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레이트 뷰티 (La Grande Bellezza)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 (Paolo Sorrentino)
개봉일: 2013년 5월 21일 (이탈리아), 2014년 3월 14일 (북미), 2014년 6월 12일
장르: 드라마
<그레이트 뷰티>는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에 나오는 인용구로 시작합니다. "여행이란 상상력을 훈련시키기에 굉장히 유용하다. 상상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실망과 고난이다. 우리의 삶이란 여행은 전부 상상이다. 그리고 그 것이 장점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 사람, 동물, 도시, 물건들, 그 것은 전부 상상의 산물이다. 결국 삶의 여정이란 소설이다. 그저 상상된 이야기일 뿐이다." 소렌티노 감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문학 작품으로 이 <밤 끝으로의 여행>을 꼽았는데요, <그레이트 뷰티>가 보여주는 삶의 여정을 보면 이 인용구만큼 영화를 잘 설명하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독백을 제외하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인용구를 충실히 따라가며 진행됩니다.
영화는 조용한,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로마의 한 유적지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여행하는 장면과 유적 안에서 성악을 하고 있는 수녀들을 교차편집하며 보여줍니다. 이 첫 오프닝 씬은 한명의 관광객이 심장마비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장면으로 끝나느데요, 그리고 펼쳐지는 로마의 전경과 대조되어 로마라는 도시를 묘사합니다. 로마란 셀 수 없이 많은 유적과 조각들, 미술품들과도 같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가진 도시이자, 그 과거가 결국 죽어간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레이트 뷰티>에서 보여지는 로마는 아름답지만 죽어가는 도시고, 이런 우울한 센티멘탈리즘이 이제 막 65세 생일을 맞은 주인공의 삶과 절묘하게 교차됩니다. 주인공 또한 과거에 화려한 삶을 지냈고 나이가 든 지금 죽음과 마주하며 과거에 존재했던 '진실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것을 보면 이 영화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러브 레터인 만큼 로마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씬은 오프닝 씬과는 완벽하게 대조되는 씬입니다. 주인공의 65세 생일 파티로 엄숙한 성가대의 노래가 아닌 현대적인 일렉트로니카 음악과 음악에 취해 몸을 정신없이 흔드는 사람들, 욕정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술에 취해 골아떨어지는 사람들등, 지극히 현대적인 로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현대적인 쾌락에 취한 사람들을 보여주며 영화는 로마라는 도시(그리고 나아가 주인공 또한)가 가지고 있는 이 이질적인 두 얼굴의 공존을 보여주는 동시에, 타락해가는 로마 상류층과 예술계를 조명합니다. 이런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라는 테마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모티프중 하나인데요, 예를 들어 이 생일 파티에서도 늙은 자들과 젊은 이들이 함께 춤을 추며 즐기고, 현대 미술과 고전 미술을 나란히 보여주며 현재와 과거의 아름다움 사이에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담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처음 느끼게 되는 점은 바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만약 펠리니 감독이 21세기에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런 영화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영화의 스타일이 펠리니 감독의 그 것과 비슷할 정도로 <달콤한 인생>과 <8½>가 연상되는 포인트가 많은 영화입니다. 특히 <8½>에 대한 오마주는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주인공인 젭 감바르델라는 마치 <8½>의 귀도와 귀도를 따라다니는 비평가를 합친 듯한 인물로, 만약 아름다움을 맹목적으로 찾으려는 그 집념이 귀도와 비슷하다면, 그 아름다움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은 비평가의 그 것과 비슷합니다. <그레이트 뷰티>는 젭이 내면에서조차 지극히 냉소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반영하여 진실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집념과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냉소적 시각이라는 어찌보면 역설적인 두가지 목표가 공존하는 젭의 내면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여정을 탐구합니다.
그리고 <8½>의 귀도가 과거에서 자신의 영감과 평안을 찾았듯이, 젭 또한 과거에서 자신이 찾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는 로마가 가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질적인 도시상으로 상징되지요.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혼란스런 도시에 사는 인물로써 젭은 자신의 삶에 무료함을 느끼고 '진실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데, 이를 젭(과 로마의 상류층들)은 과거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젭이 자신의 주위에 있는 아이들을 보며 나타납니다. 그의 눈에는 방황하는 아이들이야 말로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만, 그 자신은 그 젊음을 직접 느끼기엔 너무 늙었습니다. 이런 딜레마 속에 젭은 점점 냉소적으로 바뀌어 가고, 결국 젊은이들의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남긴 잔혹한 패러독스 앞에 무력해져가는 자신을 보게됩니다.
젭은 40년전 책을 쓴 적이 있는 작가이지만, 그 책이 엄청난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젭 자신은 자신의 글에 내포된 본질적인 허무함에 질려버린 나머지 언론가로 전향하여 예술을 만드는 대신 예술을 비판하는 자로 40년을 살아옵니다. 그는 현대 미술이 가지고 있는 이해 불가능한 모호함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예술가조차 자신의 창조물에 의미를 모르는 것에 대한 이 '거짓된 예술'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에게 '진실된 아름다움'이란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이며, 이 과거가 남긴 단편적인 예술 작품으로 그 아름다움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려는 인물이죠. 실존하는 거짓과 사라져버린 진실 사이에서 영원한 아름다움을 찾으며 방황하는 주인공을 보면 냉소적이게 되어버린 그의 성격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영화는 주제가 가지고 있는 잔잔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이 움직이는 카메라워크를 보여줍니다. 카메라는 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이런 움직임은 마치 그의 방황을 보여주면서 멈추지 않는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영화는 로마에 있는 무수한 고전주의 예술 작품들을 보여주지만 하나를 오랫동안 보여주는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과거란 아무리 집착해도 흘러가는 법이란 것을 시사하는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이 또한 주인공의 상황과 절묘하게 들어맞습니다.
이런 거대한 주제를 허세에 가까운 대사들로 가득 찬 각본으로 전달하는 영화는 언뜻보면 영화가 전달하려는 주제와도 같이 공허하며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허세와 겉으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아름다움 밑에는 삶의 방황이라는 주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영화중 성녀라고 불리는 인물이 젭에게 강조한 '뿌리'의 중요함은 바로 영화가 전하려는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죠. 모든 이들은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은 삶 그 자체가 바로 그 아름다움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뿌리에 대한 집착은 젭이 보기엔 전혀 황홀해 보이지 않죠. 그리고 이 패러독스는 영화가 끊임없이 보여주는 황홀한 예술의 향연 밑에 존재하는 젭의 방황이라는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와 대조되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젭이 결국 찾아낸 '위대한 아름다움'이란 이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방황하는 삶 그 자체를 뜻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셀린이 말했듯이 젭이 진정 원하던 영원한 '아름다움'은 상상의 산물이란 것이죠.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약간의 황홀함을 즐기고, 그보다 훨씬 많은 추악함을 경험하며 죽음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진실이란 결국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고 실제 아름다움이란 화양연화처럼 삶을 살아가면서 지나가는 순간들이라고 영화는 거듭 말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들이야 말로 죽음을 통해 진정한 '위대한 아름다움'으로 거듭난다는 것이죠. 어찌보면 참으로 허무하다고 볼 수 있는 엔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허무한 여정이 끝나고 나면 보여지는 크레딧 샷은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한줄평: "로마. 아름다움. 그리고 위대한 방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