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미그랜트 (The Immigrant)
감독: 제임스 그레이 (James Gray)
개봉일: 2014년 5월 23일 (북미), 한국 개봉일 미정
장르: 드라마, 멜로
<이미그랜트>는 아주 전형적인 드라마 영화입니다. 주인공이 삶을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위의 인물들과 감정적인 관계(그것이 좋든 나쁘든)를 만들어가는 영화이죠. 기본 스토리조차도 이미 다른 많은 작품에서 그려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주인공이 미국에 와서 죽을 고생하는 이야기'라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이미그랜트>가 하나의 '좋은 영화'로써 자립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감독이 이 복잡한 감정들과 이해관계를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진실되게 전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에바(마리옹 코티야르 분)는 폴란드 출신입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자신의 부모님이 무참히 살해되고 나서, 그녀는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떠납니다. 영국 대사관에서 일한 경력 덕분에 영어를 할 줄 알지만 미국으로 가는 여정은 힘들기만 한데요,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이 두 자매가 미국으로 들어가는 이민자들이 지나가게되는 관문인 뉴욕의 엘리스 섬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의 여동생이 결핵에 걸렸단 이유로 그녀와 생이별을 하게 되고, 그녀 자신조차 다시 유럽으로 추방될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도움을 손길을 주는 남자가 바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브루노로, 그가 여러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나서야 주인공은 비로소 미국 땅에 발을 딛게 됩니다.
러닝 타임 내내 스크린을 지배하는 것은 아름답고 따뜻한 색감입니다. 비주얼적으로 <이미그랜트>는 1920년도 당시 뉴욕의 브룩클린 슬럼을 잘 표현해냈고 (<대부 파트 II>가 생각나는 이미지가 많습니다) 이런 이미지들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씁쓸한 노스탤지아를 효과적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이를 전체적인 분위기를 구축하는데에만 사용하지, 이런 이미지가 영화 전체를 압도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이미그랜트>를 감독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이 영화를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개인적인 영화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영화 배경은 자신의 증조부가 미국에 막 이민 와서 겪은 일들을 참고하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미그랜트>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점은 바로 매우 진실된 느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멜로 드라마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과장되고 서술이 인공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미그랜트>는 흡사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강 위의 배에서 강기슭에 사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하는 느낌이 듭니다. 내러티브의 굴곡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중요 포인트들이 감독의 자신감있는 연출로 자연스럽게 소개되어 묘사되기에 관객들은 정말 편하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됩니다.
이 군더더기없는 자연스러움은 감독만의 특색을 부각시키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이는 다른 영화에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지만, <이미그랜트>같이 천천히 흘러가는 드라마에선 영화의 전체적인 페이스를 탄탄하게 잡아주어 균형잡힌 이야기 전개가 될 수 있도록 조절합니다. 몇몇 평론가들은 <이미그랜트>를 '새로운 아메리칸 클래식(고전)'이라고 평했는데, 이는 어찌보면 사실입니다. <이미그랜트>의 이야기는 굉장히 '미국적'이고 그 연출 방식은 매우 '고전적'이거든요.
이런 균형잡힌 연출은 영화가 등장인물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이미그랜트>를 완성시키는 것은 바로 이 등장인물들이기에 이런 연출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복잡한 감정 사이의 이해관계는 오로지 등장인물들이 제대로 묘사되었기에 성립할 수 있고, 바로 이런 점이 영화가 인공적인 느낌이 아닌, 자연스럽고 진실된 감정을 담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주인공인 마리옹 코티야르는 비록 프랑스 배우지만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장면이나 강한 폴란드어 억양으로 영어 대사를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 폴란드 출신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코티야르의 진정한 매력은 억양이 아닌, 그녀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만들어가냐에 있습니다. <이미그랜트>의 스토리에서 코티야르는 전형적인 히로인의 모습이 아닌,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다면적인 인간성을 주인공에게 부여합니다. 비록 멜로 드라마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로맨스에 빠져드는 묘사는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고, 오히려 여동생을 구하려는 그녀의 강한 의지가 더욱 부각되면서 두명의 남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진부한 여주인공이 아닌, 자신만의 의지가 강력한 여성상을 가진 여자로 묘사되어 이민자들의 사회가 가진 감정의 복잡함 사이에서 나름 굳건한 중심으로 영화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캐리합니다.
