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The Apartment)
감독: 빌리 와일더 (Billy Wilder)
제작년도: 1960년
장르: 로맨스, 드라마, 코미디
<선셋 대로>, <7년만의 외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뜨거운 것이 좋아>... 전부 시대를 앞서간 센세이셔널리즘을 선호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작품들입니다. 빌리 와일더 감독은 1944년 <이중 배상>으로 히트한 후 <선셋 대로>라는 불세출의 걸작을 만든 감독으로 기억되는데요, 사실 마릴린 먼로하면 생각나는 영화인 <7년만의 외출>과 <뜨거운 것이 좋아>도 감독한, 로맨틱 코미디에도 그 재능을 발휘한 감독입니다. 실제로 빌리 와일더 감독의 커리어는 마치 하워드 혹스 감독이 생각날 정도로 여러 장르를 오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혹스 감독과도 같이) 헐리우드 황금기 시절 자신만의 특색을 유지한 감독중 한명입니다. 이 감독의 전성기의 마지막 작품이 바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로, 때는 이미 헐리우드 내에서 악명높은 '제작 코드'를 폐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 개봉한 영화이죠.
위에 언급된 작품들중 특히 <선셋 대로>부터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까지의 영화는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요, 바로 상당히 시대에 앞서간 자극적인 소재(<뜨거운 것이 좋아>는 개봉 당시로써도 시대극이였기는 하지만), 현대사회를 겨냥한 풍자와 시니시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장소라는 개념을 사용해 영화에 나타내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리 와일더 감독의 작품들이 센세이셔널하다고 언급했는데요, 실제로 <뜨거운 것이 좋아>의 테마(여장과 호모섹슈얼리티)는 당시로썬 너무나 파격적이라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959년 개봉한 영화중 가장 히트한 작품중 하나였고, 결국 이 영화로 헐리우드의 제작 코드가 서서히 그 의미를 잃어가게됩니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그런 작품을 만든 감독의 다음 작품답게 달콤한 로맨스의 이면에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와 기성세대의 위선적인 도덕관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 작품으로, 이 또한 센세이셔널하다고 할 수있습니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의 주요 테마중 하나는 바로 '오피스 와이프'같은 회사인들의 불륜행각이며, 이는 <7년만의 외출>를 생각나게 합니다. 하지만 만약 <7년만의 외출>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런 불륜 행각을 본능적으로 원하는 주인공에 감정 이입을 하도록 짜여져 있는 영화라면,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이런 도덕성의 붕괴를 제 3자의 시점으로 풍자하기 위한 영화로써 빌리 와일더 감독의 시니시즘이 훨씬 더 잘 나타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직접적인 연애 행위를 바라보는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을 때가 많은데요, 이런 시점으로 관객들은 당시 만연하던 불륜을 단편적이지 않으면서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영화는 한 야망이 큰 회사원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이 회사원은 자신의 아파트를 불륜행각을 은밀히 할 곳이 필요한 회사의 매니저나 상사들에게 빌려주는 남자인데요, 이렇게 자신의 상사를 도와주는 대가로 승진을 약속받습니다. 겉보기엔 회사일에만 목을 맨 남자같지만 이런 주인공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니 바로 엘레베이터 걸인 프랜으로 이 프랜을 두고 일어나는 삼각관계에 빠지게 되면서 주인공도 자신의 처지와 상사들과의 관계를 되돌아 보게됩니다. 와일더 감독은 이렇게 플롯으로도 '아파트'라는 공간으로 인해 얽힌 사람들의 관계가 하나의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로 영화를 풀어나갑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아파트', 더 나아가서 '공간'이라는 개념은 크나 큰 중요도를 차지합니다 (이는 <7년만의 외출>에서도 비슷합니다). 주인공의 아파트 룸은 굉장히 프라이빗한 장소라고 볼 수 있는데, 하나의 사유지라서기보단 바로 이 아파트 룸에서 여러 커플들의 은밀한 연애 행각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 아파트야 말로 현대인이 선호하는 사생활의 '사회로부터의 의도적 격리'라고 볼 수 있고, 이런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상징은 주인공이 집에 혼자 있을 때는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성격으로 더욱 부각됩니다. 와일더 감독은 주인공과 그의 상사들이 '아파트'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초점을 맞추어 현대인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외로움을 조명하는 것이죠.
이는 당연히 주인공과 그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초반에 그는 이웃들로 부터 굉장히 많은 컴플레인을 받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열쇠를 빌려준 사람들이 죄다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파티를 즐기기 때문이죠).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 수록 주인공과 옆집의 드레퓌스 의사는 서로의 관계가 점점 호전되고 결국 옆집에 사는 사람이 아닌 '이웃'으로써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화 초반의 이웃관계에 대한 묘사로 와일더 감독이 현대 사회에 만연한 폐쇄성이 짙은 사생활로 인해 사람들간의 멀어지는 관계를 보여주었다면 영화의 마무리는 결국 현대 사회에서도 가능한 이웃간의 유대감을 보여줍니다.
