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란 (?)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Akira Kurosawa)
제작년도: 1985년
장르: 드라마, 전쟁
만약 <7인의 사무라이>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첫 대서사극이였다면, <란>은 30년 후 만들어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마지막 대서사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리메이크했다고 볼 수 있는 작품으로써, 다른 4대 비극(<맥베스>, <오셀로>, <햄릿>)과는 달리 한 인간에 포커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군상극에 가까운 구성을 가진 걸로 특이한데요, 이는 구로사와 감독의 첫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7인의 사무라이>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한 인물이 전쟁에 무너지는 이야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의 이해가 엇갈리며 생겨나는 것이 전쟁이자 '난세'라고 말하는 것이죠.
구로사와 감독은 이런 <리어 왕>이 가지고 있는 군상극을<란>에서 더욱 부각시키는데요, 이는 제목에서도 드러납니다. <리어 왕>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채택하는 대신 '란(?, 어지러울 난)'이란 글자를 씀으로써 전쟁 그 자체를 그린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갑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묘사되는 '전쟁'은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내러티브의 진행을 위한 한 '장치'가 아닌,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생겨나는 '결과'로써, 이는 구로사와 감독이 보여주는 전투 씬에서도 부각됩니다. 이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샷이 바로 낙마하는 자들, 죽어가는 자들, 그리고 이미 죽은 자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몽타주 씬들인데요, 이는 전투라는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부각시키기보단 오히려 영화 내내 강조되는 감독의 니힐리스트적인 성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칼을 휘두르며 적을 베는 것보단 죽어가는 사람에 카메라를 집중하면서 전쟁이라는 순간 그 자체보다 그 후 남겨지는 참혹함과 공허함을 나타내는 것이죠 (<7인의 사무라이>에서 보여지는 죽창에 의한 학살과도 비슷합니다).
<란>은 외국어 영화에 헐리우드 자본이 투입되지 않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은 영화인데요, 이런 의상과 소품의 화려함은 관객들에게 비주얼적인 쾌감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영화 자체가 관객들에게 전하려는 혼돈이라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란>의 전투 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수천명의 병사들이 등에 강렬한 색의 사시모노(差物, 전국시대때 군사들이 등에 꽂은 작은 깃발)들을 하나씩 꽂고 일제히 돌진하는 장면들인데요,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하나의 '색'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또한 그 색이 다른 색(즉, 다른 군대)과 충돌하는 장면에선 시각적으로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기에 혼란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차이가 극명한 색들은 등장인물들 각각의 동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카에데 공주는 복수, 첫째 타로와 둘째 지로는 욕망, 그리고 셋째 사부로는 효심등, 이런 서로 다른 동기와 생각을 가진 자들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일어나는 것이 전쟁과 전쟁이 보여주는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혼돈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표현한 것이 결국 미쳐버리는 아버지 이치몬지 히데토라와 그가 입고 있는 하얀 옷입니다. 그리고 이 하얀 옷은 지로와 타로가 히데토라의 성을 공격한 후, 불타는 성에서 히데토라가 걸어나오는 장면에서 빨간 사시모노를 맨 지로의 군대와 노란 사시모노를 맨 타로의 군대의 색상과 대조되며 시각적으로 표현됩니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히데토라는 전쟁이 가지고 있는 허무함과 광기를 상징하고 바로 그 전쟁에 의해 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보며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캐릭터이죠.
군상극이라 할 수 있는 <란>에서 굳이 주인공을 꼽으라면 바로 이 히데토라입니다만, 그도 결국 이 비극의 화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초반 이 후엔 능동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밖에 없고, 그가 광기에 빠지는 것 또한 관객들이 감정이입할 포인트가 아닌, 영화가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관객들은 이런 히데토라를 보며 구로사와 감독이 스크린에 펼치는 전란의 혼돈과 허무함을 느끼게됩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리어 왕>의 니힐리스트적인 요소를 더욱 부각시켰다고 했는데요, 이는 히데토라의 광대인 쿄아미의 존재로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옵니다. <리어 왕>에서도 광대가 등장하는데요, 이 광대는 셰익스피어나 당시 극작가들이 자주 쓰던 '현명한 광대'라는 캐릭터의 전형적인 표본으로써, 광기에 빠진 리어왕과 관객들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장치로써 존재합니다. 하지만 <리어 왕>의 광대는 중반 이 후 비중이 없어지는 반면, <란>의 쿄아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히데토라의 곁을 지키며 관객들에게 스크린에 펼쳐지는 살육과 공허함을 극적으로 설명하며 전달합니다.
