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 The Seventh Seal)
감독: 잉마르 베리만 (Ingmar Bergman)
제작년도: 1957년
장르: 드라마
성경에서 요한묵시록은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묵시록에 씌여있는 일들은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닌 예언서고, 그러므로 성경에 씌여있는 일들 중 유일하게 그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말하자면, 요한묵시록이야 말로 유일하게 성경이 독자에게 신이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건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요한묵시록을 배경으로 종말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서브컬쳐에서든 현실에서든 많이 보이는데요, 이 사람들도 내면 깊숙이엔 세계의 종말을 믿는다기보단 묵시록에 씌여있는 대로 종말을 매개체로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갈망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제 7의 봉인>은 이러한 해석을 배경에 두고 진행됩니다. 때는 중세시대, 10년간의 성전 후 고향 스웨덴에 자신의 종자와 함께 돌아온 한 기사는 자신을 데려가려고 하는 죽음의 화신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을 데려가게하는 대신 기사는 죽음과 체스 내기를 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고향 스웨덴은 흑사병에 휩쓸려 황폐하게 되었고, 이런 암울한 곳을 배경으로 기사와 종자는 여정중 만난 여러 다른 군상들과 함께 동쪽의 자신의 영지까지 여행하게 됩니다.
베리만 감독 스타일은 전형적인 예술영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철학적입니다. 특히 <제 7의 봉인>은 태생이 베리만 감독이 쓴 연극이였기에 더욱 더 연극적인 연출이 많고 그와 함께 대사도 많습니다. 주인공인 기사와 죽음의 선문답으로 이루어진 대사는 일품인데요, 대사뿐만 아니라 죽음을 연기한 배우도 검은색으로 과장된 의상과 특유의 신비로움이 조합하여 두려움과 불가해를 한꺼번에 담아 죽음이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제 7의 봉인>에서 죽음이란 두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도망칠 수 없는, 그림자처럼 언제나 뒤에 존재하는 공포이죠. 이런 죽음의 얼굴을 베리만 감독은 여러 시각적 기법으로 표현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바로 죽음을 상징하는 인물과 물건을 인물들 뒤에 찍히게 만들어 그 불안한 공포감이 영화 전체를 압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 주인공 일행이 교회에 들어갔을 때, 욘스와 화가가 죽음을 소재로한 벽화를 등에 두고 죽음에 관한 여러 농담을 합니다. 떠돌이 배우인 요프가 기사와 처음 만나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에서도 그의 뒤엔 해골 소품이 보이게 하지요.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장면은 기사가 교회에서 죽음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인데요, 베리만 감독은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어 관객들의 시점에선 기사가 창살 안에 있어보이게 하여 마치 죽음이라는 감옥 안에 갇힌 듯, 죽음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그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또다른 얼굴이자 <제 7의 봉인>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주인공 기사는 영화 내내 자신의 종교와 신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유는 고통때문이 아니라 죽음 후의 일을 모른다는 것인데, 이 것에 사로잡힌 기사는 자신의 몸은 준비가 되었다고 하여도 이성적으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뿌리치려 노력합니다. 죽음과 체스를 두는 것도 죽음을 더욱 잘 알려고하는 몸부림이며, 영화 후반에 그가 화형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악마에 대해 물어보는 장면 또한 신이 자신의 죽음 후 그를 위해 준비한 것을 알고 싶어하는 갈망을 상징합니다.
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란 모티프는 영화 내내 존재합니다. 흑사병을 피해 기사를 따라 동쪽 숲으로 가려는 자들은 모두 기사 없이 숲에 갔을 때 나무 사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기사와 함께 가기를 자처합니다. 그들의 눈엔 기사가 바로 그들의 구세주이며, 기사가 그들에게 답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 흑사병에 이미 걸린 기사(그래서 죽음이 그를 거둬가려고 하는 것이겠지요)를 따라가면 자신들 또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들은 당연한 듯이 기사를 따라갑니다. 그런 기사는 그를 따라오는 자들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며, 결국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듯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공포는 영화의 다른 주제의식과 같이 역시 시각적으로 표현됩니다. 베리만 감독이 <제 7의 봉인>에서 자주 쓰는 연출 기법중 하나가 바로 카메라 뒤의 오프스크린을 응시하는 인물을 화면에 담는 것 인데요, 이런 연출로써 베리만 감독은 관객들에게 그 공포의 근원을 몇초간이라도 알려주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런 연출은 대부분 사운드트랙을 대부분 없앤, 정적 속에서 펼쳐지고, 이런 드라마틱하지 않은, 건조한 연출은 결국 공포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알지 못한다는 혼란과 함께 정적이 가져오는 공허함을 느끼게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바로 침묵이란 모티프입니다. 영화의 첫 대사와 마지막 대사는 둘다 요한묵시록 8장 1절에 씌여있는 문구인데요("그리고 그 양이 7개의 봉인을 여니, 약 30분의 시간 동안 천상의 침묵이 있었노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침묵입니다. 기사가 자신을 따라오는 자들에게 자기와 죽음의 관계에 관해 침묵하였듯이, 신도 신자들에게 침묵합니다. 지상은 흑사병에 의해 초토화가 되고 생지옥이 되어도 신은 사람들에게 답을 주지 않습니다. 기사가 아무리 신의 답을 갈망해도 돌아오는 것은 침묵입니다.
이 침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한 장면이 있는데, 바로 욘스가 들어간 한 곳간에 쓰러져 죽어있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은 지붕에 뚤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비춰지는데, 이 장면이야 말로 한 사람의 죽음을 응시만 하는 신의 모습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 죽은 여인의 시체에서 장신구들을 훔치려는 자를 막은 것이 다름아닌 니힐리스트적이고 무신론자에 가까운 욘스로, 이런 아이러니 통해 베리만 감독은 신의 침묵으로부터 오는 종교의 공허함에 의문을 던집니다.
<제 7의 봉인>은 "죽음"은 의인화된 인물로써 보여줄 지언정, 영화 속에 "신"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신의 의인화라면 바로 예수님인데, <제 7의 봉인>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형상은 어설프게 나무로 깎아만든 십자가에 매달린 상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리만 감독은 죽음이란 보고 느낄 수 있는 현실이고, 그 죽음에게서 인간들을 지키고 안심시켜야하는 신이란 존재는 침묵만을 유지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시사합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과의 체스로 어린 생명을 구한 것은 인간인 기사입니다.
한줄평: "우리는 모두 신이 아닌 죽음과 체스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30일 영화 챌린지"중 하나입니다.
"30일 영화 챌린지"는 그다지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랜덤하게 고른 30개의 영화를 랜덤하게 순서를 정하여 30일 동안 하루에 영화 하나씩 보고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분석을 쓰는 겁니다.
제가 볼 영화들의 리스트는 여기(클릭)에 있습니다.
내일의 영화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미치광이 삐에로>입니다.
제가 이 영화들 보기전에 그 설레임들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