보단 촬영 기법 그 자체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이런 특이한 촬영 기법으로 스크린에 일어나는 일만 캡쳐하는 것이 아니라, 촬영 (그리고 조명) 그 자체로 인물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의 인물 묘사는 필름 느와르 장르에선 흔한 기법이지만, <악의 손길>에선 롱테이크와 딥 포커스 덕분에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묘사를 유동적으로 가능케합니다.
필름 느와르란 장르는 원래부터 흑백논리보단 조금 더 가운데의, 정의의 애매모호함을 지향하기에 흑백 스크린이 잘 어울리는 장르지만, <악의 손길>은 전형적인 필름 느와르라고 정의하기엔 굉장히 다채로운 색채를 띕니다. 물론 스크린은 흑백이지만, 웰스 감독이 자주 사용하는 기이하고도 특이한 촬영기법과 똑같이 기이하고도 특이한 조연들의 성격묘사와 연기에 의해 기묘하게도 전혀 우울하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필름 느와르가 즐겨 사용하는 드라마틱한 배경음악도 배제한채 흥겨운 락큰롤을 틀어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일과의 괴리감을 키웁니다. 영화를 꿰뚫는 이런 기묘함은 50년대 필름 느와르 작품이 아닌, 오히려 90년대 코엔 형제 감독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악의 손길>은 정말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악의 손길>의 세련된 연출 기법은 고작 멋있게 보이려고 쓰인게 아닙니다. 샷 하나 하나마다 딥 포커스와 롱테이크로 점점 악의 손길에 물들어가는 인물들을 상징적으로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고, 미국-멕시코 국경이라는 역동적인 배경을 세트라는 인공적인 느낌을 최대한 배제하여 관객들에게 전하는데 주력합니다. 더치앵글과 로우앵글은 관객들에게 말못할 불편함을 주고, 영화의 기묘한 캐릭터들은 클로즈업하여 관객들에게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 특별한 긴장감을 끝까지 끌고 갑니다.
이렇게 <악의 손길>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시각적 연출을 극대화시켜 스토리텔링의 레벨을 한단계 더 올렸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센스있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대단한 점은 시각적 연출이 아닌 다른 모든 부분도 완벽하거나 완벽에 가깝다는 점이겠죠. 세월이 흘러도 영원한 걸작이란 바로 이런 영화를 가르키는게 아닐까요.
한줄평: "Perfection."
※ 제가 본 버젼은 1998년 처음 공개된, 웰스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허락없이 재편집한 버젼을 보고 쓴 58페이지의 노트를 토대로 웰스 감독의 첫구상에 최대한 가깝게 재편집/리마스터를 한 버젼입니다.
이 글은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30일 영화 챌린지"중 하나입니다.
"30일 영화 챌린지"는 그다지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랜덤하게 고른 30개의 영화를 랜덤하게 순서를 정하여 30일 동안 하루에 영화 하나씩 보고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분석을 쓰는 겁니다.
제가 볼 영화들의 리스트는 여기(클릭)에 있습니다.
내일의 영화는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셰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