만약 <란>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를 뽑아야 한다면 전 이 쿄아미를 뽑습니다. 쿄아미는 관객들과 히데토라(더 나아가 그가 상징하는 전란시대의 혼란과 공허함)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쿄아미 자체가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캐릭터이고, 또한 쿄아미가 바로 <란>이라는 극에서 관객들을 상징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죠. 초반에 특히나 강조되는 쿄아미가 행하는 광대노름은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는 당시 상황을 적절하게 비꼬며 관객들에게 설명을 해줍니다. 이런 쿄아미의 해석에 의해 관객들은 현재 펼쳐지고 있는 장면 뒤에 존재하는 정치적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고, 결국 이런 접근은 군상극이라는 <란>의 성격의 더욱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쿄아미가 가지고 있는 깐죽대면서도 진실된 성격과 미쳐버린 나머지 평야를 방황하는 히데토라를 끝까지 따라가며 그에게 날카로운 조언을 해주는 것도 관객들에게 쿄아미란 인물에 감정이입을 더욱 쉽게하여 '민간인'이 본 전란의 허무함을 관객들이 쉽게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중반에 한 씬에서 쿄아미는 마치 카메라를 직접 보는 듯이 대사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에 입각한 연출로서 관객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히데토라에 감정을 이입시키기보다는 군상극이라는 거대한 코미디를 전체적으로 보게만듭니다. 그리고 쿄아미는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히데토라를 마치 친구처럼 대하고 존댓말도 안쓰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는 겉으로는 아버지를 위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아버지를 배신하는 아들들과 비교가 가능하고, 이로 인해 쿄아미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부자연스러움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이런 붕 뜬 존재의 쿄아미가 히데토라에게 던지는 말들은 관객들, 혹은 감독이 히데토라에게 하고 싶은 말과 비슷하며, 이런 연출로 구로사와 감독은 히데토라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기보단 <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여 영화가 가지고 있는 니힐리즘을 극대화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7인의 사무라이>는 물론이고 다른 영화에서도 구로사와 감독은 폭력의 허무함을 많이 다뤘는데요, <란>은 그런 감독의 성향을 가장 많이 드러내는 작품중 하나로써, 구로사와 감독이 만들어낸 세계는 마치 조그만 정병들이 의미없이 움직이며 사라지는, 비극이라기엔 블랙 코미디적인 느낌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전쟁을 비꼼으로써 전쟁에 목을 매고 사는 인물들의 군상을 하나의 거대한 의미없는 코미디로 묘사하는 것이죠. 만약 <란>을 한명의 시점으로 봤었다면 드라마틱한 복수극, 혹은 욕망에 빠진 자의 타락정도의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란>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시점이란 바로 쿄아미이고, 쿄아미의 시점으로 본 전쟁이란 부질없는 비극일 뿐입니다. 이치몬지 가의 인물들이 서로를 죽이려 들며 눈을 파내든, 목을 치든, 미쳐버리든, 패륜을 하든, 결국 이 비극을 끝내는 것은 광활한 대지가 보여주는 압도적 허무감이죠.
한줄평: "광대의 시점으로 본 전쟁이라는 거대한 코미디."
이 글은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30일 영화 챌린지"중 하나입니다.
"30일 영화 챌린지"는 그다지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제가 랜덤하게 고른 30개의 영화를 랜덤하게 순서를 정하여 30일 동안 하루에 영화 하나씩 보고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분석을 쓰는 겁니다.
제가 볼 영화들의 리스트는 여기(클릭)에 있습니다.
내일의 영화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판타스틱 Mr. 폭스>입니다.
뭐 그만큼 여러 감독들에게 명작소리를 듣게 되지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