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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 영화] [DAY21] 페르소나 (Persona, 1966) (4) 2014/05/31 AM 02:39

제목: 페르소나 (Persona)
감독: 잉마르 베리만 (Ingmar Bergman)
제작년도: 1966년
장르: 드라마

<페르소나>는 저에게 있어서 약간 특별한 영화입니다. 제가 작년 영화쪽으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정한 후, 첫 영화학 강의에서 교수님이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틀어주신 영상이 바로 그 유명한 <페르소나>의 오프닝 장면이였거든요. 아마 영화를 접할 때 내러티브 쪽을 중요시하는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에게 "영화에서 연출이란 '스토리'를 관객들에게 전하는 도구가 아닌, '의미' 그 자체를 전하는 도구이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을 때 본질적으로 하나의 아방가르드 영화나 다름 없는 <페르소나>의 오프닝만큼 효과적인 장면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베리만 감독은 이 장면으로 영화가 가진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는 예술로써의 위치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키고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은 영사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죠)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전합니다. 이 장면이야 말로 <페르소나>라는 교향곡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흔히들 베리만 감독의 최고의 작품은 바로 이 <페르소나>라고 많은 평론가들이 말합니다. 저번에 본 <제 7의 봉인>이 만약 연극적 스타일이 조금 더 부각된 영화였다면, <페르소나>는 그야말로 영화라는 매체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제 7의 봉인>에서 베리만 감독이 연극에서 기원하는 미장센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의미를 전달하였다면 (예를 들어 '죽음'을 상징하는 소품들과 의상), <페르소나>에선 보다 영화만의 요소, 즉 편집과 촬영으로 영화의 메타포를 엮음으로써 영화의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그리고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오프닝 장면이라는 것이죠.

'페르소나'란 라틴어로 '가면'을 뜻합니다. 로마 제국 후반기에 이 페르소나란 단어가 배우들이 연기할 때 쓰는 가면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배역을 뜻하게 되었고, 영화학에서도 비슷한 말을 뜻하죠. 한편 심리학 용어로는 칼 융이 제창한 개념으로 사람이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혹은 자신을 감추고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만들어낸 겉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인격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요즘 많은 사람들이 SNS에서 자신이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은 걸 들 수 있죠.

그런데 이런 개념은 사실 영화학에서도 유명한 영화학자 리처드 다이어가 제시한 스타 이론 (star theory)와 굉장히 흡사합니다. 배우가 영화로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배우 실제 자신의 이미지는 굉장히 다르죠. 친숙한 예를 들자면 바로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있습니다. 8,90년대 액션 영화의 황제로써 스왈츠네거는 그의 필모를 통해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였지만 실제로는 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된 것과도 같이 굉장히 지적인 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영화팬들에게 슈왈츠네거는 샷건을 들고 "아 윌 비 백"이라고 말해주는 이미지가 더 강하죠. 이게 바로 영화학에서 말하는 스타 페르소나입니다. 그리고 칼 융의 페르소나 이론이 가장 적나라하게 적용되는 곳이 바로 '영화'나 '연극'의 배우들이고, 이 사실은 <페르소나>의 첫 샷과 마지막 샷이 영사기에 불을 키고 끄는 장면이고 주인공 중 한명이 배우라는 것과 아마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페르소나>에서 두 여주인공중 한명인 엘리자벳은 유명한 연극 배우로써, 어느 날 갑자기 말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몸은 물론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희극 배우로써의 그녀의 페르소나와 그녀의 내면 사이의 차이를 납득하지 못해 진실된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녀가 말을 하기 거부하는 이유는 의외로 영화 초중반에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되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어차피 자신이 말하는 것은 페르소나(배우로써의 페르소나든지, 아님 사회인으로써의 페르소나든지)에 의해 뒤틀린 거짓이며, 거짓을 행하며 사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라고 그녀의 의사는 말합니다. 세상과 자신이 거짓에 싸여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지게 되어버린 거죠.

다른 주인공인 알마는 그런 엘리자벳을 도와주는 간호사입니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는 대화 상대인 엘리자벳에게 자신의 비밀까지 전부 말하죠.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엘리자벳과 알마가 처음 만났을 때 알마가 자기 소개를 하면서 왠만하면 말하지 않을 만한, 예를 들어 자신이 약혼을 했고 이제 곧 결혼할 거라는 사실까지 말해주지요. 무엇보다 알마는 첫 등장 장면에서 앞 모습은 물론, 옆 모습, 뒷 모습까지 모두 보여집니다. 마치 이 캐릭터는 진실된 인물로써 사회에 거짓없이 나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알마는 엘리자벳의 흥미를 끌게 되고, 둘의 관계는 둘이 바다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면서 동성애의 영역으로까지 발전을 합니다.