이 아파트의 대칭점에 있는 공간은 바로 주인공이 일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주인공이 상사들에게 아파트 열쇠를 빌려주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빠른 승진을 위해서 인데요, 실제로 주인공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승진을 하게 되고 자신만의 오피스 룸을 얻게 되죠. 그리고 이렇게 바뀌는 주인공의 위치는 내러티브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의미를 갖습니다. 주인공이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하면서 일을 했지만, 첫 승진 후 가지게 된 자신만의 공간은 다른 사람들과 유리창으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지게되는 공간은 고작 유리창 세개에 바로 옆 공간은 자신의 상사의 오피스인 바깥과는 완전히 격리된 곳이지요. 이렇게 영화는 사회인은 결국 공적인 자리에서 조차 점점 올라갈 수록 다른 이들과 더욱 더 멀어진다는 패러독스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만의 오피스 룸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이 행하는 행위가 바로 불륜인 것이죠. 지극히 자본주의적 성공을 위해 자신은 점점 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가지만 쉽고 빠른 자극을 원하는 충동은 남아 있어 행하는 행위가 바로 불륜이고, 결국 이런 전체적인 그림을 통해 와일더 감독은 당시 만연한 현대인들의 부적절한 인간관계는 바로 사회의 문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런 충동은 영화 초반에 주인공이 보는 TV 채널들로 너무나도 절묘하게 암시되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회사에서 돌아와 TV를 키고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스폰서들의 광고가 끝나기를 기다리죠.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빨리 끝나질 않고, 결국 주인공은 채널을 돌려 다른 프로그램들을 보지만 전부 맥락없는 자극적인 장면들일 뿐입니다. 만약 영화를 결혼이라 생각하고 광고를 기다리는 행위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승진이라 생각한다면, 맥락없는 자극적인 장면들은 바로 이런 불륜인 것이죠. 이렇게 와일더 감독은 엘리트 지상주의 사회가 낳은 이런 기묘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도덕성의 몰락을 이런 오피스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에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 아파트와 오피스를 연결해주는 또다른 공간이 바로 엘레베이터입니다. 엘레베이터는 주인공을 자신의 아파트에서 회사로, 혹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장치로 영화에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엘레베이터 걸인 프랜이야 말로 주인공을 격리된 곳에서 또다른 격리된 곳으로 보내주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죠. 주인공은 자신의 오피스에 잇을 때나 자신의 집에 있을 때나 언제나 혼자이지만, 이 엘레베이터에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입니다. 이 엘레베이터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엘레베이터 걸 프랜은 주인공의 집과 회사라는 상징적으론 비슷한 공간의 연결선으로 작용하면서 두 공간이 가지고 있는 격리감과 폐쇄성을 한꺼번에 무너뜨립니다.
이렇게 두 공간의 연결을 맡고 있는 프랜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마 주인공이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던 이런 폐쇄적인 사생활 습관에 대한 반발과 자신을 가둔 이런 감옥에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 갈망을 뜻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실제로 프랜이 자신의 집에 있게 되면서 주인공의 스케쥴은 발칵 뒤집히게 되고 결국 '은밀한 곳'이였던 자신의 집에 계속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어 영화 중반부터는 아파트가 가지고 있던 폐쇄성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이사를 가는 결심 또한 그 아파트가 상징하는 폐쇄성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명작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완벽한 완급 조절의 플롯과 명확한 인물 묘사, 그리고 엔딩이 가져오는 수준급의 장르적 쾌감도 있지만, 역시 다른 빌리 와일더 감독 작품들처럼 감독 특유의 풍자가 영화에 정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약 관객들이 주인공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다면, 와일더 감독은 주인공과 주인공이 위치한 공간 사이의 관계가 가지는 의미를 통해 현대 사회 전체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죠. 결국 와일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회사원과 엘레베이터 걸의 풋풋한 사랑뿐만이 아닌 관객들 자신들의 '아파트'가 과연 열린 곳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하나의 제안이 아닐까요.
한줄평: "당신의 '아파트'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요."
이 글은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30일 영화 챌린지"중 하나입니다.
"30일 영화 챌린지"는 그다지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랜덤하게 고른 30개의 영화를 랜덤하게 순서를 정하여 30일 동안 하루에 영화 하나씩 보고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분석을 쓰는 겁니다.
제가 볼 영화들의 리스트는 여기(클릭)에 있습니다.
내일의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