그리고 이런 주인공의 묘사는 영화 첫 장면부터 강조되는 자유의 여신상의 이미지와 지속적으로 대조됩니다. 자유의 여신상이야 말로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지만, 영화는 돈을 벌기 위해 성인용 극장에서 야한 옷을 입고 자유의 여신상을 연기하는 코티야르를 통해 그 '아메리칸 드림'이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와 허무함을 간접적으로 역설합니다. 영화는 멜로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절대로 로맨스가 아닌 '이민자'들의 이야기이고, <이미그랜트>는 이를 러닝 타임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마리옹 코티야르의 상대역으론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브루노가 있습니다. 결국 주인공 에바를 매춘의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론 그런 그녀에게 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는데요, 호아킨 피닉스는 여기서도 열연을 보여줍니다. 사실 영화 초반엔 그의 최근작인 <그녀>가 가진 섬세한 연기나 <마스터>의 혼을 다한 듯한 메소드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지만, 브루노가 본격적으로 내적 갈등이 시작할 때 피닉스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브루노 역시 어릴 때 미국에 이민와 힘든 일을 다겪은 '이민자'입니다. 그런 그는 자신의 성장 배경 덕분에 남을 등쳐먹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냉혹함은 피닉스가 보여주는 교묘한 연기 아래 숨겨져 있습니다. 영화는 이민자들의 삶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적대적인 사회에 혼자 놓여진 삶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하는데, 이는 피닉스의 연기로써 비로소 자연스럽게 완성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 수록 그가 보여주는 사랑과 냉혹함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의 연기는 마치 <글래디에이터>의 콤모두스 역이 생각날 정도로, 섬세한 감정 변화는 물론, 폭발적인 감정의 우발적 분출까지 완벽하게 묘사하여 외유내강적인 코티야르와 적절한 균형을 맞춥니다.
이 둘에 비해 제레미 레너는 그다지 특별한 연기를 보여주진 않지만, 캐릭터 연기로는 충분히 신빙성있게 연기해 영화가 자연스럽게 전개되는데 일조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캐릭터에 각본이 선사하는 것 만큼 이상의 깊이를 만들어내진 않기 때문에, 만약 <이미그랜트>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뽑으라면 아마 제레미 레너의 (어디까지나 비교적으로) 미스캐스트라고 할 수 있겠죠.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미국의 '이민 사회'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는 꽤 많습니다. 하지만 많은 영화들이 이런 '이민 사회'라는 소재를 전체적인 배경으로 쓰고 결국 본질적으론 다른 테마의 영화를 만든 반면, <이미그랜트>는 멜로 드라마의 성격을 답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본질적으론 '이민자'들에게 그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자연스러움에 초점을 맞춘 그레이 감독의 연출은 영화의 엔딩에서도 반영되어, 딱히 엄청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데 주력하지 않는 대신, 그들이 그 시절 겪었던 그 복잡한 애환을 진실된 감정으로 전달하는데 노력하고, 결국 성공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구글어스에서 이민자들이 구금되어있던 엘리스 섬과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섬인 리버티 섬이 얼마나 떨어져있나 한번 체크를 해봤는데, 놀랍게도 바로 붙어 있는 섬들이더군요. 미국에 막 도착한 이민자들이 엘리스 섬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감옥이나 다름없는 숙소의 작은 창문을 통해 보는 자유의 여신상은 어떤 모습이였을까요. 가깝지만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그런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지금도 딱히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줄평: "An American Classic."