그런 알마는 엘리자벳이 자신을 그저 흥미로운 관찰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영화는 굉장히 기이한 방향으로 바뀌어 갑니다. 알마가 이 깨달음으로 인해 엘리자벳이 그랬던 것과 같이 자신도 이 세상은 거짓으로 싸인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장면부터 둘의 얼굴이 겹쳐지는 샷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점점 둘의 사이는 가까워 지는 것이 아닌, 아예 둘의 아이덴티티가 동일시 되어가는 암시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죠. 특히 영화의 마지막 15분은 이런 암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영화는 더 이상 스토리가 중요한 것이 아닌,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 연출, 촬영, 편집, 즉 모든 '영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의미 그 자체를 전달하려는데에 주력합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알마는 엘리자벳에게 하는 긴 대사를 두번이나 합니다. 하지만 첫번째는 엘리자벳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지는 반면, 두번째에선 같은 대사임에도 알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줍니다. 둘이 같은 인격체라는 것을 추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죠. 두 번 다 두 여배우가 카메라를 직접 보는 연기를 하는데요, 첫번째때는 마치 관객들이 알마의 입을 통해 엘리자벳에게 그녀가 왜 그녀의 페르소나를 거부하고 침묵에 빠졌는가에 설명을 하는 느낌을 주고, 두번째때는 마치 알마가 (엘리자벳이 된) 관객들에게 왜 자신들이 침묵에 빠졌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이 두 페르소나 (엘리자벳과 알마)는 결국 동일화되어, 페르소나, 즉 세상과 자신의 거짓을 받아들이기로 한 알마는 엘리자벳이 되어 휴양지를 떠난다는 결말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페르소나>는 중반 이 후부터는 추상화에 가까울 정도로 정상적인 스토리 흐름으로 영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오직 연출에 의한 메타포와 암시만으로 이 두 '캐릭터'의 '캐릭터성'을 희석시키고 이들의 페르소나만을 남겨 둔 채 클라이맥스를 이끌어가죠. 이렇게 보면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 해체주의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데, <페르소나>는 고다르 감독 작품만큼 노골적으로 그런 사상을 표출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베리만 감독은 이 <페르소나>를 통해 영화와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그리고 그 차이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역설적으로 생겨나는 현실과 영화의 동일화를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영화가 영사기가 켜지고 필름이 돌아가며 애니메이션-무성영화-그리고 예술영화 순으로 구성된 몽타주 씬으로 시작하는 것도 영화가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베리만 감독의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은 관객들이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감정이입이 가능한 '스토리'가 아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인지하게 만들어 이런 메시지를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모든 잠재력을 활용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전해지게 하죠.

실제로 <페르소나>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많이 뽑힐 뿐만 아니라, 많은 비평가들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 중 하나로 뽑는 작품입니다. <페르소나>는 영화라는 매체를 정말 잘 이해한 한 예술가가 이 매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만든 하나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페르소나>의 오프닝 시퀀스는 정말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전형적인 형식주의(formalist) 영화가 말하려는 것을 컨텐츠를 통해서가 아니라 형식 그 자체로 전달하였으니까요.

한줄평: "가장 영화다운 예술, 가장 예술다운 영화."


<페르소나>의 오프닝.




이 글은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30일 영화 챌린지"중 하나입니다.
"30일 영화 챌린지"는 그다지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랜덤하게 고른 30개의 영화를 랜덤하게 순서를 정하여 30일 동안 하루에 영화 하나씩 보고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분석을 쓰는 겁니다.
제가 볼 영화들의 리스트는
여기(클릭)에 있습니다.

내일의 영화는 데이빗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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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이헬게른    친구신청

저에겐 페르소나 3,4 가 익숙한지라... 사실 게임이줄 알고 들어왔 ....

그레이트존    친구신청

영화도 재밌습니다
영화나 게임이나 둘다 결국 칼 융의 페르소나 이론에 기반한 것도 같고.

오니카제    친구신청

혼자살아간다면, 사람에게 페르소나는 필요없지요.

인간관계속에서 서로가 원하는 모습만 보려는 의지가 투영되다보니, 사람은 자연적으로 상대방에게 보여주기식의 페르소나를 가지게 된거라 생각합니다.
섬세하지않다면 자연적으로 투영화되는 페르소나의 의미를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생각을하고 그것에 대해 파악하려 들다보면 자연스럽게 페르소나와 자신의 본연의모습을 비교할수 밖에 없고, 거기에서 사람이 방황한다고생각합니다.

솔직히 깊이 생각한다는 것을 하지않으면 자연스레 페르소나와의 본연의 괴리감을 느끼지는 않을테지만, 다양한 인간군상과의 교류속에서는 오히려 그 괴리감을 느끼지않는게 더 힘들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레이트존    친구신청

저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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